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고구려 차이) - golyeo(gogulyeo chai)

고려(고구려 차이) - golyeo(gogulyeo chai)

지금으로부터 1100여 년 전의 한반도에서는 새로운 패권을 놓고 고려918~1392와 후백제892~936의 격렬한 대결이 펼쳐졌고, 북방에서는 당나라 멸망 이후 중국 대륙의 혼란을 틈타 거란요,916~1125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발해698~926를 멸망시킨 거란의 세력 확장은 고려의 북방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또한 960년 중국의 통일왕조 송나라960~1279의 등장으로 ‘고려-송-거란’의 첨예한 갈등의 국제 환경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

통일신라의 분열 이후 견훤은 전라도 지역에서 백제의 복수를 기치로 후백제를 건국하였고, 궁예는 송악에서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에 대한 복수를 내세우면서 후고구려901~918를 건국하였다. 이후 궁예를 축출하고 등장한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계승 의식과 결부되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방 영역의 개척에 토대가 되었다. 태조 왕건의 고려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영역은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칠 것이라고 한 것은 왕 시중태조 왕건이 나라를 얻은 뒤에 먼저 계림신라을 얻고 뒤에 압록강고구려을 되찾는다는 뜻이다.”라는 ‘왕창근王昌瑾의 고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는 고려의 역사 계승 의식뿐만 아니라 그 영역을 통일신라와 구고구려까지를 포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북방 영역의 상징으로 압록강을 언급한 것은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과 북방 정책의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개경·서경의 ‘양경제兩京制’는 고려 건국과 고구려 계승 의식을 이어주는 상징성을 담고 있었다. 개경은 919년태조2 정월 철원에서 송악으로 천도하면서 고려의 중심이 되었다. 고구려의 국도였던 평양은 918년 9월 대도호부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서경’으로 삼았다. 개경으로의 천도가 태조 2년 정월이었고, 평양을 ‘경’이라는 명칭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태조 2년 3월의 ‘양경兩京’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서경은 개경으로의 천도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개경은 태조 왕건 가계의 세거지인 동시에 ‘한나라의 근본一國之本’으로, 서경은 ‘구도舊都’ 혹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我國地脈之根本’으로 각각 인식되었다. 이러한 개경과 서경의 관계를 국도國都와 배도陪都로 볼 수 있지만, 고려 초기에는 동일 선상에서 이해할 부분도 있었다. 태조 왕건과 3대 정종은 서경으로 천도 계획을 세웠고, 6대 성종 때 거란의 소손녕과 외교담판을 벌였던 서희는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여 평양을 고려의 도읍이라고 하였다. 이런 점은 고려 초기의 개경과 서경이 국도와 배도의 관계를 뛰어넘어 동등한 위상을 지녔음을 알 수 있게 하며, 일찍부터 서경에 ‘재성在城, 내성·나성羅城, 외성·왕성王城·황성皇城’ 등의 성곽 체제가 정비되어 개경에 버금갈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이러한 양경제의 한 축이었던 서경은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상징하는 동시에 북방 영토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또한 주변 국가와의 영토 갈등을 일으킨 배경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은 왕조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북방 영토의식을 반영하였다. 이런 점이 고려의 북방 정책과 그 실천적 형태로서 성곽 축조에 반영되었다. 성곽 축조의 주목적은 영토 수호를 위한 방어 전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북방민족과의 ‘경계境界’ 설정이 중요한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 제국 거란의 침략과 극복

고려(고구려 차이) - golyeo(gogulyeo chai)
고려 초기의 북방 영토의식은 ‘국경國境’이라는 확고한 구획선을 중심으로 한 관념에서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의 영토의식은 통일신라와 구고구려의 영역까지를 포괄하였다. 북쪽의 경계로는 압록강이 중요하였는데, 압록강은 고려의 고구려 역사 계승 의식과 북방 정책의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역사 계승 의식은 왕조의 정통성을 기반으로 하여 영토 계승 의식으로 이어진다.

고려 건국 이후 태조 왕건은 신라의 항복과 후백제를 무너트리며 국가의 영역적 기틀을 세웠지만, 북방 지역은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그것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강성과 여진족의 존재가 표면적인 이유였고, 후백제와의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북방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도 작용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도였던 평양에 서경을 설치한 것은 고려의 적극적인 북방 영토의식의 표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경의 중요성은 후대의 군왕에게 남긴 태조의 ‘훈요10조訓要十條’에도 반영되었다. 아울러 서경은 태조 이후 불안정한 왕권을 유지하려는 방편으로도 이용되었고, 왕권의 위협이 가해졌을 때 이를 수호할 수 있는 지지기반의 역할도 하였다. 하지만 서경은 북방 지역과 근접한 지역이었던 만큼 방어에 취약성을 안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청천강 넘어 좀 더 확고한 지역으로의 진출이 필요했고, 그것이 이후 북방 지역의 성곽 구축으로 나타났다.

