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키 집안 서열 - gabuki jib-an seo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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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계의 독식자, 쇼치쿠

가부키 배우에게 있어서 부와 명성은 자석에 달라붙는 쇳조각처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쇼치쿠’라는 존재 또한 그러하다. 마치 다른 팽나무에 붙어사는 등나무처럼 배우의 인생에 깊이 관여한다. 활동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사적으로 내밀한 부분까지 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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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竹(쇼치쿠[송죽]). 이 회사는 일본 유가 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영화 시장 점유율이 11%에 이르는 일본 3대 영화사다. 또한 가부키를 직접 제작하고 상연하는 최대 제작사이기도 하다. 도쿄의 가부키좌, 오사카의 쇼치쿠좌, 교토의 미나미좌와 같은 가부키 극장을 운영해왔다.

(아마 코로나로 인해 영화 배급사이자 가부키 공연 제작사인 쇼치쿠도 타격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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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좌 개장식

쇼치쿠는 가부키의 현대화에 앞장서왔으며 이 덕분에 모든 가부키 배우들이 소속되어 있는 거대한 소속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워낙 영향력이 막강하다보니, 가부키 업게에서는 쇼치쿠의 협력 없이는 공연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전에 이야기했듯 가부키는 대를 내려오며 세습한다. 조상의 옛이름을 물려받음으로서 한 걸음 더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가부키 배우들. 이렇게 이름을 물려받는 슈메이(습명)의 시기를 정하는 것 또한 쇼치쿠가 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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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설령 선대가 사망하더라도 곧바로 그 이름을 아들이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쇼치쿠와 동조를 해야 가문의 내부적인 승계도 매끄럽게 진행이 된다.

쇼치쿠는 후계자가 그 이름을 물려받을 수 있을 정도로 기량이 올라와 있는지,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어서 이미지가 나쁘지는 않은지 또는 올림픽처럼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습명 공연을 더욱 흥행시킬 수 있는 타이밍이 언제인지까지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시어머니보다 회사 눈치를 더 보는 가부키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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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가부키 세계를 이원(梨園)이라 칭한다. 본디 중국 당나라 현종이 전국 각지의 예인들을 불러모아 무대를 만들어 주고 배우를 양성하기도 한 곳을 이원이라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원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신재효 선생이 소리꾼들을 위해 만든 ‘동리정사’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원에 몸담고 있다는 것은 쇼치쿠와 공생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과 같다. 쇼치쿠로서도 배우가 추문 없이 공연을 통해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 이득이기에 이들을 관리한다. 그리고 배우 또한 이러한 개입에 수용적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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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부키 가문의 여자들 The End Of Summer (1961)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일개 회사가 배우 개인의 혼사에도 아주 깊게 개입한다는 점이다. 상당히 보수적인 가부키 세계의 질서가 가족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즉, 가부키 배우들은 결혼도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나게 행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예비 신부가 이원에 들어올 만한 사람인지 판단한다.

마치 간택 과정을 거치듯이 말이다. 혼인 전에 평판은 어땠는지, 집안 사정은 어떤지, 결혼하고 난 뒤에 이원에 잘 융화될 수 있는지 등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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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쿠라 요코

예를 들면 이치가와 에비조와 상견례까지 했던 배우 요네쿠라 요코(米倉涼子). 한창 잘 나던 요코가 가부키계의 황태자와 결혼하려면 은퇴를 각오해야 했다. 가부키 가문의 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여자 개인의 커리어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기에, 결국 둘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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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한명. 카타오카 아이노스케의 아내 후지와라 노리카(藤原紀香). 노리카는 연예계에서는 명성이 드높은 연예인이었으나,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온화하고도 순종적인 아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을 받았다.

이후에 결혼에는 성공했지만 남편보다 본인이 더 유명하다는 이유로 언론에서 연신 좀더 ‘겸손해져라’ ‘자제하라’는 말에 시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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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치쿠의 동의 아래 가부키 배우인 남편과 결혼을 하면 일명 이원의 처(梨园妻)라고 불리게 된다. 적어도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원에 발을 내딛게 된 여자의 고생길은 이제 시작이다. 개인의 삶은 어디에도 없이 혹독한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물론이요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받게 되는 것이다.

- 아내라는 것 자체가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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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台は夫の職場、会場のロビーや客席は妻の仕事場”

무대는 남편의 직장, 회장의 로비나 객석은 아내의 일터.

