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거리 잔혹사 실화 - maljuggeoli janhogsa silhwa

말죽거리 잔혹사 실화 - maljuggeoli janhogsa silhwa

 

 

  말죽거리 잔혹사 (2004/한국)

  장르 드라마, 로맨스, 액션

  감독 유하

  출연 권상우, 이정진, 한가인 

줄거리

1978년 봄, 강남 시대의 서막을 미리 예견한 어머니에 의해 말죽거리 근방의 악명 높은 정문고로 전학 온 학생 김현수. 소문대로 정문고는 거칠고 드센 학교였고 앞으로 현수의 학교생활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사실을 예고하는 듯했지만 그런 분위기에도 현수는 옆자리 짝꿍 햄버거와 농구시합을 계기로 부쩍 가까워진 우식을 친구들로 맞이하면서 나름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버스에서 현수는 올리비아 허시를 닮은 은주라는 이름의 어여쁜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현수의 친구라는 이유로 우식도 은주를 알게 되고 이때부터 이들의 관계는 엇갈린다. 현수의 절절한 가슴앓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모범생과인 은주는 터프가이 우식에게 마음을 뺏기고.. 결국 사랑과 우정 그리고 성적까지 모두 잃은 현수의 학교생활은 엉망이 되어간다. 거기에 더하여 학교의 엄혹한 폭력과 부조리는 현수로 하여금 그동안 마음에 쌓여왔던 울분과 분노를 터뜨리게 만드는데...