평양에 서경을 설치한 것은 고구려 계승 의식이라는 왕조적 정체성뿐만 아니라 후백제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북방 지역의 안정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는 곧 북방 지역에서의 내적 결속을 다질 수 있는 기반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는데, 태조대의 잦은 북방 지역 순행巡幸 기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고려 초기에는 강성한 거란과 아직 세력은 미미했지만 여진족의 존재로 말미암아 북방 영토의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려의 북방 영토의식의 중심에는 항상 압록강이 있었고, 압록강 유역이 고려 영토로 획정된 것은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서였다.

993년성종12 거란의 제1차 고려 침략은 양국 간의 첨예한 외교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거란의 군대가 쳐들어 왔지만, 고려 내륙으로의 적극적인 침략을 감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다 할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 이는 고려의 적극적인 대응이 주효했다고도할 수 있었지만, 거란으로서도 전쟁의 명분과 실리가 적극적으로 개진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거란과의 1차 전쟁에서 고려가 획득한 가장 큰 성과는 성종 12년 윤 10월, 고려 사신 서희와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강화회담 결과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서북면 지역의 탈환이었다. 이는 북방 영토의식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였고, 대외적으로도 국경 구축의 지역적 기반을 확보한 셈이었다. 또한 압록강을 축으로 한 대내·외의 영역적 구분은 고려 천하관의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고려 초기에는 통일왕조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치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방민족의 동향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926년태조9 거란에 의한 발해의 멸망은 고려의 북방 정책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고, 거란과의 긴장 관계로 비화되었다. 고려는 중국의 5대 10국과 송나라에 대해서는 중원의 문화민족으로 인정하였던 반면, 거란과 여진 등 북방민족에 대한 인식은 고려의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과 비교되었다. 고려의 적극적인 북진정책은 여진족과의 갈등적인 관계를 유발하였다. 그리고 거란에 대해서도 여진과 마찬가지로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고려 초기의 북방민족에 대한 인식은 북방 정책과 맞물리면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많은 발해 유민과 여진족들의 고려 유입은 고려의 적극적인 북방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이후 거란과의 외교적 마찰이 빈번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거란은 1010년현종 원년 11월의 2차 침입과 1018년현종9 12월의 3차 침입을 각각 감행하였다.

이들 전쟁의 배경은 무엇보다도 1차 전쟁의 상징이었던 ‘강동 6주’ 반환 요구와 같은 영토 문제 및 고려·송과의 외교관계 등이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려의 영역적 천하관을 위축시키려는 의도와 여진족 등 북방 민족의 향방에도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가 있었다. 따라서 ‘강동 6주’ 반환을 거부하고 거란의 2·3차 침략을 극복했던 것은 오히려 고려의 천하관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고려 천하관의 상징, ‘고려장성高麗長城

고려 전기의 북방 영토의식은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서북면 지역에 초점이 모아졌다. 이러한 북방 영토의식에 전환점이 된 것이 1033년덕종2 ‘고려장성’의 구축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고려장성이 세워진 이후에도 서북면 지역에서의 고려와 거란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영토 공방을 벌였다는 점이다.

거란과의 갈등 속에서도 압록강이 고려의 북방 영토의식의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압록강 유역은 구고구려의 국도 국내성國內城이 인접한 곳이었다. 이는 고려의 왕조적 정체성과 그 일대를 아우를 수 있는 명분의 확보를 의미하였다. 거란 또한 고려와의 1차 전쟁 때 서희의 외교 담판에서도 확인되듯이, 고려의 북방 영토의식에 의구심을 품었을 능성이 있었다. 이런 점이 압록강 일대에 대한 고려의 독주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거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하지만 서북면 지역에서의 북방 영토의식은 여진족과 대치하던 동북면 지역에 대한 영토의식의 새로운 명분을 획득하는 셈이었다. 따라서 ‘고려장성’의 구축은 고려 전기 북방 영토의식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북방 정책의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고려 천하관의 확대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거란의 집요한 압록강 유역의 공략을 극복한 산물이었다. 고려는 거란과의 3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서북면 지역의 ‘대동강-청천강-압록강’으로 이어지는 성곽 체제를 체계적으로 구축하였다. 이에 비해 동북면 지역에서는 산맥 혹은 강을 입지로 한 확고한 방어 전선을 구축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고려장성’의 건설이 표면적으로는 ‘거란-여진’으로 이어지는 대외적인 구획선으로 작용한 듯하지만, 이는 곧 서북면 지역에서 ‘고려와 거란’, 동북면 지역에서 ‘고려와 여진’의 갈등을 불러일으킨 배경이 되었다.

