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워홀 후기 - dog-il wohol hugi

독일 워홀 후기 - dog-il wohol hugi

지난 10월 18일까지 진행이 되었던 워킹홀리데이 공모전에 참여를 하였었습니다. 아직 영상 편집 기술은 바닥 수준이라 영상은 포기하고, 독일 생활중 찍었던 사진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5개의 사진을 선정하고, 수기를 써서 [사진]과 [수기]에 참여를 하였죠. 포스터에 공고된 대로 11월 13일 오늘 수상자가 발표되었고,

네. 아쉽게도 분야별 총 8명의 인원에 선정되지 못하고 광탈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수기를 쓰면서, 제가 처음 독일에 나왔던 마음가짐을 다시금 되새겨 볼 수 있었고, 사진들을 찾으면서 즐거웠던 기억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안고 참여했던 수기와 사진들을 이곳에 오픈해 볼까 합니다.

전문 작가도 아니고, 전문 사진사도 아니기에 (작가나 사진사였으면 8명에 들지 않았을리 없겠죠? XD) 부끄럽기도 하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수기 - 서른, 그 마지막 열차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만나다

1. 인생은 타이밍

서른이 되기 3달전.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독일행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들려있었다. 불과 3달전만 해도 생각지도 못했던 독일. 그리고 내 손에 들려진 비자와 비행기표. 살아온 30년의 생활보다 더 급하게 많은 것이 변했던 3달이었다. 내리는 빗줄기는 무언가 내 마음을 허하게 만들었지만, 이사하는 날 비오면 잘 산다는 말처럼 한편으로는 행복감과 기대감이 충만해 있었다.

4년 하고도 절반. 46개월의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나름 인정도 받아 3년만에 대리로 진급을 했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급작스럽게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렇게 내 인생은 큰 변화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있었다.

후회하지 않냐고? 물론 많이 후회를 했다. 지금도 마음속 작은 어딘가에는 후회라는 작은 씨앗이 움츠리고 있다. 독일에서의 생활이라는 것이, 타국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삶이라는 것이 녹록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독일 행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많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고,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분명 후회를 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나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되어준 것만은 분명하다. 변화의 기회, 그리고 성장의 기회. 나는 분명 몇 뼘이나 성장하였을 것이고, 앞으로도 변화하고 또 성장할 것이다.

가끔 맥주 한잔을 마시며 과거생각을 하다 보면 늘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그 선택이 조금만 늦었다면?‘

인생은 타이밍이라고들 한다. 나는 그 좋은 타이밍에 좋은 선택을 하였던 것 같다.

2. 문제를 극복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독일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곳곳에 변수들이 산재하였고, 소위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부르는 독일 관청의 업무처리는 정말이지 관청 한번 다녀오면 하루의 진을 다 소진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독일에서의 생활도 이러한데, 독일에서의 아르바이트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한식당이라면 충분히 지원을 해볼 만 했지만, 한식당은 끌리지 않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조금 더 열심히 어학공부를 해서 독일회사에서, 적어도 독일 레스토랑에서 경험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사이 짧은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세입자로 살던 집주인 아주머니의 일손을 도와드리는 것이었다. 나름 지역에서 큰 부동산업을 하시는 아주머니는 그만큼 지하실에 많은 자재들과 공구들이 있었는데, 정리가 되지 않아 중구난방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이를 위한 선반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나름 건축공학도라고 공대생 아닌가? 열심히 선반을 지하실 3면에 걸쳐 만들고 나니, 지하실에 또 다른 작업과, 화단 관리용품을 놓아두는 창고 리모델링까지 부탁을 하셨다. 어학원 공부를 하며 일요일에 짧게 병행하였기에 큰 돈은 아니었지만 독일에서 나의 첫 수입이 되었다. 어쩌면 이것 또한 전공을 살린 아르바이트 경험이 아닐까?

