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인혁당 사건 - 2cha inhyeogdang sageon

1. 1차 인혁당사건

1960년 4·19 이후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운동 단체인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등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쿠데타세력은 4·19 시기 조직되고 활동하던 민자통, 민민청, 통민청, 교원노조, 사회당 등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인물들을 예비검속하여 투옥하였다. 또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등을 제정하여 무려 3년 6개월을 소급, 적용하여 4·19 시기 분출하는 학생, 언론, 교사, 노동, 혁신정당, 통일운동 등 민주적 요구들을 억압하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 한일회담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 투쟁이 거세지며 군사정권에 대한 퇴진요구에 이르자 1964년 6월 3일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위기에 직면한 군사정권은 해결책으로 1964년 8월 ‘인혁당사건’을 발표하여 학생 시위의 배후에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하였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은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하여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이들을 검찰에 송치하였다. 그런데 당시 ‘인혁당사건’을 담당한 공안부 검사 3인(이용훈, 김병리, 장원찬)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기소할 수 없다고 서명 거부와 더불어 사표를 제출했으나 검사장은 정명래 검사로 하여금 기소케 하여 이 문제는 국회 본회의까지 논란이 되었다.

또한 1964년 9월 12일 한국인권옹호협회장 박한상 의원이 ‘인혁당사건’으로 구속기소된 도예종 등 26명의 피고인 대부분이 중앙정보부에서 “발가벗긴채 물과 전기로 참을 수 없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사회적 파문이 일어났다.

1964년 10월 검찰은 구속기소한 26명 중 14명에 대하여 공소를 취하하고 석방하였으며, 그 나머지 12명과 추가로 구속한 양춘우(楊春遇) 등 13명에 대해서만 공소장 죄목을 「국가보안법」위반에서 「반공법」위반으로 변경하여 재판을 계속하였다. 이로써 피고들은 ‘국가변란 기도 혐의’는 벗고 “북괴를 고무찬양하였다.”는 「반공법」혐의로 재판을 받아 1965년 1월 20일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도예종·양춘우 2명의 피고를 제외한 나머지 11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이들 11명에 대하여 “피고들이 서클을 구성하여 가입한 사실은 인정되나, 북한의 남북통일방안에 동조되는 인민혁명당 강령심의위원회에 참여한 사실이 없다.”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도예종·양춘우 두 피고에게는 「반공법」 4조 1항을 적용, 각각 3년과 2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는데, 이는 이들에게는 북한의 통일방안에 동조한 혐의가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판결에 대하여 검찰이 불복하여 항소심을 제기하였고, 1965년 5월 29일 2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 도예종에게 징역 3년, 양춘우 등 6명에게 징역 1년, 김금수(金錦守), 이재문, 임창순, 김병태, 김경희, 전무배 등 6명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박중기, 박현채, 정도영 등 3명에게 징역 1년을 각각 선고하였다. 1965년 9월 21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2. 2차 인혁당사건

이후 박정희 정권은 1969년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안인 ‘3선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1971년 세 번째 연임을 시작하였고, 1972년 영구 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였다. 재야세력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유신정권에 저항하였다. 마침내 유신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이 조치에 위반한 자들을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단하려 하였다.

1974년 4월 3일 선포된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으로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고 규정되었다. 이어 1974년 4월 25일 ‘1차 인혁당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신직수는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이른바 ‘민청학련’의 정부전복 및 국가변란기도사건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공산당원과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들은 정부 전복 후 공산계열의 노농정권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는 ‘인혁당재건위사건’을 발표하였다.

1974년 1월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8인에 대하여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들의 항소는 모두 기각되었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이 확정되고 다음 날 4월 9일 비상보통군법회의는 8인에 대한 형을 집행하였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는 등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의 대표적인 인권침해사건으로 기억되었다.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하였고,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도 2005년 12월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가혹행위와 ‘인민혁명당’ 구성 및 가입 등에 대한 조작 사실을 인정하였다. 마침내 2007년 1월 23일 서울 중앙지법은 도예종 등 ‘인혁당재건위사건’ 희생자 8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또한 2010년 3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차인혁당사건’ 당시 불법구금 등에 대해 규명한 바 있다.