감상평

나의 평가 ★★★★☆

이소룡으로 시작해 성룡으로 끝나는 영화. 대체 이소룡과 이 영화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정확히 말하면 '정무문'으로 시작해 '취권'으로 끝난다. 영화의 열고 닫음이 그렇단 얘기다. 오프닝은 극장 안이고 엔딩은 극장 밖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극장과 함께하는 것이다. 여기서 감독의 의중을 대략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철저하게 영화입니다.. 픽션입니다.."라는 일종의 선언 같아서 말이다. 물론 이것은 관객에게 그렇게 봐주십사하는 호소(?)이기도 할 테지. 소격효과라는 거창한 표현은 굳이 사용할 필요 없겠지? 이쯤에서 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이른바 강남 3부작(언론에서 표현하기를)의 서막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유하 감독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담이 분명 녹아든 작품이라고 알고 있다. 물론 그것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할 수 없으나 말죽거리라는 극중의 공간적 배경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영화에서 그토록 리얼하게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시대와 공간을 몸소 관통한 감독 자신의 체험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곧 개봉하는 강남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할 '강남 1970'의 이민호가 드라마 '상속者들'에서 자주 쓰던 표현)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감독의 설명이 아닌가 싶은데.. 그러나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허구라고 마냥 치부할 수 없는 영화가 바로 이 작품 <말죽거리 잔혹사>이다. 픽션이긴 하지만 엄연히 당시 학교 내부의 부패한 현실을 고발하는 측면이 강한데다 뭣보다 그것이 지금 현재에도 고스란히 대물림되어 반복돼 나타나는 한국 사회의 병폐이자 고질병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이 이미 말해준다. 잔혹사라는 말이 특히나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잔혹사에서 '사'는 역사를 의미하고 역사는 팩트를 기본 전제로 한다. 물론 완전한 팩트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만약 이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니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할리우드라면 영화 오프닝에 based on a true story 라고 자막으로 짤막하게 소개되어졌을 테니까. 그러나 충무로에는 그러한 관례가 없다. 예를 들어, (공교롭게도) '친구'는 곽경택 감독 자신의 실제 개인적 경험담이 녹아 있는 엄연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할리우드처럼 실화 바탕이라는 자막 소개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전 정보가 없다하더라도 영화만 보고도 직감적으로(?) 영화 '친구'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말죽거리 잔혹사>도 그러한 자막 소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감독 개인의 직간접적인 체험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느 부분까지가 팩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말죽거리 잔혹사>는 방금 언급했던 '친구'와 맥을 같이한다. 서로 많이 닮아있다. 마치 배다른 형제(?)라고나 할까? 다행히(?) <말죽거리 잔혹사>는 '친구'보다는 아이러니(?)하게도 덜 *잔혹*하다. 최소한 주인공이 처참하게 죽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거든. 그러니까 '친구'의 말랑말랑한 감성적 하이틴 로맨스 버전? 물론 이 영화에서도 액션과 폭력이(그것도 꽤 드센) 등장하고 나름의 비장미(특히 화려한 대미를 장식하는 주인공 현수와 야생마 패거리의 일대 다수의 막장 싸움) 역시 품고 있지만 끝으로 갈수록 범죄 느와르 장르로 완연히 포섭되는 '친구'와 달리 <말죽거리 잔혹사>는 아련한 노스탤지어 돋는 해피 발랄 엔딩으로 청춘물의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자 애쓴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학원물 라인과 로맨스 라인이라는 투 트랙으로 운용된다. 전자는 학교를 배경으로 주인공 현수가 친구들과 나누는 우정, 시기, 배신, 험담, 다툼, 고난, 무용담 등이 주를 이루고 후자에는 현수와 우식, 은주의 삼각관계가 빚어내는 사랑, 낭만, 이별, 아픔이 담겨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리된 별개의 것이라기 보단 서로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엔 이 투 트랙을 합치면 성장 영화라는 열매가 열린다. 굳이 모든 영화는 궁극적으로 성장 영화라는 내가 내린 명제가 아니더라도 그런 일반화의 법칙에서 벗어나 이 영화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 자체로 <말죽거리 잔혹사>는 주인공 현수의 성장 영화이자 극중 모든 인물의 성장 영화이다. 그러니까 영화가 끝이 나도 그 이후에도 그의 성장은 그들의 성장은 계속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난 개인적으로 로맨스 트랙이 좋았다.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감미로운 선율의 향긋하고 감상적인 발라드 같은.. 의외다. 스스로 로맨스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현수에게 은주가 첫사랑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궁금한 건 은주가 현수를 어떻게 생각했느냐이다. 그에 따라서 은주에 대한 현수의 사랑이 짝사랑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가려질 테니. 무려(?) 대중 철학자 강신주가 말했지.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관음증이다. 영화 속 현수에게도 적용이 되는 건진 모르겠으나 은주가 우식과 헤어지고 나서 현수와 떠난 기차 여행에서 그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 역시 현수에 대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랬던 것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외다리 사랑은 아닌 듯싶기도 한데.. 하여간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여자의 속은 모른다. 현수가 자기를 좋아했었다는 것도 그의 고백을 듣고 나서야 뒤늦게 아는 은주를 보면서.. 참 여자들 눈치 더럽게 없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한다는 단서들을 그렇게 흩뿌려놓았는데도 그 자욱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참 무디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우식에게 빠져있었으니 현수에 대해선 장님이었겠지. 현수의 은주에 대한 숭고한(?) 마음.. 둘의 교차되는 시선.. 은주의 리액션.. 그들의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결국엔 닿을 수 없는 사랑이 보는 이의 가슴을 안타깝게 하고 울컥하게 만들었다. 음악 때문에 더 그랬다. 한낱 추억 만들기에 불과했던 낭만의 한줌을 이고 가는 사랑의 실패자들.. 경험자들.. 결론적으로 현수에게 있어서 은주는 관음증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채 여물지 못한 사랑이었다고나 할까.

