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로봇애니 - 2010nyeondae lobos-aeni

제 또래 분들이라면 80년대 로봇 만화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계실 겁니다.

이번 포스트는 어릴 적, 미니백과를 통해 로봇 만화를 보고자란 저와 비슷한 세대 분들에게 드리는 자그마한 선물입니다.

글을 읽으시는 동안, "그래 이런 만화가 있었지..." 하시는 분들도 계실테고

<슈퍼로봇대전>에 익숙한 요즘 세대 분들에게는,

"이런 만화도 있었네..." 혹은, "게임에 나오던 그 캐릭터가 이거였네~" 하는 잔재미를 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글을 적어나가겠습니다.

80년대의 모든 로봇을 다 다루어보고픈 욕심이 있지만 포스트가 지나치게 길어질 위험이 있으므로 개인적으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 위주로 글을 써내려가는 점 양해바라며, 설명은 모든 분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가능한 간략하고 쉽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수퍼로봇' 보다는 '리얼로봇'을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이 적잖이 반영되었음을 숨기진 않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담>은 본 포스트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건담>에 관해서는 따로 다룬 포스트가 여럿 있으므로 하단에 링크시켜 놓도록 하겠습니다.)

 1. 전설거신 이데온 : 1980년  

<기동전사 건담>의 <토미노 요시유키>감독이 만든 또 하나의 '문제작'... <전설거신 이데온>입니다.

굳이 문제작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인즉,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감독의 작품답게 암울하고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존재의 이유와 가치, 생명의 순환에 대한 물음을 제시한, 극히 철학적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TV 방영 당시 시청률이 상당히 저조하여 결말도 짓지 못한 채 조기종영되었으나 건담과 마찬가지로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극장판 2부작으로 내용을 완결지을 수 있었는데, 이런 저조한 시청률의 주요인이 바로 어린이들이 감당하기 힘든 진지한 내용때문이라고 볼 수 있죠.

<건담>과 <짐>을 섞은듯 독특한 <이데온>의 외모는 상당히 매력적이며 여기에 더해, 거대한 로봇의 크기나 엄청난 화력 등등.. 진정 '수퍼로봇'에 가까운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이들이 로봇만화에서 기대했던 정의의 편이 이기는 화려한 액션 따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 역시 인내심을 가지고 본작을 모두 감상한 후에 놀랐던 점은, 감히 이런 작품을 아이들이 시청하는 시간대에 방영할 수 있었구나 하는 점과 의외로 어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재밌는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봇 애니메이션' 답지 않게 심오한 주제를 극적으로 잘 풀어나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전설거신 이데온>은 상당히 독특한 작품이고 어떻게 보면 감독의 의도가 성공적이었던 작품인 동시에 '리얼로봇'의 효시가 된 작품이기도 하죠.

문제는... 아이들이 보기엔 지나치게 버거웠다는 거...^^;; (<토미노> 감독은 이와 비슷한 범죄(?)를 한번 더 저지르게 되는데... 바로 1993년에 만든 <기동전사 V건담>에서 였습니다... 저연령층을 위한 작품을 표방하면서 정작 내용은 성인층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시리어스함이었다는...)

여담으로... <토미노 요시유키>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딱 두 작품을 통해 '교주' 비슷한 위치에 서 본적이 있었다고 고백했었는데, 그 두작품이 바로 <기동전사 건담>과 <전설거신 이데온>입니다.

 2. 우주전사 발디오스 : 1980년  

<발디오스>를 한 마디로 정의내린다면 '수퍼로봇의 탈을 쓴 휴먼 드라마' 라고 말 하겠습니다.

좋게 말하면 그만큼 이야기의 밀도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저연령 시청자층으로 하여금 '속았다'는 느낌을 가지기 딱 좋은 작품이라는 이야기이죠.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로봇물이 50화 전후로 종영될만큼 로봇 애니메이션의 전성기였던 80년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31화로 '단명'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많이 본 듯한 얼굴 디자인으로 인하여 '건담의 수퍼로봇 버전'이라는 불명예까지 안고 있으니 이래저래 속 상할 일이 많았던 작품입니다만 독특한 로봇의 변형 패턴이나 농도 깊은 스토리로 보자면 본작은 사실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작품입니다.

비록 캐릭터의 디자인이나 배경 설정 등에서 아직은 '수퍼로봇'에서 '리얼로봇'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80년대 로봇이란 무엇인가'를 단박에 아시고 싶으신 분이라면 주저 않고 추천하는 바입니다.

 3. 최강로보 다이오쟈 : 1981년  

<다이오쟈>를 기억하시는 분은 극히 드물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이 로봇을 <다이오쟈>라는 이름으로 기억하시는 분이 드물 겁니다.

예전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판매하던 프라모델 중에 세 대의 로봇이 분할, 합체하여 거대 로봇이 되는 제품이 있었는데 이 로봇이 바로 <다이오쟈>입니다. 당시 판매되던 로봇의 이름이 <썬더버드 3총사>였으니, 만약 이 글을 보시면서 "어... 이거...!!" 하시는 분들... 예... 맞습니다. 바로 그 로봇입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가장 큰 이유인즉, 주인공 <미코토> 왕자가 신분을 숨긴 채 여러 식민 행성을 여행하고 각 행성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한 성단의 '군주'로 성장해 나간다는 <다이오쟈>의 내용 자체가 한국에서는 비디오로도 발매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일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사실 <다이오쟈>는 일본의 전통 시대극 <미코토몽>의 패러디입니다. 주인공의 이름부터 대사 하나 하나까지 일본 전통극의 로봇 버전으로 기획된 작품이기에 일본풍이 강할 수밖에 없죠.

혹자는 <다이오쟈>의 디자인이 <다이탄3>와 너무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만... 후에 다시 언급하게 될 <오오가와라 쿠니오>라는 같은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해주시길 바랍니다.

