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해도 닦아낼 수 없는 우울 길을 잃으러 가고, 가고, 가는 길 자주 길을 잃었다.//자주 나는 울었던가.//다시 잃으러 간다.//가고 가고 가는 수밖에 내 슬픔과는 무관하게 밝기만 한 세상 어쩌자는 것이냐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짐승도 인간도 아닐 때 당신과 내가 서로 몸을 바꿔 입고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일 때 다시는 나는 내가 아니고 당신은 당신이 아닐 때 남자도 여자도 아예 버릴 때 우리의 발바닥이 우리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때 우리의 꼬리가 영영 우리의 머리를 만나지 못할 때 당신과 내가 그만 당신과 나를 넘어 범람할 때 떠내려갈 때 아예 사라질 때 그럴 때 봄은 당신과 내 것이 아닌 눈동자들로 분주하고 깨끗한 시체처럼 시의 첫 구절 “어쩌자는 것이냐”는 다양한 질문을 품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이 세계는 아직 어둠과 추위가 가득한데 기어코 “기어 기어 오는” 봄을 원망하는 듯하다가도 거꾸로 생각해보면 봄이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는 줄 알면서도 당신과 나는 왜 여전히 추위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하는 자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두 질문 사이의 틈, 그리고 질문이 겨누는 안과 밖의 괴리는 당연하게도 악몽의 재료가 된다. 김근은 지금 이렇게 빚어진 악몽을 꾸어내는 중이다. 텍스트에서 뛰쳐나와 팔을 뻗치는 마성의 악몽들 사내는 덩굴이 되었다 푸른 비늘 같은 이파리들이 사내의 몸을 덮었다 사내는 겨우 가는 가지 하나를 뻗어 길을 더듬었다 사내가 길 위로 다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따금 밤이면 으허허허 막다른 길 담장을 덮은 덩굴의 이파리들에서 웃음소리가 흔들리며 흔들리며 들리고 들리고 할 뿐이다 삶의 고통을 껴안는
능청스러움 기다린 것은 언제나 뒷모습이었으니 이 뒤 저 뒤 가릴 것 없이 한결같이 뒷모습에는 한 마리씩 귀신이 살아 머리 풀어 산발하고 왼몸에다가는 피칠을 하고 웃음이나 찌크려쌌기나 하곤 하였더랬는데 시방 뒤돌아 가는 저 사람 제 뒤에 귀신 한 마리 붙어 다니는 줄 아는지나 몰라 손짓에다 소리까지 보태어 불러를 보지만서도 목구멍에는 웬 흐엉흐엉 바람이나 불고 자빠나졌는지 허참 기이한 가면을 쓴 그럴듯한 표정들 김근의 시가 현실 세계의 난폭함과 불모성을 드러내는 데 꽤나 능숙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저 폭로만을 목표로 삼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 김근 시의 현란하고 특이한 이미지들은 그것을 산출한 세계를 탐색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경로인 셈이다. ■ 시인의 말 자주 길을 잃었다. 자주 나는 울었던가. 다시 잃으러 간다. 가고 가고 가는 수밖에. 2014년 여름 ■ 시인의 산문 불가능한 노래를, 극지 혹은 극피인, 부르튼 입술, 부르튼, 이름, 끝내 발음하지 못한, 불가능한 당신께, 간신히 사람의 소리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여태 사람 행세나 하면서, 시인의 말 길을길을 갔다 / 허허 / 소풍 / 밝은 / 새를 묻다 / 키스 / 대낮 / 나는 너를 낳은 적이 / 섬 / 언니들 / 앉은뱅이 왕 / 지극히 사소하고 텅 빈 / 휴일 / 뒷모습 / 까마귀 떼 / 밤에, 소년이 있었다 / 야음을 틈타 / 푸른사내덩굴 / 지워지는 / 젖은 팔 / 택시 / 너의 멸종 / 놀이터 / 그림자 / 여름의 전설 / 물고기를 사러 다녀요 / 떠도는 사원 / 병 속에 담긴 편지 / 웃는 남자 / 화부(火夫) / 이름을 먹는 여자 / 뼈만 남은 / 멈춘 사람 1 / 멈춘 사람 2 / 멈춘 사람 3 / 죽은, 시인 / 조카의 탄생—부 하고 모 하는 사이 / 조카의 탄생—이모의 말 / 조카의 탄생—삼촌의 말 / 조카의 탄생—아비의 말 / 조카의 탄생—조카의 말 / 조카의 탄생—어미의 말 / 형—숨바꼭질 / 형—필사 / 형—둔갑 / 형—동거 / 형—동생 / 형—낱말들 / 형—호칭들 / 변명, 우편배달부 / 변명, 코인로커 / 변명, 목소리 / 변명, 사다리 / 변명, 라디오 / 당신의 날씨 / 거대하고 시뻘건 노래가 해설 | 당신의 어둡고 환한 육체・송종원 김근 지음시인 김근은 1973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했고 시집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가 있다. 현재 ‘불편’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