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시대적 배경 - baheu sidaejeog baegyeong

바로크음악

바흐(1685~1750)의 삶과 음악 1 - 6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바그너, 쉔베르크 등 많은 음악가들이 극찬해마지 않는 바흐!

바흐는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바흐가 살던 시대에 바흐는 독일 지역에서 지명도가 낮은 음악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흐보다 더 인정받던 음악가는 헨델, 텔레만, 그라우프너였습니다. 

그리고 바흐 사후 새로운 음악(가벼운 화성중심의 갤랑음악,  고전주의 음악)이 유행했기 때문에 바흐의 음악은 잊혀져갔고 악보도 여러군데로 흩어졌습니다. 바흐의 음악이 재평가된 것은 50년뒤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겔이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1802)" 을 발표하면서였습니다. 이후 1829년 멘델스존의 지휘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초연되면서 바흐 재발견의 기폭제로 작용하였으며, 1850년 바흐 협회가 결정되고 나서야 1차 바흐 전집발간이 이루어졌습니다. 첼로 솔로를 위해 작곡된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6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는 첼리스트 파블로브 카잘스가 열세살때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헌책방에서 발견하였으며 이 곡이 공개적으로 연주된 것은 1925년 카잘스가 48세때였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바흐의 재평가는 무척이나 뒤늦게 이루어진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몇차례에 걸쳐 바흐의 일생과 음악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https://youtu.be/mGQLXRTl3Z0(여섯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바흐 시대적 배경 - baheu sidaejeog baegyeong

시대적 배경

바흐의 음악는 종교적 색채가 짙습니다. 왜냐하면 바흐의 집안은 독실한 루터파 신자였으며, 바흐는 생애 대부분을 교회, 궁정 교회에 고용되어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독일에서는 종교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독일의 카톨릭 사제였던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반기를 든것이죠. 카톨릭에서 파문을 당한 루터는 추종자들과 함께 신교로 독립합니다. 바흐의 조상인 파이트는 루터파 신자였는데 1545년 신교의 박해를 피해 체코 모라비아 지방에서 고타 근처의 베히마르 지방으로 이주했으며 이후 바흐 일가는 독일 튀링겐 지역에 정착하었습니다.

루터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한 것입니다. 독일어 성서는 민중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전 성서와 미사는 라틴어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민중들은 내용을 알 수 없었습니다. 또한 루터는 자신이 신학자가 아니면 음악가가 되었을 거라고 할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루터는 음악은 '신의 선물'이라고 여겼으므로 민중들도 예배때 함께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루터파는 민중들이 부르기 쉬운 귀에 익은 북유럽 민속음악과 음유시인의 가곡을 바탕으로 찬송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코랄입니다.  

이렇게 민중들이 독일어로 예배를 보고  세속에서 유행하는 선율을 차용하여 독일어로 찬송가를 만들고 부른다는 것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성서나 미사의 내용, 찬송가들은 라틴어로 되어있었고 라틴어는 사제와 일부 귀족, 성가대의 특권이었습니다. 또한 카톨릭 교회는 세속선율의 차용은 신자를 미혹시킨다고 규제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속에서 바흐는 교회에서 사용할 독일어로 된 수많은 코랄, 칸타타, 모테트 등을 작곡했습니다.

바흐의 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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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는 1685년 독일 튀링겐주에 있는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습니다. 바흐의 아버지는 아이제나흐 궁전의 트럼펫 연주자이자 마을의 음악감독이었습니다. 바흐의 최초의 음악교육은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바흐가 9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11월 아버지는 바르바라 마르가레타와 재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계모는 어린 바흐와 그의 형 야콥을 맏형 크리스토퍼 집으로 보냈습니다. 당시 크리스토퍼는 오르트루프에서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일하고 있었으며, 파헬벨의 제자였습니다. 바흐는 형에게 오르간을 배웠으며 형이 가지고 있던 작곡가들의 악보를 사보하면서 작곡을 공부하였습니다. 또한 오르트루프에는 리케움이라는 6년제 명문 라틴어 학교가 있었으며 성미하엘 교회에는 합창단이 있어 일요일, 축제일에는 교회음악을 연주하곤 했습니다. 어린 바흐는 리케움에서 이동합창단원이 되어 장학금을 받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흐보다 열네살이 많은 형 요한 크리스토프는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수입은 적은데 자식은 계속 늘어나 동생들까지 부양하기 어려웄습니다. 그래서 바흐는 열다섯살이 되자 뤼네부르크에 있는 미하엘 수도원으로 장학금 추천을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수도원이라기 보다는 교회과 귀족층 자녀을 위한 기숙학교였는데바흐는 변성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임시오르간 연주자 같은 활동을 했습니다. 이곳의 음악도서관은 독일에서 가장 큰 음악도서관 중 하나였는데  바흐는 도서관의 수많은 악보를 사보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유년기 바흐의 성장배경과 교육은 바흐가 교양과 예술적 소양을 쌓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로크 음악의 시대적 배경》

1. 바로크(Baroque)란?

2. 역사적 배경
- 계몽주의 시대
- 변화와 모험의 시대
- 이성의 시대
- 신앙의 시대
- 절대주의 시대

3. 음악의 시행

4. 각 국의 성향
- 이탈리아
- 프랑스
- 독일
- 영국

5.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의 감정이론
- 데카르트
-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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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로크(Baroque)란?

