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양반 몰락 - joseon hugi yangban mollag

(3) 사회 구조의 변동

양반의 계층 분화

조선 사회의 신분제는 법제적으로는 양천제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계층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의 사회 생활에서 기본적 가치관이었던 성리학은 이러한 신분제를 합리화시켜 주었다.

경제 구조의 변동으로 일부 농민들이 부농층으로 성장하여 갔는가 하면, 많은 농민들은 농토에서 밀려나 상공업자 또는 임노동자가 되었다.

한편, 도시에서는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면서 상업 자본가와 독립 수공업자 등 새로운 계층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종래의 사회 계층 구조를 변질시켜 마침내 신분제의 동요를 가져왔다.

신분제의 동요는 지배층의 분열과도 연관되어 진행되었다. 지배 세력을 결속시키기 위해 시도되었던 붕당 정치가 17세기 후반부터 변질되어 가면서, 지배층 내부에서는 정치적 대립이 심해졌다.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양반들은 자기 도태를 거듭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노론을 중심으로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면서 보다 현저해져서, 다수의 양반들이 정계에서 배제되었다. 몰락한 양반들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나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잔반(殘班)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사회 개혁을 주장한 실학자나 농촌 지식인들은 대개 몰락한 양반들이어서 양반 지주와는 이해 관계를 달리하였고, 기본적으로 농민층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몰락한 양반들은 서당의 훈장이 되어 생계를 유지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농업이나 상공업 등 생업에 직접 종사해야 하였다. 그들은 이름만 양반이었을 뿐이지 사회적, 경제적 처지는 평민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신분 상승 운동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화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은 양반층 인구의 급격한 증가였다. 양반 계층의 자기 도태 현상이 심화되는 속에서도 양반의 인구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점차 늘어났고, 상민과 노비의 인구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양반 인구의 수적인 증가는 양반 계층 자체의 양적 팽창에도 한 요인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하층민의 신분 상승으로 인한 결과였다.

특히, 양 난을 겪으면서 정부는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필요에서 신분 상승의 기회를 합법화해 주었다.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재물을 나라에 바쳤을 때, 정부는 벼슬을 주고 양반 신분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결과적으로 기존의 신분제를 문란하게 하였다.

부를 축적한 농민들은 그 재력을 바탕으로 양반의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는 방법으로 양반의 신분을 얻었다. 그리하여 양반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고, 그것은 양반 신분의 사회적 권위 자체를 떨어뜨리는 작용을 하였다. 부농층이 양반 신분을 얻게 되면 자신과 자손의 군역 부담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피하고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편의를 얻을 수 있었으며, 향촌 사회에서 나름대로 행세할 수 있었다.

한편, 최하의 신분인 노비의 수는 이 시기에 오면서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가혹한 삶의 조건을 견디지 못한 노비들이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거나, 국가에 곡식을 바쳐 상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부에서는 상민이 줄어들게 되면 국가 재정상으로 불리하고, 국방상으로도 지장이 있었기 때문에 상민의 증대를 위하여 노비를 서서히 풀어 주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 초에는 국가가 소유하고 있던 6만여 명의 노비를 해방시켜 주었다. 이와 같이 견고하기만 하던 신분제가 이완되면서 신분 간의 상하 이동이 가능해졌고,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화되었다.

조선 후기 양반 몰락 - joseon hugi yangban mollag
조선 후기 양반 몰락 - joseon hugi yangban mollag

조선 후기의 신분별 인구 변동(대구 지방)

조선 후기 양반 몰락 - joseon hugi yangban mollag
조선 후기의 신분별 인구 변동(대구 지방)

조선 후기 양반 몰락 - joseon hugi yangban mollag

중간 계층의 성장

사회 변동이 심화되는 가운데, 서얼과 중인 등 중간 계층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서얼은 본래 양반의 소생이면서도 성리학적 명분론에 의해 적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 활동에서 각종 제한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일찍부터 그러한 사회 체제에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기술직이나 행정 실무를 맡고 있던 중인들은 그 역할이 크면서도 고급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은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 역시 현실에 불만이 컸다.

사회 생활에서 여러 제한을 받고 있던 중간 계층은 꾸준히 신분 상승의 기회를 모색하였다. 그들은 조선 후기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마침내 신분의 상승을 추구하였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전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자, 서얼들은 이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 후 이들은 영⋅정조 때의 개혁 분위기에 편승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신분 상승을 시도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상소 운동을 폈고, 중요한 직책에 나아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때에는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들이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되기도 하였다.