거란이 압록강 이남으로 내려오려고 했던 이유는 고려 천하관의 축소 및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목적이었다. 고려로서는 서북면 지역의 안정이 곧 서경을 주축으로 하는 북방 정책의 중요한 토대였기 때문에 지리적인 거점을 고수해야 하는 당면 과제가 있었다. 압록강 유역이 고려로 완전히 귀속된 것은 1117년예종12에 이를 경계로 하여 관방關防을 설치한 때부터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려의 북방 영토의식을 가지기까지는 북방민족과의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이 수반되었다. 특히 여진 부족인 완안부完顔部의 군대가 동북면 지역의 기미주羈縻州를 석권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는 또한 ‘고려-송-거란-여진’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다원적 동아시아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여진의 성장으로 인한 고려와의 잦은 변경 충돌은 여진 정벌로 이어졌다. 숙종대로부터 예종대에 걸친 여진 정벌은 중원에서의 송나라가 거란의 압박으로 위축되었고, 거란과는 교류 혹은 ‘고려장성’을 통한 변경의 안정이 이루어진 시기에 단행되었다. 그 결과 정복 지역에 ‘9성’을 구축할 수 있었고, 공험진公嶮鎭의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한 동북면 지역의 영토의식을 확장할 수 있었다. 비록 ‘9성’ 지역을 여진족에게 반환하기는 했지만, 이후 예종 12년에 거란의 쇠퇴로 인한 압록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고려의 북방 영토의식을 보다 확고하게 강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장성’ 구축의 의의는 무엇보다 북방 영토의식에 새로운 분기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고려의 독자적 천하관, 화내化內와 화외化外

‘고려장성’이 관방으로서 본토를 보호하는 것이었다면, 그 너머 북방민족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고려장성’의 구축 이후 덕종·정종·문종·선종·숙종·예종대에 걸쳐 여진족·거란족 등 북방민족의 고려 유입이 꾸준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고려장성’ 밖의 여진족에 대한 정책은 그들의 투하를 허용하여 관작을 수여하거나, 또는 그들 지역에 ‘기미주’를 설치하여 간접 지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여진 지역의 고려 편입은 1073년문종27에 두드러졌다. 이때 동여진의 여러 부락이 고려의 영역이 되기를 요청하였고, 또한 서여진의 여러 부족이 고려의 영역에 편입되기를 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북방민족들의 유입 형태는 심지어 이들을 제한하기 위한 관방을 설치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북방민족들은 ‘고려-송-거란’의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하여 의탁하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종주국과 번인蕃人’ 체제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북방민족들은 다양한 형태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어느 질서에 편입되느냐에 따라 ‘화내化內’와 ‘화외化外’로 구분되었다. 이는 중국 중심의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구분과 비슷한 것이었다.

예컨대 ‘화외’는 고려 천하관에서 벗어나 거란에 귀속된 여진족들을 지칭했던 반면, ‘화내’는 고려 천하관 내에 귀속된 여진족을 지칭하였다. 화내 지역은 주현州縣 설치 여부에 따라 ‘영내와 영외’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여진족들도 스스로 ‘화내인’과 ‘화외인’으로 구분해서 인식하였고, ‘변경蕃境’이라는 영역적 관념을 수반했을 뿐만 아니라 ‘변민邊民’·‘향인鄕人’이라고 하여 종족적으로도 구별하였다. 이런 점에서 여진인은 비록 고려인이 될 수 없었지만, 고려 천하관 내에 귀속된 종족들은 통치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화내’와 ‘화외’의 경계가 되는 ‘고려장성’은 고려 천하관의 형성과 확장 과정을 통해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서 고려의 위상 변화와도 연결된 것이었다. 

고려 시대 몇년도?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왕씨(王氏)가 34대에 걸쳐 집권했던 왕조.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왕씨(王氏)가 34대에 걸쳐 집권했던 왕조.

고려는 어떤 나라?

고려(高麗) 918년 왕건이 즉위한 이후, 1392년 이성계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한반도에 존재하던 왕조국가이다. 통일신라 하대에 송악(현재의 개성특별시) 지방의 호족인 왕건이 918년에 건국하여, 919년에 송악을 개경이라 이름을 고치고 수도로 삼았다.

고려시대는 몇년전?

고려시대 (918 – 1392) 고려는 918년 태조 왕건이 궁예의 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한 이후 1392년 조선 왕조에게 멸망하기까지 약 470년간 한반도를 지배하였던 왕조임. 서양에서 불리워지는 코리아라는 이름은 바로 이 고려왕조에서 파생된 것임.

고구려역사몃년?

서기전 1세기에서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 서기전 1세기에서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