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호스 피탈 더러운 환경 - peulojegteu hoseu pital deoleoun hwang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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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란 궤도에 오르는 것 세계적인 순례길 카미노데산티아고의 스페인 구간을 한 여행자가 걷고 있다. 필자 김남희씨는 현재 스페인에서 순례자들이 묵는 전용 숙소 ‘알베르게 비에이라’에서 자원봉사자 ‘호스피탈레라’로 일하고 있다. 김씨는 산티아고 순례자들을 구조를 기다리는 <마션>의 우주비행사에 비교했다. 알베르게에서 하는 일이란 밥하고, 청소하고, 구급약을 나눠주고, 정보를 알려주는 것뿐이지만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을 기뻐하는 자원봉사자가 많단다. 김남희 제공

우주여행자가 되는 날이 내 생애에 찾아올까. 행성 사이를 떠도는 유목민이라니 이 이상 ‘간지 나는’ 여행자는 없을 것이다. 행성 간 여행이 가능해지는 날이 온다 해도 내가 비용이라는 장벽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전셋집을 빼고 한도까지 모든 대출을 다 받는다 해도 불가능할 테니. 우주정거장에서 엄지손가락을 들고 서서, 가는 김에 태워다 줄 우주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라도 되지 않는 한. 아득히 멀어 비현실적인 우주를 굳이 그리워하지 않아도 내게는 지구의 신비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나고 자란 이 행성의 아름다움을 좇는 데도 일생으론 부족할 터이니. 달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어떤 기분일까 정도가 내가 우주에 관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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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위어의 소설 <마션>의 표지.

SF 소설은 취향이 아니라고 믿었던 내가 우주여행자의 이야기에 빨려들 줄이야. 소설 <마션>은 화성을 여행하다 미아가 되고만 남자의 처절한 생존투쟁기다(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스포일러 주의). 터무니없는 환경에서 온갖 기지와 상상력과 과학기술, 엄청난 낙관을 발휘해 지구로 생환할 때까지 버텨야 하는 이야기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의지해 어디까지 나아가고,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지구에서 8000만㎞ 떨어진 화성에 혼자 남았고, 사방은 암석으로 가득한 황무지다. 바깥 기온은 영하 150도에서 0도. 우주복을 입지 않고는 산책도 할 수 없다. 다음 탐사대는 4년 후에 오는데 남은 식량은 400일치. 지구에서는 이미 그의 장례식까지 치른 후다.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다. 덕분에 소설사에 길이 남을 인상적인 문장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주인공의 직업은 식물학자이자 기계공학자. 살아남기 위해서는 화성 대기에서 산소를 분리해야 하고, 물 환원기를 돌려 식수를 만들어야 하고, 열량을 얻기 위해 작물을 재배해야 하니 최고의 직업이다.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수학, 화학, 천체물리학, 궤도역학을 넘나들며 설명하는 온갖 우주과학기술을 단 한 줄도 이해하지 못했다. 좌뇌가 아예 없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평생 달고 살았을 정도로 과학이나 논리적 사고에 젬병인 나로서는 당연할 수밖에. 어디까지가 소설의 상상력에 불과하고, 어디까지가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책은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화성에서든 어디에서든 생존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은 똑같다. 먹고, 자고, 쉬기. 게다가 만사는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끝없이 산적한 문제를 뚫고 나가야만 한다. 자신이 지닌 모든 지식과 노력을 쏟아부으며 온 힘을 다해 살아남으려 애쓰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낙관적이다. 인류가 축적해온 과학기술을 응용할 능력이 있으니 낙관적일 수 있으리라. 결국 그를 살게 하는 것은 과학적 지식과 식물학자로서의 재능에 더불어 낙관적 사고에 기반을 둔 유머가 아니었을까.

만약 나였다면 어땠을까. 인류 최후의 생존자라도 되지 않는 한 화성탐사대에 뽑힐 일은 없겠지만, 그런 불상사를 가정하고 내가 화성에 혼자 남겨졌다면? 고독사 내지는 아사가 내 운명의 길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화학은 내 편이다’라며 산소나 물을 만들어내지만, 나는 주기율표를 외우는 것조차 실패했다. 일생에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기에 화학은 내 단골 땡땡이 과목이었다. 쇼프로그램 <영11>(영일레븐) 녹화에 온 ‘이치현과 벗님들’을 보겠다고 교실을 탈출하고, 학교 앞 개미만화에 <올훼스의 창> 신간이 들어왔다고 담장을 넘던 과거를 후회하며 화성에서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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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비친 산티아고 순례자의 그림자. 왠지 지쳐 보인다.