어쨌거나 프라모델의 영향때문인지, 독특한 합체 패턴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개인적으로는 무척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모두 극히 매니악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4. 태양의 엄니 다그람 : 1981년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태양의 어금니>로 흔히 알려진 <다그람>입니다.

('엄니' 라고 해야 정확하긴 한데, 이게 어금니는 아니고 일종의 길게 자란 송곳니입니다. <세이버 투스> 라는 동물의 '긴 송곳니' 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듯... 일본어로 하자면 '키바'이고 영어로는 'fang' 정도가 적당할텐데.. 이걸 '엄니'라는 한국어로 번역하니 얼추 어머니처럼 들리기도 하고... 굳이 적절한 표기를 찾자면 <태양의 송곳니 다그람> 정도면 될런지...^^)

아마 오늘날 누가 이런 작품을 만든다고 하면 분명 '미친놈' 소리를 들을 게 틀림없습니다.

리얼 로봇이 한창 인기를 끌던 80년대여서 가능했던 장편의 대서사극이죠.

로봇물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해 정치극에 가까운 내용이며, 75화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답게 끊임없이 배신이 이어지고 각 인물들마다 음모를 꾸미며 조직간의 암투가 벌어집니다.

게다가, 배경이라도 좀 산뜻하면 그나마 덜 괴로울터인데 이건 뭐...^^

결론적으로 이야기의 밀도와 무게감은 상당한 수준이며 나름대로 재미도 있지만 일단,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 엔딩까지 모두 감상하기가 버겁고 전체적인 분위기 마저 대체로 무겁고 답답합니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메카닉의 디자인은 상당한 걸작이죠. 뭐랄까... 메카닉이 로봇스럽지 않고 고철스러운 느낌이 좋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위의 일러스트를 가장 좋아합니다. 녹슬어버린 고철같은 느낌이 서글프게 보이는 건 비단 저뿐인지..^^;;

박력있는 요즘 로봇물에 익숙한 분이라면 길고 지루한 이야기에 진저리 치시겠지만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즐기시는 분이나 '80년대 리얼로봇'의 정수를 만끽하시고픈 분이라면 <보톰즈>와 더불어 강추하는 바입니다.


 5. 전투메카 자붕글 : 1982년  

<전투메카 자붕글>은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 요시유키>가 만든 작품으로, 왠지 진지할 것만 같은 분위기와는 달리 발랄하고 신나는 유쾌한 모험활극입니다.

메카닉들을 모두 공사판 트럭처럼 묘사하는 부분도 흥미롭거니와 개솔린을 동력원으로 움직인다거나 핸들로 로봇을 조종하는 등의 극히 현실스러운(?) 부분도 잔재미죠.

무엇보다 <자붕글>을 유명하게 만든 건, 극 중반 즈음에 주인공의 메카닉이 바뀌는 '주역 로봇 교체' 때문일 겁니다.

<기동전사 제타건담>, <성전사 단바인> 등을 비롯해, 이후 제작된 많은 로봇 만화에서 주인공은 극 중반쯤에 다른 메카닉으로 레벨 업을 해야 한다는 불문율 아닌 불문율을 만들어냈죠. 이른바, '두 대의 주역 로봇 등장' 이랄까요... (이걸 한없이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하나라도 더 많은 프라모델을 팔아치우기 위한 '스폰서의 음모' 이기도 합니다만...^^)

특히 교체된 후반부의 주역 로봇인 <워커 개리어>가 이전 주역 로봇인 <자붕글>보다 더 멋있는 것만도 아니어서 적잖은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극히 전형적인 '주인공 로봇'같은 생김새로 인하여 다른 메카닉과는 심하게 이질적인 <자붕글>보다는 비록 투박한 외양이지만 극의 분위기와 더 조화를 이루는 <워커 개리어>의 매력적인 디자인에 더 큰 점수를 주는 바입니다.

게다가 주인공의 얼굴을 한번 보신다면 확실히 <워커 개리어>가 진정한 주역으로 적격이라는 생각이 드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붕글>의 주인공 <지론>은 둥글 둥글한 얼굴에 땅딸막한 키까지... 다른 작품이었다면 개그용 조연에 그칠 외모를 지니고 있죠.^^

그 밖에 또 다른 특징이라면, <마크로스>보다 약 1년 먼저 <아이언 기어>라는 이름의 '로봇으로 변신하는 전함'을 작품에 반영하였다는 점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주인공들이 공사 차량같은 메카닉을 몰면서 이리저리 좌충우돌 전장을 헤쳐나가는 흐뭇한 모습을 보노라면 80년대 리얼로봇이 무조건 심각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6.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 1982년

저는 <마크로스>를 '메카닉 전쟁물'이 아닌 '애잔하고 은은한 러브스토리'라고 정의합니다.  80년대 대부분의 로봇 애니메이션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리얼함을 추구했던 반면, <마크로스>는 '사랑'을 주제로, 또 다른 의미의 리얼함을 추구한 아름다운 한 편의 '순정만화'라고나 할까요...

<미키모토 하루히코> 특유의 따뜻한 느낌의 캐릭터 디자인과 <카와모리 쇼지> 디자인의 현존하는 전투기로 변신하는 주역 로봇 <발키리> 및, 밀리터리물에나 등장할 법한 서브 메카닉들, 그리고 여기에 메인 컨셉인 '음악'이 더해지면서 로봇 애니메이션史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흔히 <건담>과 더불어 리얼 로봇계의 양대 산맥이라고까지 불리우며, 이후로도 <마크로스 II>, <마크로스 플러스>, <마크로스 7>, <마크로스 제로>, <마크로스 F>가 만들어졌고 최근에는 <마크로스 F>의 극장판 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건담>이 마크로스와 같은 전철을 밟아줬다면 참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크로스>는 <카와모리 쇼지>가 계속 총감독을 맡아왔기에 (<마크로스 II>는 예외입니다만...) 매 시리즈가 다른 스토리로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건담>의 경우는 90년대 중반부터 원작자 <토미노 요시유키>의 손을 떠나면서부터 시리즈의 통일성을 잃은 것만 같아 아쉬울 따름입니다.