반면 학원물 트랙은 불편하다. 만인이 만인에게 깡패가 되는 사회. 이 명제가 적용되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까닭이다. 물론 그러한 공간을 만드는 존재는 언제나 인간들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학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고 엄혹했던 70년대라는 시대의 불편한 진실이기도하다. 어쩌면 7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은 중요한 것이 아니리라. 여기서 그것을 떼어내더라도 영화 속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해 지금의 한국 사회와 학교 실태에 정확히 부합된다. 참으로 어메이징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시계 바늘을 거꾸로 해서 37년 전으로 돌아가면 바로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는 믿지 못할 아이러니의 시의성이 그것이다. 마치 중첩의 데칼코마니처럼. 다들 알다시피 이 영화는 유신정권 시절 대한민국 말죽거리의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 속 정문고는 단지 하나의 학교가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 사회의 축소판이자 거울이라고 보면 된다. 학교가 군대 같고 삼청교육대 같다.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는 무간지옥. 바퀴벌레 새끼들로 우글거린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잡아먹힌다.. 물어뜯긴다.. 마치 먹이 사슬의 피라미드 구조 같다. 그 꼭대기 위에는 누가 있을까.. 이러한 빌어먹을 구조를 만든 개쓰레기 새끼. 우선 학생들 사이에서 강자와 약자가 나뉘어지고 철저하게 노예와 학살자, 간신으로 구분되어지며 선생은 학생을 두들겨 패고 교장은 선생의 뺨에 귓방망이를 날린다. 모두가 깡패가 되는 세상. 맨 위에는 국가가 있겠지. 국가의 폭력. 개좆같은 지도자의 만행. 지가 깡패면서 자꾸 남에게 깡패라고 힐난하며 덧씌우는 꼬락서니란.. 서로가 깡패인줄도 모르고.. 어차피 도찐개찐..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있는 약자(학생)들 안에서도 약자와 중간자, 강자가 나뉘는데 여기에 하나 빠진 게 있다. 방관자.. 제일 무섭고 위험하며 악랄한 존재.. 야비한 존재.. 배움의 놀이터가 되어야할 곳이 살육의 전쟁터가 되어 있다. 이미 학교는 그렇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학교에서 악마가 되는 법을 체득한다. (가정은 사회의 최소 단위이며 완전한 사회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따르므로 그것을 감안하여 제외한다면) 하나의 사회를 학습하는데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학교-군대-사회라는 보통의 단계를 거치는데 우린 이미 첫 단계에서 사회에서 배워야 할 거의 모든 것들을 통째로 학습한다. 온갖 야비하고 사악한 나쁜 짓들을.. 눈치보며 머리 조아리고 굽실대며 비겁해지는 법을.. 무지와 공포, 불통과 증오를 대량 생산하고 폭력과 소외로 죽고 죽이는 영혼 없는 비인간적 쓰레기 혹은 영혼 깊은 식물인간이 되는 법을.. 우리가 경험하는 그 사회는.. 경쟁을 통해 남을 짓밟아서라도 성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부정하고 악랄한 수단마저 용인되는 사회.. 약자를 보호할수록 따돌림 당하고 고문당하며 잘못된 것처럼 치부되는 주객전도의 이상한 사회.. 오로지 명문대 입학을 위한 학벌 위주의 스펙 사회.. 천박한 외모 지상주의 사회.. 돈이면 다 되는 천민자본주의 사회.. 정의를 말하면 곧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또라이 사회.. 다만 지금이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요즘 선생이 학생을 그렇게 두들겨 패다가는 바로 경찰에 고소당할 거라는 것이며 반대로 학생이 선생을 폭행하고 욕설해대는 경우가 빈번해졌다는 현실이다. 참 격세지감을 느낄 일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선생이 학생보다는 힘의 우위를 갖지만 과거보다는 학생 권력이 세지고 교사 권력이 약해짐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이제는 학생들 사이에서 약자와 강자의 간극이 심하게 벌어진 게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어쩌면 정해진 도식은 없다. 그 강자라는 빈칸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있다. 결국 모든 건 상대적인 거니까.

시대의 흐름이란 게 있다. 1978년은 강남의 땅값이 오를 거라는 어머니의 예견에 서둘러 말죽거리로 전학 온 한 학생이 있었다. 이른바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강남 시대의 서막(강남 3부작의 서막이기도하고)을 예고하는 신호탄.. 시대는 엄혹했지만 낭만은 살아있었으니.. 고고장이 유행이었고 어딜 가나 올드팝이 흘러나오던.. 다분히 왜색 짙은 칙칙한 검정 교복 패션과 가방.. 까까머리와 양 갈래로 딴 머리.. 라디오 엽서 사연.. 빵집 데이트.. 분식집 디제이.. 이소룡 코스프레.. 버스 안내양.. 포르노 잡지들.. 확실히 아날로그 정서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도 향수를 자극하고 감성을 촉촉이 적셔주며 보는 순간에는 스마트폰이라는 매체를 완전히 잊게 만든다. 이른바 복고의 힘? 나름 시대적 고증을 꼼꼼히 잘한 듯한데 옥의 티가 있다면 영화 속 권상우의 머리는 당시 기준으로는 긴 머리가 아닌가 싶고 한가인이 버스에서 음악 듣느라 귀에 꽂은 이어폰은 비교적(?) 고급스럽고 세련된 게 요즘 것으로 느껴진다는 점? 뭐 그리 중요한건 아니다. 영화 보는 데 있어서 전혀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니까.