스스로를 구하겠다는 의지를 잃지 않는 한 외부로부터의 구원 또한 반드시 찾아온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저 먼 우주 공간에 혼자 머물고 있는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한 지구 전체의 연대가 시작되니까. 이토록 엉망진창인 지구의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소설의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란 알 수 없는 존재여서 구체적인 얼굴과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놀랄 만큼의 깊은 인류애를 발휘하기도 한다. 2011년 이후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가 10만명을 넘어서도 무덤덤하던 국제사회가 2015년 터키의 바닷가에 떠밀려온 세 살 소년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을 접한 후 도움의 손길을 본격적으로 내밀었듯이. 그러니 마크 와트니라는 이름과 얼굴을 지닌 그를 구하려 인류가 지금껏 쌓아온 모든 지식을 기꺼이 나누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추상적인 인류보다는 구체적인 한 인간이 사람의 마음에 더 가까이 가닿는 법이니.

부엌에서 그릇을 정리하다 말고 나는 ‘마션’을 떠올렸다. 나는 지금 스페인에 머물고 있다. 카페 두 개와 구멍가게 하나가 전부인 작은 마을이다. 스페인의 가톨릭 성지순례길인 카미노데산티아고의 순례자 전용 숙소에서 자원봉사 중이다. 순례자들을 돕는 사람 ‘호스피탈레라’의 일과는 간단하다. 매일 밥을 차리고, 청소하고, 다시 밥을 차리고, 치우는 노동이 반복될 뿐이다. 침대에 누우면 책 한 줄 읽을 틈조차 없이 잠에 빠져든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보내는 이곳이 지금 나에게는 우주정거장 같다. 오가는 순례자들은 행성을 여행하는 고독한 우주비행사들. 이 길을 걷는 순례자였을 때의 나는 구조를 기다리는 마크 와트니였지만 지금은 반대의 처지다. 내가 머무는 ‘알베르게 비에이라’는 우주정거장을 지나는 순례자들을 살피며 그들이 보내는 구조 신호를 해석한다. 물집으로 고생하는 이에게 구급약을 건네고, 다음날 걸어갈 길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 그들이 맡기고 간 배낭을 배달하는 이에게 전한다. 그들이 머물고 간 자리를 정리하고, 다음에 올 이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을 움직이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내게 화성탐사대의 우주비행사들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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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이 지나는 도시 레온의 가게 셔터에 그려진 우주비행사.

알베르게의 주인 아멜리아와 그 아들 에스키엘, 페루에서 온 마를레니, 아르헨티나에서 온 자매 마리아와 디아나. 아무리 일이 많아도 나는 이들이 짜증을 내거나 한숨을 내쉬거나 일을 미루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같은 일을 쉼 없이 반복하면서도 그들은 늘 웃는다. 청소가 즐겁다고 말하는 마를레니.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음식을 만들면서도 순례자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마리아. 자신이 순례자들로부터 받는 게 훨씬 많아 복받은 인생이라는 아멜리아.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기 때문인 걸까. 이곳에서는 키스와 웃음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생존과 생환을 위해 마크 와트니가 해온 일들이 결국에는 저 먼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까지 아득하게 이어질 모든 인간의 경험과 다르지 않다. 매일 해야만 하는 지루한 일들, 우리가 족쇄라고 여기는 것들이 우리를 밀고 나가는 것일까. 현실의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그런 자신을 스스로 위무하거나 타인에게 위로받으며 견디어낸다. 살아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없을 때조차도 살기 위해 매달린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에,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에 기대기도 한다. 결국 우리 모두는 마크 와트니인 동시에 NASA(미 항공우주국)의 직원이기도 하고, 그를 도우려하는 동료들이자, 마크 와트니의 생환을 기원하는 세계인이다. 누군가 그랬다. 나처럼 인간에 얽매이지 않고 다니면서 사람에 매이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고. 나라는 사람은 가까이 머무는 질긴 인연보다 멀리 있는 약한 인연에 기대어 살아간다고. 인간은 희미한 타인의 마음으로도 꽤 멀리 나아가고, 놀랄 만큼 오래 꿈꿀 수 있는 존재라는 그의 말을 나는 믿는다. 내가 지치지도 않고 여행을 떠나는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세상 어딘가에서 내 손을 잡아줄 낯선 얼굴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온기를 믿기에 늘 떠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애타게 구조 신호를 보내는 존재인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구조 신호를 받는 사람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저마다의 인생을 배낭에 담은 순례자들이 오늘도 알베르게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1200㎞를 걸어왔다는 프랑스 할아버지가 카페콘레체를 주문한다. 오늘따라 배낭의 무게가 견디기 힘든지 지친 표정이다.

나는 그가 보내는 미약한 구조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 통신 주파수를 그에게 맞춘다. 오래전, 내가 희미한 주파수에 실어 보낸 구조 신호에 기꺼이 응답해주었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자, 나는 여기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어요. 그러니 나를 믿고 손을 내미세요. 내가 던지는 이 밧줄에 당신 몸을 실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