서얼의 신분 상승 운동에 자극되어 기술직에 종사하던 중인들도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다. 본래 중인은 그 역량이 뛰어날 경우에는 요직에도 오를 수 있도록 법제적으로 보장되어 있었으나,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가 강화되면서 법전의 규정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중인들은 일찍부터 불만을 품어 왔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경제 변동에 부응하여 재력을 축적하고 전문적 지식을 쌓는 등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19세기 중엽에는 대규모의 소청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인층의 노력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를 통하여 전문직으로서의 그들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향촌 사회의 재편

조선 후기 사회 구조의 변동은 향촌 사회의 모습도 크게 변모시켰다. 농민층 내부에서 계층 분화가 두드러지게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향촌 질서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양반 사회의 모순이 크게 드러나는 속에서 지배층의 분열은 중앙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전개되고 있었다.

중앙에서 정치를 주도한 양반 관료들이 지배층의 결속을 위해 붕당 정치를 조성한 것과 같이 향촌 사회에서도 사족(士族)들은 약화되어 가고 있던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조치를 강구해야 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지주로서 농민을 지배하고 있던 계층은 향반(鄕班) 또는 토반으로 불린 사족들이었다. 그들은 16세기 이래 향촌 사회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향안을 만들어 사족 세력의 결속을 강화하고, 향회를 통해 향촌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농민들에게 유교적인 향약을 강요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 경제 구조의 변화 속에서 경제력을 확보한 부농층이 대두하였다. 그들은 사족들의 향촌 지배권에 도전하면서 기존의 향촌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사족들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많은 토지를 상실하였다. 이에 대하여 향촌 사회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부농층은 관권과 결탁하여 성장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부농층은 향안에 참여하는가 하면, 향촌을 이끌고 있던 향회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은 궁극적으로 관권의 강화를 초래하였고, 그리하여 관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아전, 서리 등 향리 세력의 권한을 상대적으로 키워 주었다. 18세기 후반 이래 향리 세력의 성장은 농민에 대한 수탈을 강화시켰다.

농민에 대한 수탈은 이 시기에 부세가 토지를 중심으로 집중되고, 또 공동납제(共同納制)가 강화되는 부세 정책에 의해 가중되었는데, 이 역시 향촌 사회의 질서를 동요시켰다. 이 시기에는 부세의 부담 의무가 있었던 상민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일정량의 부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세, 군포, 환곡 등을 공동납의 형태로 촌락에 부과하였다. 이는 농민의 궁핍화를 가속화시켰고, 결과적으로 농민층의 불만만 고조시켰다.

​조선 정조 때의 박지원이 지은 <양반전>이라는 한문소설이 있다.

가난한 양반이 관아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신분은 낮지만 돈이 많은 부자에게 자신의 양반 신분을 팔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내용인데, 결국 부자는 양반이 지켜야 할 조건들이 너무나 까다롭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양반 신분을 포기하게 된다.

이 소설을 통해 조선 전기까지 엄격하게 지켜지던 신분제도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조선 후기 신분제 변화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공명첩의 매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많은 백성들이 죽었으며, 농토는 황폐화되어 농사지을 땅도 부족해서 백성들은 굶주렸고 세금을 내는 것도 힘든 경우가 많았다.

세금이 적게 걷히자 나라의 살림살이도 당연히 어려워졌다.

"세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소?"

"전장에서 공을 세우면 주던 공명첩을 쌀이나 돈을 많이 낸 백성들에게도 주면 어떻겠습니까?"

"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만든 것도 공을 세우는 것이니 좋은 방법 같사옵니다."

"그렇다면 시행하도록 하시오."

이렇게 조선 조정은 공명첩을 팔아 나라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면 공명첩이란 무엇일까?

공명첩은 관직은 이미 적혀있지만 받는 사람의 이름은 비어있는 임명장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공명첩을 파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공명첩을 통해 받게 되는 관직은 실제로 관청에 나가 일을 하는 관직이 아니라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명예직을 누가 사려고 했을까?

농업과 상업을 통해 많은 돈을 모은 부농과 거상들이 주로 공명첩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이 없었지만 낮은 신분이 불만인 계층이었다.

공명첩을 통해 비록 명예직이지만 관직을 얻어 양반 행세라도 하는 것이 목표였다.