사실 난 11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봤었고 당시 권상우의 연기에 꽤 놀랐었다. 권상우의 연기를 처음으로 인정했던 작품이었고 지금 봐도 여전히 괜찮다고 여겨진다. 다만 부정확한 발음과 혀 짧은 소리는 매우 거슬린다. 솔직히 현수라는 캐릭터는 권상우가 맡을 만한 역할은 아니었다. 당시로선 권상우가 그 이전까지 쌓아왔던 본래의 이미지와는 상반되고 안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순수하고(?) 진중한 현수를 연기하기엔 외향적이고 경박스럽고 거칠며 철없어 보이던 방종의 극치에 가까운 캐릭터가 전작들을 통해 그에게 덧씌우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한 예로 극중에서는 권상우가 혼자 중국말을 중얼대며 쌍절곤을 휘두르거나 통기타를 치거나 거울을 노려보며 "한판 뜰까? 너 옥상으로 올라와, 이 씨발 새끼야.. 확 부셔버린다"라는 대사를 내뱉거나 종훈에 대한 복수를 위해 몸을 만들거나 하는 단독 샷으로 이뤄진 이와 같은 장면들에서의 모습들이 본래 권상우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약하고 감성적이며 진지한 현수라는 바탕 위에 혼자 골방에 있거나 홀로 체육관에 있을 때의 다소 코믹 발랄 엉뚱(?)하고 터프하기까지 한 현수가 토핑으로 살짝 얹어지는데 그것이 섞이지 못하고 왠지 모르게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 영화에서는 기존에 권상우가 본래 갖고 있었던 후자의 이미지가 어색한 느낌으로 작용되었다는 얘기다. 어쨌든 그에게는 연기 변신이라면 연기 변신에 해당되는 역할과 영화가 아니었을까.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권상우의 연기가 썩 괜찮았다면 아무래도 상대역이었던 이정진 그리고 더불어 이종혁, 김인권과 같은 조연급 배우들이 잘 받쳐준 덕도 있지 않았을까. 악역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우식 역의 이정진의 연기가 상대적으로 좀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나름 돋보이는 연기였다. 김인권이야 워낙 조연으로서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는 배우이니까(일례로 영화는 쓰레기였지만 '조폭 마누라'에서 그의 연기는 영화 속 어떤 배우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여기서도 찍새 역할을 참 맛깔나게 거북스럽게도(?) 표현했다. 한가인도 나쁘지 않았다. 인간적으로는 싫어하지만 장편 영화 데뷔작치고는 의외로 곧잘 하는 연기였다. 첫사랑이 주는 아련함의 대상으로서 어울리는 외모와 연기였다. 내가 알기로 사실 그녀가 맡은 은주라는 역할은 원래 SES의 유진이 하기로 되어 있었던 캐릭터였다. 근데 재밌지 않은가. 두 사람 모두 한때 올리비아 허시를 닮은 것으로 유명세를 탔었으니까. 영화 속 대사로도 등장하지만 올리비아 허시는 당시 미의 대명사였고 대한민국 뭇 남성들의 영원한 첫사랑이었다. 따라서 은주라는 인물은 올리비아 허시를 닮은 여성이여야만 했다. 불가피하게(?) 결국 연기력보다는 외모가 기준이었던 셈. 그런 의미에서, 은주라는 캐릭터는 일종의 판타지성을 내포한 인물.. 남성 특히나 청춘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신비스러운 느낌의.. 세상에는 없는.. 허구적 존재.. 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못 가진 것인가.. 탐하기만 하고.. 결과적으로 현수와 우식, 은주는 서로 찢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됐으니..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니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소량(?)의 재미가 있다. 지금은 나름(?) 핫하지만 당시로선 뉴 페이스였던 그들.. 선도부장으로 나와 악랄한 연기를 실감나게 펼치며 씬 스틸러급(?) 연기를 선보인 이종혁.. 극중 권상우와 이정진의 담임 선생으로 등장하는 안내상.. 마지막으로 이건 대박감이다.. 이종혁의 꼬봉 중 한 명으로 나오는 덩치가 있는데.. 그 이름도 유명한 조진웅.. 대사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엔 전혀 몰랐다. 그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 싶었다. 이런 배우를 흔히 대기만성형 배우라고 부르지. 지금은 난방비 사건으로 더 유명한 김부선도 만날 수 있다. 영화에서 가장 쇼킹한 장면에 그녀가 함께한다. 일종의 커다란(?) 반전에 해당하는 그 장면.. 여기서 반전이라는 의미는 예상치 못했기에 놀랐다.. 쇼킹이다..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이전에 햄버거와 성춘이 분식집 아줌마인 그녀에 대해 노골적으로 성적 욕구를 강하게(?) 드러냈었는데 이 장면에 와서 그것의 역전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상이 햄버거, 성춘에서 현수로 바뀌었을 뿐 학생(연하의 미성년자 남성)과 아줌마(연상의 성인 여성)라는 구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 구도 아래에서 지배자(남성)와 피지배자(여성)의 관계가 정반대로 뒤집혔다는 것. 어쨌든 내러티브에 영향을 주진 않으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될 만큼 인상적인 뜨거운 씬이었다.