어쨌거나... <건담>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 답게 무수히 많은 시리즈가 있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꼭 한 작품만을 보신다면 전 <마크로스 극장판 사랑, 기억하나요...?>를 추천합니다.

여담이지만... 전장을 배회하며 전사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북유럽 신화의 '발키리'를 로봇의 이름으로 정한 작명 센스는 그저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7. 성전사 단바인 : 1983년  

흔히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 요시유키>가 일생을 <건담>에 바쳤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토미노> 감독이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은 최초의 판타지 로봇물인 <단바인> 시리즈입니다. (문제는 건담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는 거지만...)

<단바인>을 유명하게 만든 건 곤충을 닮은 메카닉들의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디자인이죠.

다만 당시 스폰서들은 곤충 외양의 <단바인>이 소위 '팔리지 않는' 디자인이라 고민이 많았던지, 후반부에 등장하는 새로운 주역 로봇 <빌바인>에는 변형 메카니즘을 추가하고 좀 더 대중적인 디자인으로 제작하라는 압박을 가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이 압박 덕분에 <빌바인>은 작품 내에서 가장 이질적인 메카닉이 되어버렸습니다...

<자붕글>의 경우, 후반부에 등장한 <워커 개리어>가 <자붕글>보다 더 뛰어난 디자인을 자랑하는 반면 <단바인>은 후반부 주역인 <빌바인>보다 오히려 <단바인>이 더 아름다운 실루엣을 자랑합니다.

<단바인>은 TV 애니메이션과 OVA, 소설, 코믹스 등등으로 나름 꾸준히 시리즈가 이어져왔으며 비교적 최근, 시리즈의 최신작인 <린의 날개>가 공개되었으나... 뭐랄까... 전체적인 내용 면에서 유기성은 좀 부족한 편입니다.^^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단바인>의 시대를 앞선 디자인은 지금 보아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습니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판타지 로봇물을 표방한 최초의 작품답게 시청률에 연연하지 말고 더 극한까지 판타지물다운 내용으로 진행되었어야 했다는 점입니다.

저조한 시청률을 만회하고자 제작진이 꺼내든 카드는 판타지 월드의 인물들이 현실 세계를 드나들면서 전쟁을 치르는 스토리 진행이었는데, 결국 이와 같은 선택이 오히려 작품 전반의 색채를 반감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새로운 장르여서 시청자들이 낯설어 했다고 해야할지, 감독의 역량이 부족했다고 해야할지... 것도 아니면 대단원에 이르러 '폭주'하게 되는 <토미노> 감독 특유의 성격때문인건지...

 8. 장갑기병 보톰즈 : 1983년  

리얼 로봇의 정점이자 로봇에 의한 사실적인 전쟁은 바로 이런 것이다를 극명히 제시한 작품. 다른 로봇물과는 달리 철저하게 병기로만 묘사된 메카닉들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가령, 주인공 <키리코>는 자기 메카닉이 부서지면 그냥 길에 버려진 거 아무거나 타고 싸웁니다.^^ 뭐... 주인공 전용 기체, 3배 빠른 누구누구 커스텀... 붉은 혜성 뭐시기... 이런거... 여기엔 없는 거죠.^^)

또한 장갑차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디자인은 지금까지도 많은 팬을 거느리는 주 요인이죠.

<보톰즈>의 디자인을 얘기함에 있어 반드시 언급해야만 하는 인물이 바로 <건담>의 디자이너로 유명한 <오오가와라 쿠니오>입니다. <다이오쟈>, <다그람>, <바이팜>, <레이즈나>, <드라고나> 등, 80년대 로봇들은 거의 대부분 그의 작품이며 다른 디자이너들 역시 크건 작건, 그의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일본에서 '메카닉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처음으로 대중화한 장본인이기도 하죠.

하지만 아쉽게도 90년대 초반 이후로는 독창적인 디자인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어 아쉽기만 합니다. 일종의 매너리즘이랄까... 예전 자신의 작품들을 계속 무한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요.

어쨌거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보톰즈>는 <건담>처럼 매 해마다 신작이 나오는 작품은 아닙니다만 TV 애니메이션이나 OVA, 소설 등을 통해 지금까지도 꾸준히 시리즈를 이어오고 있으며, 이야기의 밀도 역시 상당한 작품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크로스>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죠.

시니컬하면서 고독한 인물들, 방대하면서도 시리어스한 스토리, 화려한 필살기를 선보이진 않지만 육중한 박력이 있는 전투, 암울하디 암울한 배경... 등등,

무거운 분위기로만 치자면 <다그람>이나 <이데온>은 저리 가라 할 수준으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만, 더욱 큰 문제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다는 겁니다.^^

뭐랄까... 중독성 강한 작품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거랄까요...


 9. 초시공세기 오가스 : 1983년

<오가스>는 이른바, <초시공 3부작>의 두번째 작품입니다.

변형 패턴은 <마크로스>의 <발키리>와 비슷하지만 <오가스>는 두리뭉실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선의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작품 자체의 인기보다는 <오가스>의 디자인 덕분에 아직까지 나름의 매니아층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면에서는 <오가스>의 디자인이 너무 부각되다보니 작품의 상당한 퀄리티나 재미가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습니다.