그러는 와중에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학시험에 합격을 하고 원하던 대학에 입학허가를 받은 후, 첫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Time Crew라고 하는 Arbeitagentur. 쉽게 표현하면 일종의 직업소개소였는데, 가맹되어 있는 호텔, 레스토랑, 연회장 등에서 인력이 필요할 경우 연결해주는 곳이었다. 대부분 서빙, 음료 서비스, 가벼운 주방보조 등이었는데, 독일인들과의 접촉이 잦은 직업이라서 내가 원하던 바였다. 물론 스스로 원하던 바이긴 했지만 어려움은 넘쳐났다. 어학시험은 합격을 할 정도로 독일어가 늘었다고 생각을 했지만, 실전은 달랐다. 동료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실수, 고객들의 요청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실수를 하는 등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고군분투를 했고, 조금은 깐깐한 독일식 아르바이트 문화에 적응을 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 곳에서 고정적으로 일하는 아르바이트와 달리 여러 곳을 옮겨가며 일을 해야 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단점은 때로는 장점으로 다가왔다. 다양한 곳에서 일을 하며 한 곳의 아르바이트 문화가 아닌 여러 곳의 문화를 비교하면서 전체적인 독일 아르바이트 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고, 늘 새로운 동료들과 일을 해야 했기에, 때로는 실수를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는 그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등 여러 가지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할까? 여러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마음이 맞는 동료들을 만나기도 하였고, 그 중에는 K-POPK-DRAMA로 대표되는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도 있어서, 일 외적으로 가끔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함께 음식도 나눌 정도로 친해지게 된 동료들도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독일의 문화들도 배울 수 있고, 그들이 생각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인식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부분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했다. 예전 쉽게 상처받았던 그들의 행동이 무례함이나 무시가 아닌 그들의 문화의 일부분이고 표현의 차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후, 나의 생활과 나의 마음은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쟤가 날 무시하는 거 아냐?‘ ‚지금 저 행동 인종차별 아냐?‘ ‚이거 차별대우 아냐?‘ 등 어쩌면 건드리면 폭발해버릴 것 같은 긴장감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지내왔던 생각과 강박들이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생각과 행동에 여유가 생겼다.

그래 저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이건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문화를 모르고, 어쩌면 내가 그들의 문화를 모르는 것 일수도 있어.‘ 라는 생각은 마법과도 같은 주문의 한마디였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겉돌고 있지만, 그들 속으로 작은 첫 걸음을 뗄 수 있었다.

3. 이방인에서 핵인싸로 등극하다

누군가‚ ‚독일 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야?‘라고 묻는다면 이 이야기를 해줄 것 같다. 바라던 어학시험에 합격을 하고, 원하던 대학에서 입학허가증을 받을 때도 물론 날아갈 듯이 기뻤지만,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이 경험은 이방인으로서 쉽게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자랑처럼 이야기 할 수도 있는 경험이다. 바로 독일의 명물 옥토버페스트이다.

옥토버페스트는 독일 바이에른 주 뮌헨에서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2주 동안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민속축제이다. 뮌헨이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긴 하지만, 뮌헨이 아니더라도 독일 남부지역에서는 각자 도시에서 크고 작게 옥토버페스트를 즐긴다. 내가 옥토버페스트를 즐긴 도시는 독일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친환경도시 프라이부르크였다. 독일에서 만난 2명의 일본친구들과 와이프까지, 4명이서 한껏 들뜬 긴장감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축제의 장으로 들어갔다. 넘쳐나는 맥주와 소시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들썩이는 노랫소리는 드디어 우리가 축제의 중심에 들어왔구나 싶었다. 한편에 위치한 입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맥주와 소시지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무대 앞쪽으로 조금 더 축제를 즐기러 들어갔다. 그들에 섞여서 함께 뛰고 소리지르며, 오랜만에 누군가의 눈치도 안 보고 즐겁게 즐긴 것 같다. 그 즐거움은 정말 순수한 즐거움이라서 얼굴에 티가 많이 났던 것일까?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던 지역가수들이 무대 위에서 함께 즐길 시민 몇 명을 고르는 와중에, 내 앞으로 와서 내 손을 이끈다. 한국처럼 무대 위에서 노래나 춤을 시키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때 아니면 또 언제 올라가보겠어‘라는 생각과 ‚어차피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데 조금 부끄러워도 뭐 어때.‘라는 생각은 없던 용기를 만들어 주었고 무대위로 이끌리게 되었다. 나 외에도 얼굴에 이미 나 즐거워요!!‘라고 써있는 몇 명의 사람들이 함께였다. 무대 위에서 뭘 했냐고? 그냥 놀았다. 자기들이 노래를 부르고 뛰며 공연을 하는 동안 무대 위에서 함께 어깨동무도 하고 함께 뛰며 놀았다. 말 그대로 놀았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 무대 위에서 가수들과 함께 뛰며, 그 박자에 맞춰서 함께 뛰는 무대 아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정말이지 새로웠다. 내가 가수라도 된 마냥. 약 천명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무대 뒤에서 조금은 움츠려있던 나는 무대 앞으로 나와 더 신나게 뛰며 그 순간을 더 즐길 수 있었다. 길고 짧았던 노래가 끝이 나고 땀으로 범벅이 된 나는 무대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무대 아래로 내려왔지만 가슴은 여전히 그 노래 박자에 맞춰서 신나게 뛰고 있었다. 무대에서 처음 맥주를 마시던 테이블로 돌아가는 그 짧은 길에서 많은 이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 아까 너 봤어!! 건배!!“

너 아까 끝내주던데?“

많은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테이블로 돌아오는 길, 나는 그 순간만큼은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 아닌 진정한 핵인싸였다.