주말나 공휴일이 일하는 날이며 특별한 날일수록 더 바쁜 가부키 배우. 그리고 공연 날이면 배우 본인보다 더 바쁘게 하지만 단아한 걸음걸이로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이원의 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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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보러온 후원회나 히이키(贔屓) 혹은 타니마치(タニマチ)라 불리는 큰손들을 접객하는 것도 아내의 일이다.

한화로 수십만원에 달하는 가부키 공연을 한 달에도 수차례 보러와주고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힘이 되어주는 후원자를 홀대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공연에 집중해야할 배우 본인이 이들을 상대할 수 없으니 이는 아내의 일이라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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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공연 중간에 쉬는 시간은 더욱 바쁜 시간일 뿐이다. 객석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잘 감상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중간중간에 남편의 동료 배우나 극장 직원을 신경쓰는 것도 이들의 일이다.

- 기모노까지 검열받는 이원의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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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중요한 고객들을 응대하는 아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모노 선택 센스다. 남편보다 경력이 오래된 배우의 아내나 큰손들이 입은 것보다 더 화려하거나 비싼 기모노를 입으면 실례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수수해서도 또 저렴한 것을 입어도 품위가 없다며 책을 잡힌다.

“派手すぎてもいけないし、地味すぎても華がない”

(너무 화려해도 안 되고, 너무 수수해도 매력이 없다)

위와 같은 암묵적인 규율에 지키면서 입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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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공연 당일날 손님이 뭘 입고 올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이원의 처라면 응당 날씨가 더운지 추운지, 비가 오는지 햇살이 좋은지를 봐가면서 손님이 입을만한 기모노를 예측해야한다. 그러는 한편으로 남편이 무대에 서는 공연의 특성에 어울리게끔 기모노 디자인을 신경써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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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에몽 기모노?

만약 이런 센스있는 기모노 차림을 선택하는 데 실패하면 곧바로 질타가 쏟아진다. 이치가와 에비조의 아내 코바야시 마오 또한 신혼 시절 수수한 하늘색 기모노를 입은 일로 ‘도라에몽’이라며 조롱을 당한 전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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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카의 결혼 전,후 기모노 변화

이러한 검열은 대배우 후지와라 노리카 또한 피할 수 없었다. 2016년 3월 결혼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입은 연보랏빛 기모노가 이원의 처로서는 격에 맞지 않다며 꼬투리 잡힌 것이다.

그날 노리카가 입은 기모노는 유젠(友禅)이라 해서 비단에 화려한 무늬를 수놓은 호몬기(訪問着)였다. 이 옷에 새겨진 꽃은 다이아몬드 릴리와 카사블랑카로 노리카의 탄생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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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訪問着(호몬기)

후리소데 다음으로 격식을 차린 기모노. 혼인 여부에 관계없이 입을 수 있는 나들이 옷으로, 친구의 결혼식이나 각종 모임 혹은 약혼식 따위에서 입을 수 있는 약식예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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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이원의 아내로서는 낙제점”이라 말하길 서슴치 않은 패션평론가 이시하라 유코(石原裕子)의 말에 따르면 벚꽃이나 동백나무처럼 일본풍도 많은데 서양화를 수놓은 기모노를 입고 나타난게 이상하시단다.

게다가 가슴 부분이 흰색이라 볼륨이 강조되어서 지나친데, 마치 노리카 본인이 주연이라 선언하는 것과 같아서 보기 좋지 않다는 거다. 아니, 그럼 자기 결혼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면 누가 주인공이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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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지와라 노리카라는 여자는 이미 20살 무렵부터 기모노 입기 교실을 다니면서 30년가까이 기모노를 입어왔으며, 기모노를 너무 좋아해서 계간지에 기모노를 주제로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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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여배우 출신이라 더 엄중한 잣대를 시험받고 있는듯한 노리카. 이후 남편의 공연장에서 수수한 기모노를 입고 나타났으나, 관객들과 사진을 찍은 일까지도 배우의 아내로서 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차가운 눈총을 받았다.

관객들 또한 보랏빛 기모노도 이쁘지만 소박한 기모노도 예쁘다는 평을 올리는 것을 보면 배우의 아내에게 지나친 관심을 갖고 있고 이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 자각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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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아이(前田愛).

이보다 더한 일도 있다. 나카무라 칸쿠로의 아내 마에다 아이(前田愛). 17살에 19살이던 남편과 9년동안 열애를 한 마에다 아이는 워낙 젊은데다 생긴 것도 동안이라 고아한 이미지인 이원의 아내와는 어울리지 않다는 별 생트집을 잡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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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아이 또한 약혼식때 입은 난해한 무늬의 기모노로 구설수에 휘말렸는데, 대중들 마저도 이는 본인이 아니라 이원의 뜻이었을것이라 말하면서도 근래에는 단아하게 잘 입어서 보기 좋아라며 떠들어대고 있다.