요즘이야 대부분의 로봇 애니메이션이 20부작 안팎으로 제작되니 35부작으로 구성된 <오가스>의 분량이 너무 버겁다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80년대의 다른 로봇물들에 비해선 비교적 짧은(?) 편이고 35부작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을만큼의 재미와 감동이 있으니 한번쯤 도전해보시길 권하는 바입니다. 무엇보다도... <미키모토 하루히코>의 캐릭터는 여전히 너무나도 매력적이라서...^^

<오가스02>라는 후속편도 제작되었습니다만 전작과 연결되는 스토리는 아니며 또한 <오거스> 특유의 둥그스름한 디자인 대신 샤프한 <오거스>가 등장하는 바람에 저는 많이 실망스러웠습니다만 작화 수준은 전작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여담이지만... 최근 박스오피스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영화, <아바타>에서 선보였던 신체에 달린 촉수를 통한 서로간의 교감이라는 설정의 원조가 바로 <오가스> 아닐런지...^^;;

 10. 싸이코아머 고바리안 : 1983년

저와 비슷한 세대라면 <고바리안>을 모르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바리안>은 본국인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으로 정작 본편보다 중독성 강한 주제가가 더 유명세를 치렀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포스트에서 꼭 다루어야만 했던 것은, 역시 80년대 로봇 애니메이션 중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기 때문이랄까요...

<마징가>를 유난히 닮은 외양 때문에 저 역시 한 때는 "이건 마징가의 표절이야!!"를 외쳤었습니다만... 같은 원작자인 <나가이 고>의 작품입니다.^^

 11. 기갑창세기 모스피다 : 1983년

<모스피다>를 <초시공 3부작> 중 하나로 알고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정확히 말씀드려서 <모스피다>는 <초시공 3부작>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작품입니다. 아마 메카닉의 변형패턴이 비슷해서 생긴 오해인듯 하네요.

또한 <모스피다>를 주역 로봇의 이름으로 아시는 분들도 많은데... 로봇의 이름은 <레기오스>입니다. <모스피다>는 바이크로 변신하는 주인공들의 '슈트' 이름이죠.

총 25화이므로 감상하기에 부담이 적은 작품이며 매력적인 캐릭터와 속도감있는 액션, 박진감 넘치는 메카닉의 전투 등이 어우러져 상당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게다가 <레기오스>의 디자인은 <발키리>나 <오가스>와는 또 다르게 매력적입니다.

<발키리>가 현존하는 전투기의 이미지를 차용하였고 <오가스>가 외계의 비행체와 비슷한 형태를 지녔다면 <레기오스>는 미래에 있을 법한 전투기의 모습을 그려냈다고나 할까요.

<발키리>와 <레기오스>, 그리고 <오가스>는 같은 뿌리에서 시작하여 각자 고유의 독창적인 영역으로 진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투복처럼 몸에 '입는' 바이크인 <모스피다>의 등장은 단순히 <마크로스>의 아류로 그칠 수도 있었던 본작을 나름 독창적인 작품으로 승화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모스피다>의 설정은 리얼하면서도 SF적인 디자인을 추구했던 <아트믹>이라는 팀의 작품인데 <모스피다> 이외에도 <버블검 크라이시스>나 <메가존 23> 등을 통해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여담으로 미국에서는 <마크로스>와 <모스피다> 그리고 곧 소개하게 될 <서던크로스>를 수입한 후, 세 작품을 섞어 <로보텍>이란 이름의 작품으로 방영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최근 뉴스를 보니 <마크로스>도 <트랜스포머>처럼 실사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라는데 분명히 말해서 <마크로스>의 실사판이 아니라 <로보텍>의 실사영화가 될 가능성이 크겠죠...

 12. 특장기병 돌박 : 1983년

<특장기병 돌박>은 지극히 '매니악'한 작품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다음 세가지 부류 중 하나일 겁니다.

어린 시절 동네 비디오 가게의 모든 만화영화를 섭렵했거나, 동네 문방구에서 매니악한 프라모델까지 모두 접수했거나 혹은 미니백과의 마지막 '정가 1000원'까지 꼼꼼히 정독했거나...^^

개인적으로는 무척, 정말, 엄청 재밌게 감상했던 작품으로 국내에는 오래전에 <돌북특공대>라는 제목의 비디오로 소개됐었죠.

'헬리콥터'나 '지프', '장갑차' 등, 현존할 것만 같은 전쟁 병기로 변신하는 주역 메카닉들이나 전장에 나설 때 갑옷처럼 입는 <파워드 슈트>까지... 극히 '밀리터리'스러운 설정 때문에 대부분 "이거 엄청 지루한거 아냐...?" 하는 의심을 가지시기 딱 좋습니다만, 결론적으로 내용은 정~말 재밌습니다.

메카닉들의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스피디한 연출, 매력적인 캐릭터에 뛰어난 작화까지 더해져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죠.

여담을 하나 하자면... <돌박>의 주역 기체인 <무겐 캐리버>와 <가제트>는 한 때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포함되어 토이로 발매되기도 했습니다.

음... 가만 생각해보니 <마크로스>의 <발키리>도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포함되어 발매된 적이 있네요.^^ <발키리>가 <트랜스포머> 시리즈로 포함되었을 때 이름이 바로... 그 유명한 <젯트 파이어>랍니다.^^

(여러분이 극장에서 보신 <블랙버드>로 변신하는 <젯트 파이어>의 오리지널은 사실 <발키리>라는 뭔가 아이러니함...^^)

여튼 <특장기병 돌박>은 꽤 진지한 스토리와 드라마를 재미있게 풀어낸 작품으로 감상해볼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여전히 못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한번 더 강조하고 싶네요. 상당히 재밌습니다. ^^

 13. 은하표류 바이팜 : 1983년

<기동전사 건담>의 모티브는 유명한 고전 명작 <15소년 표류기>입니다. 이 작품이 기획단계를 거치면서 여러모로 바뀌어 지금의 <건담>이 된 것이죠.

<은하표류 바이팜>은 <건담>이 초기 기획의도와는 달리 전쟁 서사물로 변모한 것에 대해, <15소년 표류기>를 다시 한번 원래 취지대로 재해석해보자는 시도였습니다.

