발달과정으로 보는 한선의 탄생 우리나라 땅에 자리를 잡은 구석기시대 원시인들이 강가나 바닷가로 이동하면서 살기 시작한 때부터 원시적인 배인 통나무 토막의 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후에 패총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신석기시대 전 기간에 해당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부산의 영도影島 동삼동 패총과 지금의 한국해양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차치섬朝島의 패총이 유명하다. 그 외로 범방, 수가리, 연대도, 상노대도, 오이도, 궁산, 서포항 등의 패총이 남서 해안에 분포되어 있다. 그 후로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뗏목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서 섬과 육지를
왕래하였다. 인간이 불을 이용하고 도구를 사용하게 되자 통나무의 속을 불로 태운 후에 돌연장(석기도구)으로 속을 파내어 쪽배를 만들었다. 이 무렵 뗏목(토막배)과 통나무쪽배(퉁궁이)가 병행하여 발달하게 되었다.
뗏목배를 타고 가까운 해안으로 나가서 그물로 고기도 잡고 바다 속의 해조도 따고 조개나 해삼, 전복 등도 잡았다.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제주도에서 ‘티우’라고 하는 뗏목배로 자리돔 잡이를 하고 있고, 강원도 강릉시 명주의 정동진과 안인에는 ‘토막배’라고 하는 뗏목배로 미역 등의 해조류를 채취하고 있다. 일본의 서해안(한국의 동해 남쪽 해안)과 쓰시마對馬島, 규-슈九州, 오끼나와沖繩에는 우리의 뗏목배와 똑같이 생긴 ‘제-모꾸부네=ゼ-モクブネ’라는 것이 있다. 1986년에 일본의 대학교수 야마구찌山口晶子 씨가 「韓國 東海岸의 뗏목배」라는 논문에서 “한국의 동해안에서 사용하고 있는 ‘토목배’라고 하는 뗏목배와 일본의 서해안, 쓰시마, 큐-슈 등에 잔존해 있는 뗏목배의 조선造船 방법이 같고 부르는 이름도 ‘뗏목배’-한어韓語’와 ‘제-모꾸부네’-일본어日本語’로서 서로 같다.” 라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한어가 일어로 다음과 같이 음운변화를 한 것이다. ‘떼→ 제’, ‘ㅅ→ -’, ‘목→ 모꾸’, ‘배→ 부네’. 상고시대 이래로 한반도의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 등지에서 이러한 뗏목과 토막배 또는 통나무 쪽배(퉁궁이)를 타고 해류 및 계절풍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도래渡來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형적 조건에 맞춰 발달한 한선의 기본 구조 한국은 반도의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서남해안은 리아스식 침강沈降 해안으로서, 해안의 드나듦이
복잡하며 편평하고 길고 넓은 갯벌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고 작은 섬이 많이 있다. 하루에 두 번, 즉 6시간 10분에 한 번씩 드나드는 밀물과 썰물의 변화가 있고 그때의 조수 높이 차이는 인천지역에서 평균 8미터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지형적 조건에 가장 적합하고 이에 잘 적응하는 배는 배밑, 즉 선저船底가 편평해야 하고 안정성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뗏목과 같은 편평한 선저를 가진 평저선平底船이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되었다. 편평하고 긴 갯벌이 펼쳐져 있어 만조 때 해안이나 부두로 들어온 배는 그대로 갯벌 바닥에 편하게 앉을 수 있으며 옆으로 넘어지는 일이 없다. 그러나 서양의 ‘V’형 첨저선尖底船은 갯벌에 앉으면 곧 옆으로 넘어지게 된다.
첫 번째, 강이나 바다에서 사용하는 거룻배다. 삼판杉板 두 장 또는 석 장을 물고기 비늘처럼 겹쳐서 나무못으로 봉합한다. 강이나 바다에서 운반선으로 사용한다. 포구나 만내灣內에서 소하물을 운반하거나 해안에서 해조류 등을 채취한다. 낚싯배로도 사용한다. 원근해遠近海를 항해하는 대형선에서 자선子船으로도 사용한다. 뗀마 또는 전마선은 일본식의 거룻배이다. 두 번째, 강과 호수에서 사용하는 강선江船이다. 강선은 강이나 호수에 관계없이 삼판은 하판下板과 상판上板 두 장을
봉합하고 이물과 고물은 횡판으로 대어 막는다. 배 한가운데에 멍에를 걸고 돛대를 세우고 사각 돛을 매어 달았다. 옛날의 강선은 떡 목판과 같이 생겼다 하여 목판배라고 하였다. 강이나 호수의 나루턱에서 사람이나 짐을 실어 나르는 배는 나룻배라고 한다. 한강의 상류인 충주나 인제에서 농산물이나 임산물을 싣고 하류인 서울로 내려왔다가, 마포에서 어염魚鹽이나 생필품을 구입하여 돛을 달고 올리는 배가 있었는데 이러한 배를 늘배廣船(평저선平底船)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후 내륙지방의 세곡稅穀을 이러한 늘배를 이용하여 개경이나 서울로 운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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