물론 이렇게 이미지가 좋아진 데에는 마에다 아이가 이원의 아내로서의 가장 큰 사명이라 일컫어지는 아들을 2명이나 출산한 것이라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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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지마와 그의 아들

잠깐 덧붙이자면 오노에 키쿠고로의 딸이자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까지 수상한 시노부 테라지마는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갈망해왔던 것이 가부키 배우였으나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꿈을 포기했다. 즉, 가부키에서 여자란 존재는 무대 위나 밑이나 주역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 손편지와 선물을 보내는 것도 아내의 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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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보기 좋게 기모노를 차려입고 손님들을 상대하는 것만이 가부키 배우의 아내가 해야할 일의 다가 아니다. 일단 이원의 처가 된 이상 이들은 상류 사회의 문화에 익숙해져야 한다.

타니마치처럼 중요하고도 높은 위치에 있는 손님들과 평소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요즘 사회 이슈나 정치적인 사건과 같은 시류를 항상 파악하고 있어야한다. 그래야 큰손들과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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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가부키 역사라던가 세세한 규칙 그리고 암묵적인 규율과 전통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24절기도 능숙하게 꿰뚫고 있어야 하는데, 이에 맞추어 기모노를 갖춰 입고 행사를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도나 서예 그리고 꽂꽂이 같은 교양까지 두루 익혀야 한다. 아내의 흠을 보이면 남편의 이미지에 품위에 누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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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렇게 갖가지 교양과 품위를 겸비한 이원의 처가 이름을 기억해주고 선물을 보내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겠는가. 일본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선물 문화인 ‘오미야게(お土産)’에 대해서 말이다.

가부키계도 예외는 없다. 습명 피로 공연에 맞춰 팬들에게 선물할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수건이나 보자기 또는 부채 따위를 준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은 배우의 아내가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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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습명 공연처럼 중요한 행사는 물론이고 연기를 가르쳐준 것에대한 답례 인사, 분장실에서 일해주는 사람을 치하하기 위한 음식 선물, 제자의 출산 축하 선물, 동료 배우 자녀의 입학 축하 선물 등. 선물을 챙겨야 할 일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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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 스시(浪花寿司)의 누름 초밥

*差し入れ(사시이레)

분장실에서 일을 해주는 이의 공을 치하하기 위한 음식 선물. 격려의 의미를 갖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도소에 사식 따위를 넣어주는 것도 사시이레라고 한다.

때문에 가부키 배우의 딸처럼 가부키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은, 소위 일반인 또한 가부키 배우의 아내로서는 적격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다.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맞지 않는 오래된 관습과 격식까지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이원의 아내로서의 삶. 적어도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해왔던 일을 봐온 가부키 배우의 딸이라면 적어도 이러한 관습에 익숙할 테고 이를 비교적 잘 감내하리라는 계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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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가부키 배우의 아내는 공연장까지 운전을 해 남편을 바래다주고 그가 입을 의상을 준비해야 할 뿐 아니라 공연 중에는 손님을 챙기고, 공연을 하지 않는 날에도 중요한 후원자들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쓰거나 남편의 동료 배우 집안의 경조사를 챙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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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마오

틈틈히 모임에 나가 사교에도 신경써야 할 뿐더러, 아들을 낳아 집안에서는 육아까지 도맡는다. 하는 일로만 따지자면 비서이자 매니저 그리고 유모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아내가 해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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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단주로의 아들 8대 이치가와 신노스케

잠깐 가부키계에서 통용되는 관습에 대해 언급하자면 가부키 집안에서는 6살이 되는 해 6월 6일부터 가부키 기예를 연습하는 일을 시작한다고 한다. 이는 무로마치 시대 노를 집대성한 제아미 모토키요(世阿弥)의 저서 풍자화전<風姿花伝>에서 언급된 일에서 유래한다는 말도 있고,

손가락으로 숫자 6을 셀 때의 모양을 더러 “小指が立つ”(새끼손가락이 서다)라는 말이 “子が立つ”(자식이 서다)라는 말과 비슷하기에 아이가 자립하기에 좋은 날을 6월 6일로 정했다는 설도 있다.