때문에 <건담>의 경우, 소년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말리게 된 가혹한 '전쟁'을 통한 '성장'을 그리고 있는 반면, <바이팜>은 우주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아이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가는 '일상'을 아기자기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13명이라는 적지 않는 수의 주인공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캐릭터 하나 묻히질 않고 각각의 개성이 잘 살아있다는 점이 바이팜의 큰 미덕입니다.

내용 및 구성과 연출도 훌륭하거니와 메카닉들의 귀여우면서도 정감가는 디자인이 무척 매력적인데, 주렁주렁 장식을 많이 달고 있는 것만이 멋진 게 아니라 'simple is the best'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요. (요즘 로봇 디자인을 보노라면, 디자이너들이 <바이팜>을 보면서 '뭔가'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당한 인기와 팬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OVA를 제외하면 이상하리만치 후속편이 적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14. 중전기 엘가임 : 1984년

이제는 거물이 되어버린 <FSS -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의 작가 <마모루 나가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출세작으로 감독은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 요시유키>였지만 정작 대부분의 설정과 스토리를 담당했던 건 <마모루 나가노>였습니다.

메카닉의 설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스토리의 경우, <토미노>감독이 생각해둔 컨셉이 있었음에도, <마모루 나가노>는 <엘가임>을 자신의 작품이라 굳게 믿고 다방면으로 적극적인 개입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지금의 <엘가임>이 되었다는군요.

일례로, <토미노>감독은 <엘가임>을 <자붕글>과 같은 유쾌한 모험극으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마모루 나가노>는 광대한 대우주서사극을 만들고 싶어해서 마찰이 있었다거나, <토미노>감독이 캔슬한 <파티마>와 같은 설정을 <마모루 나가노>가 작화에 몰래 끼워 넣는 등의 크고 작은 사건이 적잖았습니다.

<마모루 나가노>의 폭주(?)를 <토미노>감독도 알고 있었지만 <엘가임>의 중반부를 즈음하여 <토미노>감독도 다음해에 방영될 <기동전사 제타건담> 제작에 올인하느라 <엘가임>에는 관심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극의 초반과 후반의 분위기가 상당히 이질적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토미노>의 지휘 아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내공은 그냥 쌓이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토미노> 감독이 <마모루 나가노>의 결혼식에 주례를 봐줄 정도로 두 사람은 무척 각별한 사이였지만 <엘가임> 종영 후, 한 석상에서 <토미노>감독은 "이제와 생각하니 그 친구는 좀 다루기 힘들었다."는 말로 당시의 갈등을 간접적으로 언급했습니다. 결국 "엘가임의 세계는 <마모루>에게 주었다"는 인터뷰까지 했었죠.)

<마모루 나가노>의 고집에 화가 났던 <토미노>감독은 <엘가임>을 다시 한번 리메이크하거나 속편을 만들어서 <FSS>를 막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가능성 많은 후배와 그런 싸움을 벌이는 게 옹졸해 보여서 관뒀다는 뒷얘기도 있었습니다.

<엘가임> 제작 당시의 갈등 때문이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에 한계를 느껴서인지 이후 <마모루 나가노>는 <엘가임>을 바탕으로 그 세계관을 더욱 확장한 <FSS-파이브 스타 스토리즈>를 만화로 그리게 되었고 그 결과는 엄청나게 성공적이어서 아직까지 20여년 넘게 연재중입니다. 본인 말로는 '라이프 워크'라고 하니 아마 죽을 때까지 그리다 못해 대를 이어 그리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마모루 나가노>의 공은, 이듬해에 공개된 <기동전사 제타건담>에서 빛을 발합니다. 메카닉의 뼈대를 구상한 <무버블 프레임>이나 <360도 스크린>, <메가 런쳐>같은 설정들은 엘가임의 것을 그대로 차용하거나 좀 더 발전시킨 것들이며 이후 제작된 많은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마모루 나가노>의 치밀한 설정들은 계속 응용됩니다.

어쨌거나 <엘가임>은 <FSS>의 서곡, 내지는 다이제스트 정도로 보시는 게 좋겠군요. 만약 <FSS>의 미치도록 느린 연재 속도가 지겹거나 결말이 궁금하다 하시는 분들이라면 <엘가임>을 꼭 보셔야 할테구요.

 15. 거신 고그 : 1984년

<건담>의 캐릭터 디자이너이자 <건담 디 오리진>의 작가로 유명한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야심차게 만든 작품으로 그가 작화감독, 캐릭터 디자인, 총감독 등을 맡아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만 인기가 없었습니다.^^

방영 전 사전 제작된 작품답게 작화 수준은 지금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나며 26화에 달하는 스토리도 구성이 탄탄합니다만 뭐랄까.. 좀 지루합니다.

이야기의 리듬 조절이 좀 부족하다고나 할까... 완급 조절이 어설프다고나 할까... 역시 도둑질도 해 본 놈이 한다고... ^^

뭐 이런 저런 이유를 다 떠나서 <고그>의 디자인은 참 신선합니다. 거신의 웅장함과 메카닉의 섬세함이 잘 조율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 컨셉에 잘 어울리게 주먹으로만 주구장창 싸우는 모습은 은근히 감동적입니다.

(프라모델을 만들어보면 대포가 하나 들어있기 때문에 그게 <고그>의 주요 무기가 아니냐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실제 애니메이션을 보면 그거 쏴가면서 싸우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탄약이 떨어지자 그걸 해머처럼 들고 탱크를 때려부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오히려 더 <고그>스럽죠.)

고대 유적에서 외계인의 유물인 <고그>를 만나 지구를 지켜낸다는 스토리가 상당히 유치할 수도 있지만 <고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말 그래도 될 것만 같은 포용력이 생깁니다.^^

이게 디자인의 힘이랄까요...

 16. 초시공기단 서던크로스 : 1984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와 <초시공세기 오가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하는 <초시공기단 서던크로스>가 바로 <초시공 3부작>입니다. 물론 초시공 시리즈가 3부작으로 끝난 이유는 <서던 크로스>가 큰 인기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서던 크로스>는 메카닉이 주역으로 등장했던 다른 초시공 시리즈와는 달리 갑옷을 입고 싸우는 주인공들을 위주로 스토리가 진행됩니다.