유신 선포 이후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거세어지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에 이어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북한의 사주에 의하여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며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였다. 1974년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 사건의 수사 중간발표를 통해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 단체인 인혁당 재건위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성”되었다고 하여, 민청학련 배후에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하였다.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으로 인혁당 관계자들이 지목됨으로써 이른바 제2차 인혁당 사건(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내란 예비음모, 내란 선동 등의 혐의로 23명이 기소되었다. 재판은 민청학련 사건과 철저히 분리된 상태에서 6월 15일부터 시작되어 약 10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인혁당 관련자들에게는 가족면회도 금지되었고 사건조작을 위한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재판은 검사의 심문만 있을 뿐 진술기회도 없이 진행되었고 공판조서조차 날조되어 작성되었다. 비상보통군법회의를 거쳐 항소심인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이들이 받은 형량은 사형 8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4명, 징역 15년 4명 등이었다. 인혁당 사건이 발표된 이후 수개월 동안 인혁당에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긴급조치하의 살벌한 분위기와 극심한 반공이데올로기 속에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기피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남편들의 억울함과 무죄를 확신하고 이 사건이 박정권에 의한 조작극이라는 사실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애쓰던 부인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처음엔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 상세는 별항 ‘구속자가족협의회 결성’ 참고)에서 벌이던 기독교회관 농성조차 참여할 수가 없었다. 또한 부인들은 남편의 구명을 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로 강제 연행되어 육체적·정신적 폭행을 당해야 했다. 인혁당 가족들에 의해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계속되어오던 구명운동은 마침내 신·구교를 비롯한 종교계와 재야의 일각에서 약간의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의 문제를 처음으로 공식 발언했던 사람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1975년 2월 17일, 국내외의 압력에 견디다 못한 박정권은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전원을 석방했지만 인혁당 관련자는 제외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군법회의에서 내려진 중형을 원심 그대로 확정 판결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1975년 4월 9일, 사형선고를 받은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이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당했다. 시신들은 각각 시차를 두고 한 구씩 인도되었고, 경찰은 8구의 시신을 완력으로 탈취하였다. 그때까지도 고문의 흔적이 역력한 시신은 가족들의 확인도 없이 화장되었다. 사형집행 소식은 이틀이 지난 후 언론에 보도되었다.

1964년에 있었던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이 수사를 맡았던 담당 검사가 도저히 기소할 가치가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세 명의 검사가 사표를 제출하기까지 했던 근원적으로 조작의 성격을 띤 사건이었다. 박정권은 10년이 지난 후 이 사건 관련자들을 다시 희생제물로 선택한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민민청, 통민청 등의 활동을 했던 혁신세력이었지만 이후 중요한 사회적 지위나 활동 없이 평범한 사회생활을 했고,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1974년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던 신직수 중정부장은 1차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으며, 수사를 총지휘한 이용택 중정6국장은 당시 5국의 대공과장으로 수사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제2차 인혁당 사건을 중앙정보부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했고,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역시 2005년 12월 7일 인혁당 및 민청학련 두 사건 모두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대형 공안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2007년 1월 23일 서울 중앙지방법원은 제2차 인혁당 사건 관련 8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2007년 8월 21일, 인혁당사건 희생자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서울지방법원은 국가가 총 637억여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2심에서도 “자료 234억여 원과 사건발생 시부터 이자 400억여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2011년 1월 27일 대법원이 이자 발생시점을 “사건 발생 시가 아닌 손배소송 2심 변론 직후”로 바꿔야 한다고 하여 전체 배상액 300억여 원이 감소하게 되었으며, 이 판결에 불복한 재심을 청구중이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 『1970년대 민주화운동』 전병용,「인혁당 사형수 8인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