이렇듯 가부키 후계자로서 아들이 가부키 연습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학교 수업이 끝난 이후에 딴길로 새지 않도록 학교까지 마중나가는 일 또한 배우의 아내이자, 가부키 후계자의 어머니로서 해야할 역할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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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10개여도 모자랄 바쁜 일과

나카무라 시칸의 아내 미타 히로코(三田宽子)는 하루에도 극장을 4번이나 오가야 했으며 아침이나 점심시간 따위는 없는 바쁜 일과를 보내야 한다고 밝혔다. 새벽 3시쯤에야 일정이 끝날 정도로 고된 생활을 보내는 것이 가부키 배우의 아내로서의 삶이라는 것이다.

- 이원의 아내로부터 벗어난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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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와 테루유키

물론 이 엄청난 희생을 모든 가부키 배우의 아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에서 도쿄 중앙은행 이사인 오오와다 아키라 역할을 맡은 배우 카가와 테루유키(香川 照之)의 부인의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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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이치카와 엔오

가부키 배우인 아버지 이치카와 엔오(市川猿翁)는 테루유키가 아주 어릴 적에 바람이 나 가족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다. 심지어 이후에 테루유키가 찾아갔을 때에조차 매몰차게 자식으로 인정하길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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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테루유키 (우) 엔노스케

그러다가 2011년에서야 병간호가 필요할 정도로 몸 상태가 나빠지니 자식으로 받아줬다. 지금은 사촌인 이치카와 엔노스케가 이치카와 직계의 이름을 물려받았지만, 그가 독신이기에 테루유키의 아들이 그 자리를 잇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한다.

카가와 테루유키로서는 친자식으로 인정받기까지 수십년이 걸렸고 그 동안에 굴욕도 당했지만, 어찌되었든 바라던 대로 가부키 가문에 입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하루아침에 이원의 아내로서 온갖 일에 시달리게 된 셈이다. 게다가 시아버지의 병간호까지 해야했으니 힘들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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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테루유키의 아내가 처음부터 이혼을 결심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적어도 몇년 동안은 이원에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른 부인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 아들마저 다른 배우들에게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2016년에 이혼을 하게 되었다.

- 女遊びは芸の肥やし(여색은 예능의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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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된 노동과 정신적 피로를 호소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시선을 아내가 감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배우라는 그의 직업도 사랑하는 것이고 이를 뒷바라지 하는 것이다. 아나운서나 배우처럼 화려한 연예인으로서의 삶을 뒤로하고 가장 빛나는 순간에 은퇴를 결심하게 만드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남편의 외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역경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배우자의 외도는 가장 고통스러운 일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 경악할만한 사실은 지극히 남성을 위주로 돌아가는 가부키계의 질서에 따라, 남편의 불륜은 아내의 사과나 비호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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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나카무라 시칸의 아내 미타 히로코. 가부키 업계가 코로나로 인해 큰 타격을 입고 있는 와중에도 남편이 두번째 불륜을 저질렀다.

심지어 내연녀를 숨기려 신경쓰는 편도 아니었다고 하는 말조차 돌았다. 히로코에게 있어서 얼마나 치욕적인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원의 아내로서’ 히로코는 적어도 겉으로는 의연하게 이혼할 생각은 없다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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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칸자부로와 그의 아내 요시에

에도 가부키의 원조인 나카무라야의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또한 잦은 불륜으로 말이 많았다. 그런데 칸자부로의 아내 요시에(好江)는 “浮気はダメだが浮体ならいい”(바람기 있는 것 안되지만, 바람핀건 괜찮다)는 요상한 말은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 스포츠지 가부키 담당 기자마저도 가부키 배우의 불륜에 관해서는 다른 연예인보다 너그럽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아도 할 정도. 과거에는 여색을 즐기는 것이 가부키 배우로서 성적 매력을 기르는 데 중요하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까지 만연해있었다고 한다.

- 사생아도 책임만 진다면 괜찮아?

가부키 황태자 이치가와 에비조(13대 단주로), 그의 친구이자 한자와 나오키에서 얼굴을 알린 카타오카 아이노스케, 가부키 아이돌 8대 이치가와 소메고로의 아버지인 10대 마츠모토 코시로.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사생아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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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13대 단주로 (우) 12대 단주로

이치가와 에비조의 부친은 아들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보다 욕실에서 발목을 다쳐서 공연에 못 올라간 것을 더 꾸짖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일만 봐도 가부키 세계에서는 사생아가 있다는 것보다 무대에 한번이라도 빠지는 게 더 큰 논란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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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노스케는 아내 노리카가 71년생으로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지기 어려워서 그 사생아가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까지 나돌고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노리카는 수소치료까지 받으며 임신하려 노력 중이라고 한다. 정작 아이노스케는 제가 낳은 사생아는 뒤로 하고 아이는 입양하면 된다는 말을 하고있다.