"공명첩을 사면 양반이 될 수 있다고?? 돈이 얼마가 들든지 내 반드시 공명첩을 사고 말리라."

조선시대 양반의 경우 다른 계층보다 세금을 덜 내고 군역의 의무도 면제되었으며 과거시험을 통해 고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이 있었다.

그래서 부농과 거상들은 양반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공명첩을 팔게 되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겼다.

즉 나쁜 마음을 먹은 관리들이 가짜 공명첩을 팔아 부당하게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양반 계층이 갑자기 늘어남으로써 조선 전기를 지탱해 온 신분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산을 담당하며 세금을 내던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의 상민이 줄어들고 혜택을 누리는 양반이 늘다보니 나라의 경제가 더 나빠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는 새롭게 시작된 조선왕조를 효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해서 신분제도가 엄격했다.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이루어진 조선의 신분제도는 계층 간 이동도 거의 불가능했다.

때문에 자신의 신분에 불만이 있는 백성들은 난을 일으켜 불만을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두 번의 커다란 전쟁을 겪고 난 후에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신분제 또한 공명첩 매매 등과 같은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조선 후기 신분제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조선 후기 신분제 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농업과 상업의 발전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두 차례의 큰 전쟁 후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여러 경제 정책이 나오고, 다른 나라와의 교류도 활발해지면서 농업 기술이 발달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으로 모내기법의 보급을 들 수 있다.

모내기법은 볍씨를 모판에서 키워 잘 자란 모를 논에다 옮겨 심음으로써 벼의 수확량을 늘릴 수 있게 했다. 이런 농업 기술의 발달과 특용작물의 재배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부유한 농민, 즉 부농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농업 뿐만 아니라 상업도 크게 발달했다.

안으로는 천여 곳에 이르는 장시가 발달하고, 밖으로는 청나라, 일본과 교역하는 국제무역이 활발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상업 분야에도 많은 돈을 번 큰 상인, 즉 거상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부농과 거상은 신분 제도상에서 상민에 속하는데, 이들은 몰락양반을 이용해 자신의 신분을 높이려고 했다.

양반들 중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양반, 즉 몰락한 양반들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벌이가 시원치 않으면 최후의 수단으로 자기 가문의 족보를 팔아야 했다.

갑자기 돈을 많이 번 부농과 거상은 양반의 족보를 사서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안까지 양반 계층으로 탈바꿈하려 했다.

그런데 족보를 파는 양반들은 어쩌다 몰락하게 되었을까?

몰락양반 1 : 전쟁 통에 집도 부서지고 토지문서도 잃어버려서 이렇게 족보를 파는 신세가 되었다네

몰락양반 2 : 조정에서 다른 양반에게 밀려 관직에서 쫓겨나고 말았지. 그래서 녹봉을 받지 못하니 이 지경이 되고 말았네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이처럼 몰락양반이 족보를 팔기 시작하자 신분제 사회에 큰 혼란이 생긴다.

하지만 모든 상민이 부농과 거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 부유한 상민이 공명첩이나 족보의 매입을 통해 양반이 되자 상민의 수가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남은 상민들의 세금 부담이 더 커지면서 세금 부담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유랑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했다.

천민 계층에도 변화의 바람이 부는데, 관청이 소유하고 있던 공노비의 천민 신분을 상민 신분으로 바꿔준 것이다.

상민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노비를 상민으로 바꾸어 세금 걷을 자원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부유한 농민이 생기고 아울러 상업 또한 발달하면서 부유한 상인이 생기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몰락한 양반이 생계를 위해 일을 하거나 또 족보를 팔아야 하는 조선 후기 신분제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처하게 되었다.

-ebs

조선 시대의 신분 제도에 관한 내용은 무엇일까?

2. 조선 시대의 신분 제도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이루어졌으며, 양반과 중인이 지배층이었고, 상민과 천민이 피지배층이었다. 3. 양반 면세와 면역 특권을 누렸고, 생산 활동 종사하지 않았으며, 상민인 농민과 수공업자는 조세, 공납, 역 의무를 졌다.

조선시대 몇세기?

조선국 (1876년 이전) 대조선국 (1876년 이후)
상단: 왕실 국기 (1882년 ~ 1897년) 하단: 국기 (1893년 ~ 1897년) 왕실 문장 국장 (19세기 후반)
수도
한성부 북위 37° 35′ 동경 127° 0′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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