4. 어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내게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주는 의미는 독일에서의 대학 진학을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아서 외국으로 나오는 경우 두 가지 목적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외국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경우일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외국에서의 또 다른 도전을 함에 있어서 그 초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경우이다. 나의 경우는 후자라고 할 수 있다. 독일에서의 석사과정 유학을 목적으로 발급받은 비자가 워킹홀리데이 비자이다. 나와 같은 경우 많은 장점을 가질 수 있다. 우선 한국에서 비자를 소지하고 독일이라는 나라로 발을 디딜 수 있었기 때문에, 초반에 독일어의 어려움 속에서 비자를 받으려 전전긍긍하는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 또한 워킹홀리데이, 말 그대로 노동비자를 포함한 비자였기에 활동의 제약에서 아무래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물론,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언어적인 문제로 인해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독일에 머무는 동안에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후 어학비자와 대학비자로 변경을 하면서 지금까지 독일에서 늦깎이 유학생 신분으로 있는 나에게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주는 장점과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독일로 나오기 전 나는 꽤나 보수적이었고 갇혀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경험해왔던 울타리 안에서 생각하고, 파악하고, 선택을 해왔다. 그런 내가 외국에서 지내면서 경험했던 많은 것들은 때론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한국에서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알 수 없을 그런 경험들이었다.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 워킹홀리데이. 나에게 새로운 경험과 도전의 시작을 할 수 있게 해 준 워킹홀리데이. 함께 부딪히며 고난을 겪었던 이 워킹홀리데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5. 완생을 꿈꾸는 미생, 아직 젊은 나이 30대 중반.

많은 친구들이 안부인사와 함께 이야기 한다. 좋아 보인다고. 그리고 부럽다고. 하지만 나는 가끔은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해외에 나오는 거, 그거 생각만큼 어려운 거 아니라고. 하지만 그거 그대들이 생각하는 거만큼 쉽지만은 않고 로맨틱하지 않다는 거. 평화롭게 잘 사는 줄 아는데 그거 사실 굉장히 치열하게 고군분투하면서 살고 있는 거라고. 너무하다고?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워킹홀리데이 이후 어학비자로, 그리고 학생비자로 독일에서 4년째 지내고 있는 내게도 여전히 해외생활은 진행형이고 우당탕탕이다. 독일에서 가끔 만나는 8년차, 아니 10년차 그들에게 물어봐도 여전히 어렵고 진행형이라고 이야기한다.

독일에 오면서 세웠던 계획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미뤄지고 변하며, 지금 당장 누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너 뭐하고 싶니? 이후에 어떻게 할거야?“

계획은 여지없이 꾸준히 변하고 있고, 또 함께 변화는 환경과 여건에 따라 계획은 또 변하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변할 것이다. 나에게 미래란 여전히 불확실하고 안개가 껴있는 듯 분간이 쉽지 않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길이 있다라는 뜻이지 않을까? 불확실함은 무한한 가능성과 기회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불확실함은 단점이자 장점이다. 해외생활 이후 가지게 된 넓어진 시야와 세계관과 함께, 그리고 나의 이 불확실함과 함께 어디로 어떻게 변해갈지 모를 내 미래와 함께, 한국에서 내 또래 친구들은 벌써 과장, 팀장을 달고 자기의 자리에서 인정을 받으며 각자의 위치를 견고히 하고 있다. 지금의 그들은 어쩌면 이미 완생, 여전히 나는 미생이고 나의 인생은 진행형일 것이다. 적다고 하면 적은 나이, 하지만 많다고 하면 많은 나이 30대 중반. 여전히 안개가 낀 듯 불확실하지만 그러기에 완생이 될 내 미래가 너무나 궁금하고, 마지막은 어떻게 끝이 날지 너무나 궁금한 요즘이다.

독일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20160904일 나는 이렇게 적었다.

[막연하지만 손에 닿을듯한 거리에 있는 작은 꿈을 좀 더 구체화하고 명확히 하기 위해 타국으로 왔어요. 많이 부딪혔고, 앞으로도 더 많이 부딪히고 넘어지겠지만, 열심히 노력할게요.]

모르겠다. 그때 잡힐듯한 그 작은 꿈은 무엇이었는지. 그 꿈이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져 있는 건지. 하지만 분명한 건 여전히 흔들리고 있지만, 여전히 생생히 꿈꾸고 있고,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워홀 후기 - dog-il wohol hugi
독일 워홀 후기 - dog-il wohol hugi
독일 워홀 후기 - dog-il wohol hugi
독일 워홀 후기 - dog-il wohol hu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