이제까지 가부키 배우에게 있어서 사생아가 있다는 것은 그리 큰 흠이 되지 않았다. 무대에서 본업에 충실하고 낳은 아이를 경제적으로 책임지기만 해도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이치카와 엔노스케는 방송에서 “가부키 집안 중에는 가정 밖에 혼외자를 둔 경우가 많다.”는 말을 했을 정도랄까.

- 남편의 지위가 바로 아내의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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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 유미

가부키 배우가 일본 사회의 관심사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한다. 당연히 그들의 사생활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도 지대하다. 마치 우리네들이 연예인들의 연애사에 관심을 가지듯이 말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예인의 아내를 두고 누가 더 현모양처인가를 따져가며 등급을 매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원의 처는 결혼 전에 어떤 일을 했고 경력이 어땠든지는 중요치 않다. 결혼 후에 ‘남편의 그림자’로서 얼마나 잘 처신하고, 후계자를 키워내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가부키 세계에서 이 여성들의 서열은 시집을 온 순서 그리고 남편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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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 히로코

이원의 처 중에서 최고는 8대 나카무라 시칸(中村芝翫)의 아내 三田 寛子(미타 히로코)로 꼽힌다. 2021년 연초부터 아내라는 이유로, 불륜 당사자인 남편보다 취재진 앞에 더 자주서야 했던 미타 히로코. 남편이 나카코마야 출신이라 집안의 격도 높고, 아들을 셋이나 낳은데다 ‘내조’도 잘 했기에 최고의 아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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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카코 오오기

그 다음은 일본 배우 협회의 회장인 사카타 토쥬로(坂田藤十郎)의 아내 치카코 오오기(扇千 景)다. 다카라즈카라는 유명 극단 출신의 인재에, 일본 참의원 출신에다 한 때 모리 내각에서 장관까지 역임한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치카코 오오기 또한 이원에서는 그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모님일 뿐인 것이다.

그러고보면 치카코 오오기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2002년 남편이 50세 연하의 마이코와의 불륜 발각 사건 당시에 자신도 남편의 불륜 상대를 좋게 생각한다며 “그 중에서 가장 미인이고 머리가 좋은 아이”라며 문제가 될게 없다는 말을 한 전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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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사건은 카이친사건(開チン事件)이라 불리는데, 카이친이란 남성이 공공장소에서 하반신을 드러내는 추태를 이르는 말이다. 당시에 사카타 토쥬로가 어린 마이코와 함께 식사를 나누고 난 뒤, 호텔 복도에서 목욕가운을 활짝 열어보인 추태를 보인 것을 두고 카이친에 빗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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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 스미코

일본 배우 협회의 이사장 오노에 키쿠고로(尾上 菊五郎)의 아내 후지 스미코(富司 純子)는 부인 중에서 세번째로 서열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전에 오노에 키쿠고로 가문에 대해 소개하면서 단주로 가문을 제외하면 가장 최고 명문가라는 언급한 바가 있다. 당연히 키쿠고로 가문의 안주인 또한 서열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후지 스미코 또한 결혼 전에는 왕성한 활동을 했던 여배우로 두 사람은 대하드라마 「源義経」를 통해 만나게 되었다. 지금도 굳건히 일본내 영화시장 점유율 2위에 있는 토에이의 간판배우였지만 결혼을 계기로 은퇴했다.

가부키 집안 서열 - gabuki jib-an seoyeol

키쿠노스케와 요코 부부

다행이도 후지 스미코는 2010년에 다시 연예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오노케 키쿠고로는 이를 마땅치않게 여기며 아들인 키쿠노스케에게 “결혼은 일반인과 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다녔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키쿠노스케는 키치에몬 가문의 4녀 나미노 요코(波野瓔子)와 결혼했다.

찬찬히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본 배우 협회의 회장, 이사장, 이사 등 순으로 아내의 서열도 그대로 정립된다. 히로코 미타가 가장 서열이 높은 것도 그의 시아버지가 본래 전대 회장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가부키 배우의 아내로서 산다는 것은 나열한대로 명예와 함께 고난도 따른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가부키 가문에 시집가길 바라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가부키 배우 부인 뿐 아니라 배우 본인도 어렸을 때부터 갖은 훈련을 받아가며 많은 희생을 감내하고 있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가부키라는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 포스팅한 글을 다들 재밌게 읽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가부키 특집 중에 어떤 편이 제일 흥미로웠는지도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