영화 종반부, 권상우가 친구의 처참한 패배에 복수라는 사적 명분과 학급 전체를 걸고 절대악(?)을 멸하게 하겠다는 공적 명분의 가치를 내걸고 이종혁과의 혈전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며(이때 그의 목소리가 관객에게도 들린다) 스스로를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단련하며 준비하는 장면은 흡사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를 연상시킨다. 결정적으로 현수가 상체를 훌러덩 벗은 채로 거울 속 자신이 무너뜨려야할 적을 향해 노려보며 싸움을 걸듯 말을 내뱉는 장면에서 '택시 드라이버'의 드 니로에 대한 오마주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유하 감독은 스코시즈를 남몰래 흠모하는 것 같다. 재밌는 것은 공교롭게도 그의 강남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 '비열한 거리'라는 것인데.. 동명의 타이틀을 가진 스코시즈의 작품이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이고 유하 감독에게는 네 번째 장편 영화(억지를 좀 부려서 두 번째 작품이 데뷔작 이후 거의 십년 만에 나온 점을 감안한다면 세 번째 장편 영화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사실이 더 흥미를 자아낸다. 장르적으로 따져도 (유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을 제외하는 전제 아래에서) 둘 다 첫 번째 영화는 로맨스 드라마 - 두 번째는 범죄(액션) 드라마 로맨스 - 세 번짼 범죄(액션) 드라마라는 공통된 순서로 전개된다. 유하 감독은 스코시즈를 꿈꿨는지 모르지만 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무엇보다 '친구'의 자장 아래 놓여 있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도 그로부터 무시 못 할 영향을 받았을 게 분명하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근친관계에 있는 작품들을 거론하면, 일단 곽경택의 '친구'..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 이소룡과 성룡으로 대표되는 홍콩 무술영화..를 들 수 있겠다. 유치한 순정만화도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듯하고. 그러고 보니 류승범의 '품행 제로'도 근친성의 영화로 포함시킬 수 있겠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진지하고 심각한 감성적 순정만화라면 '품행 제로'는 그저 발랑 까진 발랄 쾌활 순정만화.. 거기다 학교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시대적 배경('품행 제로'는 8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도 얼추 비슷하며 느낌은 사뭇 달라도 삼각관계가 등장하고 나이트클럽, 통기타 장면, 엔딩의 하이라이트로 마지막 개싸움 장면이 두 작품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놀라우리만치 흡사하다. 특히 통기타 장면은 그 시대(70년대와 80년대 멀게는 9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면 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확실히 그 시대만의 공간, 소품, 문화, 정서, 공기 같은 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시대를 다룬 작품들마다 그런 것들이 중복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예전 어느 영화 프로에서 '영화 5분의 법칙'이라는 코너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반 5분에 이미 영화의 성패가 달려있고 결정지어진다는 건데, 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영화 딱 처음 시작하는 순간.. 느꼈다. 게임 끝났구나. 벌써 스크린에 바싹 다가가 그 속으로 빠져들어 가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흡인력 있는 영화다. 이야기의 힘.. 음악의 힘.. 그래 맞다. 이 영화가 그토록 감동적이고 관객의 마음을 훔쳤다면 그 일등공신 중의 하나가 적재적소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알맞게 배치된 음악의 힘을 부정할 수 없다. 스코어는 다양하지 않았어도 영화 테마곡을 포함해 몇 개의 곡들은 분명 울림이 있었다.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데 음악의 역할과 공이 굉장히 컸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시대의 힘.. 이게 핵심이자 본질일 것이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현수와 야생마 패거리의 일대 다수의 대혈투는 극의 정점을 찍는 하이라이트로서 분명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찍은 장면이었을 게다. 비장미가 최고조로 오르는 이 장면은 그야말로 사실적이며 한 청년의 처절한 몸부림이 올곧이 전해지는 리얼 그 자체의 전율과 감동의 압권이다. 그리고 영화 사상 최고의 명대사 "대한민국 학교 좆 까라 그래"라는 현수의 울부짖는 외침이 화룡점정을 찍으며 모두의 가슴을 때린다. 그렇게 말하고 학교를 나왔지만 그런 그도 대학이라는 목표는 버리지 못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 제도권으로의 편입을 도모하겠지. 현수 아버지가 자식인 현수에게 내뱉는 말이 기가 막히면서 왠지 뼈아프게 들린다. 고등학교 졸업 못했다고 대학 못 들어가는 거 아니다 라는 그 말. 대학은 결코 포기 안 하겠다는 집념?.. 모로 가도 대학만 가면 된다.. 어떤 말을 하건 결국엔 대학으로 귀결되는.. 끝내 대학이라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마치 집단 히스테리인 듯싶다. 강요되고 강제된 의무 조항 같은.. 대학을 못가면 잉여 인간이 된다고 핏대 올리며 자식을 닦달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 현실에는 처절한 공감을 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는 숨 막히는 암담함을 느낄 수밖에. 근데 지금은 거꾸로 대학을 가면 문제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못 다니는 사태가 벌어지고 다녀도 피 같은 등록금이 아깝다. 손실이다. 어차피 취업 안 될 테니까. 과거 먹보 대학이라 불리며 미팅, 캠퍼스 낭만을 노래하던 그곳은 사라진지 오래다.. 바뀐 건 하나도 없다. 피상적으로 보면 달라진 것 같아도 본질은 그대로다. 그럼에도 대학은 간다. 가야하고 누구나 다 가기 때문에 간다. 이것은 마치 신앙과 같다. 대학은 꼭 가야만 한다는 무조건적인 믿음. 그러한 집단적 강박증을 추동시키는 도그마가 문제인 것이다. 대학이 무조건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을 안 가는 게 무조건적인 실패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건만. 그럼에도 대학은 필수라는 결론으로 수렴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학교만 나오고서도 성공한 사람들 많다.. 대학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되는 거다..라고 극중 영어 교사가 하는 말은 현실에서는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저 허공에 떠도는 먼지의 한 티끌일 뿐.. 여전히 수능날만 되면 사찰과 교회는 성수기를 이루고 신도들은 갑자기 신앙심(?)에 불타올라 학벌 지상주의의 바벨탑을 쌓는다.