다양한 캐릭터들도 매력적이었고 내용도 나름 재미있었으며 다른 메카닉들의 디자인도 독창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상하리만치 인기가 없었습니다.

'<초시공 3부작>을 모두 보고야 말겠다' 혹은, '갑옷을 입고 싸우는 미소녀들을 보고싶다' 하시는 분들에게 권하는 작품입니다.^^ 

 17. 기갑계 가리안 : 1984년

작품의 배경과 메카닉의 디자인이 얼만큼 잘 어울릴 수 있는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기갑계 가리안>일 겁니다.

마치 <반지의 제왕>과도 비슷한 중세 판타지 물의 분위기에 <가리안>의 메카닉들은 현명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인마병 <프로마키스>의 디자인은 가히 압권입니다.

물론 프라모델 판매를 위한 스폰서의 압박으로 부득이하게 <가리안>이 비행모드로 변신한다거나 극의 후반부에 분리, 합체가 가능한 <어설트 가리안>이 등장한다거나 하는 오점도 존재합니다만 이후 제작된 OVA에서는 이런 요소들을 모두 걷어내고 중세 판타지물의 성격을 더욱 강화한 디자인의 메카닉이 등장하여 팬들을 열광케 했습니다. OVA <가리안>의 메카닉들은 로봇 디자인의 결정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죠.

어쨌거나 로봇 디자인만큼 작품 자체도 큰 인기를 끌었더라면 좋았으련만... 판타지물의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하지 못한채, 결국 <단바인>처럼 이도저도 아닌 리얼로봇물로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어찌보면 개성 넘치는 매력적인 캐릭터들 사이에서 정작 주인공인 <죠죠>가 너무 무미건조했던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군요...

뭐... 아무리 봐도 메카닉들의 디자인은 감탄스럽기 그지 없습니다만...

 18. 초력로보 가라트 : 1984년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으로 접어들면 어둡고 우울한 리얼로봇물 대신 밝고 유쾌한 2등신 SD로봇물이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마신영웅전 와타루>나 <마동왕 그랑조드>, <NG기사 라무네 & 40> 등이 있죠. 헌데 이 작품들의 기원에는 바로 <초력로보 가라트>가 있습니다.

SD 사이즈인 주인공들의 통학 로봇이 적과 싸울 땐 리얼 사이즈로 거대화된다는 설정은 아직 리얼로봇과 SD로봇 사이의 과도기적인 설정이지만 근엄한 이데올로기의 전쟁 대신, 시종일관 밝고 경쾌한 적들과의 코믹스러운 싸움은 철학적 주제의식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스스로 허덕이며 지쳐가던 80년대 중, 후반 로봇 애니메이션 업계 숨통과도 같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릴적 만들었던 프라모델의 추억때문에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이며 비록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으나 사라져가는 리얼로봇붐을 대신할 로봇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큰 점수를 주는 바입니다.

물론 제가 보기엔... 시대적 의의를 논하기에 앞서 작품 자체가 미치도록 재미있었습니다만...^^

 19. 초수기신 단쿠가 : 1985년

한국에서는 <단쿠가>라는 이름보다 <카루타>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작품입니다.

네 대의 메카닉이 각각 비히클, 동물형, 인간형으로 3단 변신하며 모두 합체하면 거대 로봇이 된다는 변신, 합체 시스템은 당시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변신, 합체 로봇의 결정판이었습니다.

물론 정작 작품의 내용은 아이들의 로망과는 달리 극히 시리어스한 내용으로 전개되어 갔었습니다만 매력적인 캐릭터와 박력있는 전투장면, 그리고 엄청난 퀄리티의 작화 수준까지... 남녀노소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단쿠가>의 무식하리만치 육중한 디자인이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만 대부분의 팬들은 TV판 <단쿠가>보다는 좀 더 세련되게 어레인지된 OVA판 <단쿠가>의 디자인을 선호하는 추세입니다.^^

비교적 최근, 후속작인 <단쿠가 노바>가 공개되어 나름 인기를 끌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디자인에 크게 실망했던 기억밖에 없네요...

 20. 머신로보 - 크로노스의 대역습 : 1985년

인간이란 어쩌고 삶이란 저쩌고... 등등 거창한 주제에 관한 논쟁을 벗어던지고 로봇 애니메이션 본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80년대 로봇만화 중 가장 재밌었는 작품이 뭐냐고 누가 제게 묻는다면 저는 주저없이 <머신로보>를 추천할 겁니다.

<머신로보>는 사실 상당히 독특한 위치에 자리하는 작품입니다. 

생명을 가진 다양한 변신로봇들이 등장한다는 설정은 <트랜스포머>의 연장선이고 주인공 로봇인 <롬스톨>이 <켄류>의 몸 속으로, <켄류>가 다시 <바이칸푸>의 몸 속으로 수납되어 점점 더 큰 로봇으로 변신한다는 설정은 <투사 고디안>의 변주입니다.

이쯤되면 단순한 아류작으로 그칠 법도 한데, <머신로보>에는 이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로 '재미'이죠.

우선, 연출 자체가 엄청난 박력을 자랑하며 작화 수준이 상당히 멋집니다. 매회마다 <롬스톨>이 읊어대는 유치한 대사 마저도 중독적이죠. 때문에 단순하고 뻔한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진지하고 암울한 로봇 애니메이션이 득세하던 80년대인지라 오히려 전 이렇게 호쾌하면서도 속 시원한 로봇물에 갈증이 나더군요.

하지만 <트랜스포머> 따라잡기로 시작된 스폰서의 프라모델 판매가 기대만큼의 큰 호조를 보이지 못하고 애니메이션 자체도 센세이션에 가까운 인기를 얻지 못하자 제작진에게는 뜻밖의 명령이 하달됩니다.

