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4:1-26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신 것처럼 본문에서 다시 한번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런데 그 대화상대가 니모데모와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남성이며 바리새인이자 산헤드린 의회의 일원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새로운 대화상대는 사마리아인이며 여성이었고, 율법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사람의 배경에 연연하지 않으셨으며 주님의 구주 되심을 나타내셨고,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어 주셨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15절) 예수님께서 유대에서의 사역을 중단하시고 갈릴리로 가신 이유를 증거합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사역과 요한의 사역을 비교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사역을 존중하셨으며, 요한이 사역하고 있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어떤 주석학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단히 혐오해서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회해서 돌아가는 좀 더 긴 노선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갈릴리로 가실 때 먼 길로 우회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인을 향한 어떤 혐오나 편견이 없으셨을뿐더러, 사마리아를 통과하면서 꼭 만나셔야 할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섯 시쯤, 오늘날 시간으로는 정오 쯤, 야곱의 우물이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도착하셨습니다. 한낮의 열기와 긴 여정으로 예수님께서 얼마나 목마르셨으며 피곤하셨을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한낮인 정오에 홀로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7-9)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께서 홀로 우물에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셨을 때, 여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여자에게 어떤
인사라도 하는 것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를 문자적으로 표현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같은 그릇을 사용하지 않았다"입니다. 만약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요청에 응한다면 예수님은 그녀가 가진 물그릇으로 물을 마시게 되며, 이러한 일은 유대인에게는 자신의 정결함이 훼손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불경한 사마리아인들과 그릇조차 함께 사용하지 않음으로 철저히 자신들의 정결함을 지키려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심각한 교만이 있었는데 그것은 ‘영적인 교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는 예수님께서 영적 교만에 빠진 유대인들, 특히 그것을 조장하고 앞장서는 율법교사에게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영적인 교만함을 폭로하시는 내용입니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 요청하셨지만, 예수님의 요청은 여인에게 생수를 주시기 위한 은총의 초청이었습니다. '생수'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생수'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신선한 물입니다. 한 해의 대부분이 지독하게 메말라 있는 지역에서 사람들은 이 신선한 물을 아주 귀하게 여겼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생수'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 은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영생, 성령의 능력에 대한 비유로 등장합니다(렘 2:13, 슥 14:8).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주시겠다는 '생수'는 오직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영생'을 가리킵니다.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마름'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여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이곳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우물은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올 수밖에 없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오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홀로 와야만 하는 비참한 자신의 인생을 마주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반복되는 목마름과 반복해서 우물에 와야 하는 여인의 인생 속에 영생을 베푸시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것도 바로 그 우물에서 말입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16-18)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현재 그녀를 메마른 인생으로 이끈 세상적인 갈망을 들춰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여인의 남편이 모두 죽은 것인지, 다섯 남편에게 차례대로 버림받은 것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녀는 변화무쌍했던 결혼생활을 하였고, 현재 정상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한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라고 왜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행복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여인이 가진 아픈 과거와 수치스러운 현실을 굳이 왜 들춰내셨습니까?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행복을 움켜쥐려 그토록 몸부림을 쳤던 대가가 과연 무엇이었으며, 메마른 인생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이 땅에 결코 없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땅에 속한 인생으로 이 땅의 것을 바라보던 여인에게,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인으로 하여금 하늘이 것,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네가 말하는 내가 그라(19-26)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 주제가 생수에서 남편, 그리고 예배로 옮기는 것은 결코 어색한 전개가 아닙니다. 예배는 세속적인 것과 이 땅의 것을 갈망하던 사람이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을 갈망하는 영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21-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인이 예수님께 들은 대답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심 산이냐, 시온 산이냐를 가지고 따시는 시대는 이제 끝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새로운 질서, 새로운 시대가 막 당도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디서' 예배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 즉,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영적인 예배, 순전한 예배는 어떤 장소나 어떤 시기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25-26)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새번역)“라고 말씀하심으로 여인은 드디어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낮 홀로 찾아온 우물가에서 만난 그분, 자신과 같이 뜨거운 햇살을 피해 피곤에 지쳐계신 그분, 유대인이면서 사마리아인 자신에게 물을 달라 요청하신 그분, 자신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겠다며 자신이 야곱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그분, 자신에게 남편을 데려오라며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다 알고 계신 선지자이신 그분, 그리고 우물가에 함께 앉아 참된 예배에 대해 친절하게 말씀하시는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여인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 묵상을 돕는 질문 (작성: 최형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