영화의 엔딩.. 현수와 햄버거는 '취권'이 상영되는 극장 앞에서 서로 이소룡이 낫네.. 성룡이 낫네..하며 유치한 입씨름을 벌인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정확히 8년 후 권상우가 성룡의 '차이니즈 조디악'에 출연한다는 것이다. 우연치고는 참 놀랍고도 대단한(!) 인연. 현수는 취권 자세를 취하는 햄버거에게 "너 술 취했냐"라는 농담을 건넨다. 사실 이거는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다. '취권'을 아직 보지 못한 현수의 선견지명(?)이 담긴 뼈 있는 대사랄까. 그리곤 현수는 이소룡이 되고 햄버거는 성룡이 되어 결투(?)에 돌입하는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프리즈 프레임되며 영화는 마무리.. 정통 무술과 코믹 무술의 싸움.. 절도와 유연함의 대결. 이 엔딩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시대가 저물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소룡의 시대는 가고 성룡의 시대가 도래하는 그쯤.. 시간은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고 있었고.. 유신정권은 전두환 정권으로.. 그들은 10대에서 20대로.. 학교에서 사회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그렇게 전환되고 있었다. 정통 무술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구시대의 산물로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처럼 과거의 유산과 잔재가 슬슬 퇴행을 보이고 코믹 무술이라는 신시대 문물이 등장하며 밝은(?) 새 시대를 예고하는 듯한..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라는 신호탄과도 같은.. 그러나 진보는 요원하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감시하지 않으면.. 자유는 일시에 목 졸림 당하고 통제되며 독재는 다시금 부활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이소룡의 시대를 다시 살고 있는지도.. 그때 그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현수의 절절했던 마지막 한마디 외침이 절실히 그리운 이때.. 지금 우리에게 현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