니네 만들고 싶은대로 만들어...

이 한마디에 탄력을 받은 제작진은 정말 만들고 싶은대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로봇으로 설정된 <롬스톨>에게 머리카락을 그려넣어 꽃미남 캐릭터로 둔갑시키는가 하면, 히로인이자 주인공의 여동생인 <레이나>의 미소녀 이미지를 강화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기동전사 제타건담>을 까메오 출연시키는 등, 말 그대로 '폭주'하기 시작하죠.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설정 파괴와 매니아층을 고려한 연출이 오히려 더 큰 인기를 불러모으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어, 결국 <레이나>를 여고생으로 둔갑시킨 OVA가 제작되고 전혀 다른 설정의 후속작 <머신로보 레스큐>로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지금까지도 꾸준한 팬층을 보유한 작품으로 남게 되었으니, 이걸 제작진의 용기있는 결단이라 해야할지, 소 뒷걸음에 쥐 잡은 격이라 해야할지...^^

어쨌거나 속 시원한 재미를 선사하는 본편도 훌륭하지만 <레이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OVA 작품도 꼭 한번 보시길 권하는 바입니다. '매니아적 상상력' 이란 게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거든요.^^

 21. 푸른유성 S.P.T 레이즈나 : 1985년

<건담>의 아성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많은 로봇 애니메이션들의 목표는 <건담>을 뛰어넘거나 혹은 그 만큼만의 성공이라도 이루어보는 것이었으니... <레이즈나> 역시 그런 취지 아래 야심차게 기획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몇 화 동안은 그런 기획이 정말 성공하는 듯 했습니다.

지구가 침공 당할 위기의 위급한 상황에서 주인공 일행이 서둘러 지구로 가, 이 위험을 알려야만 한다는 그 긴박감과 1화 마지막 장면에서야 등장하는 주인공 <에이지>의 한 마디.

"내 이름은 <에이지>, 지구는 침공당한다!"

이 한 마디는 당시 그 어떤 애니메이션의 그 어떤 대사보다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정작 1화 이후의 스토리 전개가 너무 지지부진해서 초반의 긴장감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서둘러 지구로 돌아가야하는 주인공 일행이 몇 회째 우주에서 떠돌질 않나, 겨우 귀환한 지구는 금세 정복당하질 않나... 1화의 박진감 넘치는 연출은 그저 우연이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헌데... 더 큰 문제는... 제작진이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고자, 후반부에 내세운 특단의 조치가 바로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북두의권> 따라하기였다는 겁니다... 정복당한지 몇 년이 흐른 황량한 지구, 무법 천지의 시대, 근육질의 주인공들... 이대로 <북두의권>의 <켄시로>가 등장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가 않더군요...

제작진의 안일한 발상을 비난하고 싶지만, 초반에 엄청난 주목을 받으며 '제2의 <건담>'이라는 타이틀까지도 노려볼만 하다던 작품이 끝도 없이 추락하는 걸 보면서 어떻게든 시청률을 올리고 싶어했던 그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뭐 결론적으로... 초반의 긴장감과 신선함을 잃어버린 채, 내용은 흐지부지 끝나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수확이라면, 혹자는 <도라에몽 건담>이라며 혹평을 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80년대를 대표하는 로봇으로 손꼽는 <레이즈나>를 비롯한 메카닉들의 매력적인 디자인입니다.

비행기의 콕핏을 머리에 얹어놓은 것만 같은 참신한 로봇들의 외양과 백팩 및 무기를 바꿔달면서 전장의 성격에 따라 로봇의 기능을 달리하는 설정 등은 당시로선 상당히 혁신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모델 판매가 지나치게 저조했다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지만 뭐... 이건 비단 <레이즈나>의 탓만은 아닙니다. 어릴적 문방구에서 팔던 500원짜리 <레이즈나> 시리즈를 모아보셨던 분이라면 이해하시겠지만... 모형의 퀄리티 자체가 지나치게 저급했던 겁니다...

어쨌거나 <레이즈나>는 뛰어난 작화 수준에 비해 상당한 아쉬움을 남기는 작품이 되었으며 이후 뒷이야기를 다룬 외전이 공개되기도 했지만 특별한 후속 시리즈가 제작되지는 못했습니다.

 22. 기갑전기 드라고나 : 1987년

일본어 표기대로 하자면 '용기병'을 뜻하는 <도라구나>라고 읽는 게 정확하겠지만 한국 팬들에게는 워낙 <드라고나>라는 이름이 친숙하며 영문 표기도 일단은 <DRAGONAR>로 되어 있으니.. 일단 <드라고나>로 적도록 하겠습니다.

<드라고나>는 직접적으로 당당하게 "건담의 영광이여 다시 한번!!"을 외치는 작품입니다.

1- 주인공은 우연히 드라고나에 탑승하게되고

2- 주역 기체는 세 대, 

3- 적군의 에이스는 '기가노스의 푸른매'라 불리우며

4- 그의 여동생은 우리편의 히로인...

이쯤되면 이건 아예 <건담>의 리메이크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다시 말해 <드라고나>는 10여년 전의 <건담>을 80년대 후반의 기술력으로 리메이크하려 노력한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물론 그 이면에는 어떤 시도를 해봐도 <건담>의 아성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니 아예 <건담>을 그대로 다시 한번 만들어보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담겨있는 것이기도 하죠.

때는 80년대 후반, <건담>의 정식 후속작인 <기동전사 건담 더블제타> 마저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꺼져가던 리얼 로봇의 인기도 한 몫 했습니다만 어쨌거나 <드라고나>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물론 나름의 매니아층은 지금도 엄연히 존재합니다만 사실 그 매니아층이라는 게 대부분은 본편의 내용보다는 화려한 오프닝에 등장한 <드라고나> 디자인의 팬들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여담이지만 <드라고나>의 오프닝만큼 박진감 넘치는 오프닝도 드물 것이며 또한 <드라고나>만큼 오프닝과 본편 메카닉의 이질감이 극한 작품도 드물 겁니다.

이는 본편의 메카닉 디자인은 <건담>의 디자이너로 유명한 <오오가와라 쿠니오>가 맡고 오프닝 메카닉의 디자인은 팔, 다리를 길게 늘리고 얼굴을 조그마하게 만들어서 박력 넘치는 외양으로 어레인지 하기로 유명한 <오바리 마사미>가 맡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종류의 디자인을 모두 좋아합니다만 대부분 <드라고나>의 팬들은 <오바리 마사미버전 드라고나>를 더 좋아하며 아예 <드라고나 오프닝버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일 정도이죠.

여담이지만 원 디자이너인 <오오가와라 쿠니오>는 <오바리 마사미>의 어레인지 버전을 상당히 싫어했다더군요.

후반부에 등장하는 <드라고나 커스텀>을 디자인할 때는 제작사로부터 노골적으로 <오바리 마사미버전>과 비슷하게 해달라는 말까지 들어야했을 정도였으니... 그 심정도 이해는 갑니다.

어쨌거나 <드라고나>는 나름 독특한 디자인으로 큰 주목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저를 비롯한 매니아층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백병전용 1호기, 장거리 포격 지원용 2호기, 전자전용 3호기 라는 컨셉이 정확한 메카닉들의 성격과 디자인이 마음에 들더이다.

게다가... 다른 여러가지 이유를 떠나 일단 각 인물들이 '쾌활'한 게 무척 좋았습니다.

80년대 로봇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어찌나 그리 우울하고 고독하고 시니컬하며 어두운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였는데 일단 <드라고나>의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별다른 '고민'과 '생각'이 없습니다.^^

뭐... 쾌활한 주인공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다들 짐작은 하시겠지만 사실상 리얼로봇의 전성기였던 80년대는 그렇게 막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23.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 1988년

80년대 후반, 리얼로봇의 인기는 점점 사라져가고 SD로봇물이 큰 인기를 끌며 소위 말하는 '용자물'의 시대가 서서히 도래하고 있을 그 시기에 '진정한 로봇의 리얼함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작품이 하나 등장하게 되니... 바로 <패트레이버>입니다. 

경찰 로봇이라는 실현 가능할 법한 설정과 적당한 크기의 메카닉 사이즈, 황당하게 '레이저'나 '빔'을 쏘는 게 아니라 총알을 장전하고 '리볼버'를 쏘는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까지... 로봇의 진정한 리얼함이란 바로 이거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특히 허무맹랑한 로봇들의 우주전쟁이 아닌 다양한 인간군상이나 기업 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 군사무기, 테러리즘, 사회문제, 환경오염 등등을 주제로 삼아 심도있게 묘사한 점은 왜 <패트레이버>가 리얼로봇의 새로운 대안으로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자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작인 코믹스는 읽기 쉽게 구성되어져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TV애니메이션과 OVA는 전체적으로 유쾌한 느낌이 강한 반면 극장판은 지극히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개인적으로는 극장판을 적극 추천하는 바입니다만 원작의 팬들은 극장판 보다는 OVA를 추천하는 추세입니다.^^

무엇보다 <패트레이버>를 가장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는 주역 로봇인 <잉그램>이 외에 다양한 <레이버>들의 디자인을 하나 하나 체크해보는 재미랄까요...

 24. 마동왕 그랑조드 : 1989년  

90년대 초반... 비디오 가게를 점령하다시피 했던 로봇 애니메이션의 절대 지존 <그랑조드>입니다.

(많은 분들께 <그랑죠>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겠지만 사실 이 타이틀은 한국에서 붙인 것이며 원제목은 <마동왕 그랑조드>입니다.)

사실 이 작품을 80년대 애니메이션으로 분류해야하는가에 있어선 고민을 조금 했었습니다. 작품이 처음 방영된 것은 89년이지만 실질적으로 90년까지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시기는 90년대 초반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80년대와 90년대의 가교 역할을 훌륭히 해낸 작품이며 국내에 특히 많은 팬들이 있는 관계로 이번 포스트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애니메이션으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80년대 후반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SD로봇물의 붐을 타고 제작된 <그랑조드>는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초력로보 가라트>와 전작인 <마신영웅전 와타루>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는 <와타루>보다 <그랑조드>가 더 유명하지만 실제 일본에선 <그랑조드>보다 <와타루>가 더 큰 팬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그랑죠>, <슈퍼 그랑죠>, <하이퍼 그랑죠>의 세 시리즈로 알려져있지만 원작은 <마동왕 그랑조드 TV판>, <마동왕 그랑조드 OVA판 - 최후의 매지컬 대전> 두 시리즈 뿐입니다. TV판이었던 <그랑조드>의 전반부를 <그랑죠>로, 후반부를 <슈퍼 그랑죠>로 공개한 뒤, OVA판을 <하이퍼 그랑죠>로 공개한 것이죠.

뛰어난 작화와 재밌는 스토리, 그리고 '얼굴' 모양으로 변신하는 로봇들에 귀여운 캐릭터까지... 지금 봐도 <그랑조드>는 무척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이버 메인에 소개된 관계로 예전에 썼던 포스트를 좀 더 다듬게 되면서 글이 부득이하게 길어진 점 양해바랍니다.

가능한 많은 정보를 전달하려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오니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네요.

같은 추억을 공유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을 문득 해보네요..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건담> 관련 포스트와 <파워레인저>를 비롯한 전대물 관련 포스트를 아래에 링크해 놓겠습니다.

건담 30주년 기념 <역대 건담 대백과>

파워레인저 시리즈를 파헤쳐본다 - 전대물의 30여년 역사

다시 한번 거듭 감사드리며...

남기신 글에는 하나하나 모두 리플을 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음 포스트에는 정말... 간략하게 글을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