서양 음악의 역사에서 17세기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친 (1600년경부터 1750년 바하의 죽음에 이르는 약 150년) 동안은 바로크(Baroque) 시대로 분류된다.

바로크라고 하면 비발디나, 바하, 헨델 등의 음악으로 친숙하지만, 원래는 미술사의 용어였다. '일그러진 진주'라는 정도의 뜻을 가진 스페인어가 어원인 듯한데, 이 시대에 유행이 지나치게 장식적인 건축양식이나 회화에 대해 균형과 조화를 존중한 18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자들이 비꼰 말이었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바로크는 '일그러진', '과장된', 또는 '볼품 없는' 등 말하자면, 악취미를 두고 한 말이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의미가 수정되어 미술의 경우 램브란트나 루벤스로 대표되는, 움직임이 풍부하고 감정 노출이 심한 회화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음악에 있어서도 풍부한 색채가 넘치는 예술 양식으로 인정받으며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물론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바로크 시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역사가들이 1600-1750년의 음악에 바로크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 음악이 당대의 건축, 회화, 문학, 나아가서는 철학과 어느 정도 상통하기 때문이다.

2. 역사적 배경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인 1700년 전후의 몇 십 년(바로크 시대)은 근대 자유주의의 원리인 계몽주가 싹튼 시대이다. 이 시기에 인간은 자연세계의 질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이성과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이전에 없었던 큰 진보를 보였다. 17세기에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였고 천문학 등에서 근대적 기계론적 우주관이 성립되었다. 당시 철학 분야에서도 영국의 베이컨을 중심으로 한 '경험주의'와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이성을 중시한 '합리주의'가 일어난 시대였다.

18세기까지 이어진 이러한 과학적 사고는 음악분야에도 적용되었다. 즉 형식, 화성, 리듬 등의 합리적인 통제 하에 인간 본성의 기본적인 정서들을 불러일으키려 하였다. 바로크시대의 음악은 지성과 감성(머리와 가슴)의 이러한 극적인 균형으로 인해, 정서적 효과를 고양시켜주는 표현의 정도와 범위를 허용할 수도 있게 되었다.

바로크 음악은 감정을 표현하는 멜로디가 강조되어 대중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1600년부터 1750년까지는 변화와 모험의 시대였다. 중산층은 귀족 사회와의 대립 속에서 부와 힘을 모아갔고 제국들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서로 충돌하였다. 언제나 급격한 변화나 심한 상충 속에 새로움이 잉태되듯이 지나친 사치와 무서운 빈곤, 숭고한 이상주의와 잔인한 압박 등과 같은 당시의 모순된 상황들 속에서 바로크 예술의 장려함과 탁월함이 창출되었다.
바로크는 또한 이성의 시대였다. 정복자들보다 더 대담한 모험가들이 미지의 지식 세계를 향해갔고 케플러, 갈렐레오, 코페르니쿠스 등의 물리학 및 천문학상의 발견, 데카르트의 수학과 스피노자의 철학 등 유럽의 지적 역사에 있어서의 많은 이정표들이 세워졌다. 하베이(Harvey)는 혈액의 순환을 발견하였고 로크는 정신활동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의 기초를 닦았으며, 뉴턴은 만유 인력 이론으로 우주가 지니고 있는 규칙과 질서의 근거를 밝혔다.

바로크는 또한 열렬한 신앙의 시대였다. 구교인 천주교와 신교가 유럽 전체를 지배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구교는 남부 유럽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신교는 북부 유럽과 영국을 중심으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구교와 신교의 대립은 맹렬한 것이어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뛰어난 예술 작품들을 산출하기도 했다.

중산층은 그들 자신의 문화를 창출하였다. 그들은 가정과 교회, 콜레지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 교육 및 연주를 위한 음악인 집단)을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했으며, 특히 희가극 속에 자신들의 삶에 관한 예리하고도 재치 넘치는 소견을 담았다. 미술가들은 과장되고 젠체하는 소재를 버리고 중산층의 삶의 모습을 소재로 삼았고, 네덜란드 학파는 새로운 시민 예술을 확립하였다. 자본가들의 주도 아래, 시민 문화는 궁정의 문화와 대등한 수준을 이루어갔으며, 미술 작품들은 넘치는 힘과 삶의 흥겨움을 담고 있었다.

요컨데 바로크는 서양의 사고와 관습의 혁명 속에 싹텄던 불굴의 의지와 강인함을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크고 힘차고 장엄하게 보여준 새로운 시대였다.

절대군주의 시대인 바로크시대에는 유럽의 대부분의 궁중은 음악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루이 14세(1643-1715 통치)의 프랑 궁중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유럽 각국의 왕족들은 베르사유의 화려함을 그들의 모델로 삼았고 루이 14세의 "짐은 국가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예술과 문화는 군주를 숭배하는 방편의 하나가 되었으며, 귀족들은 궁정 합창단과 관현악, 오페라단 등의 연주를 통해 하나님과 고대의 영웅 이야기를 즐겼다.

음악의 후원자는 교황, 황제, 영국과 스페인의 왕, 이탈리아와 독일 소국들의 통치자들이었다. 베니스, 북부 독일의 작은 마을 등과 같은 도시 국가들은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 모두에 기여하였다. 물론 교회는 음악의 중요한 후원자였지만, 그 전과 비교할 때 바로크 시대에서는 덜 중요한 후원자이다. 귀족, 시민사회, 교회 등의 후원자와 더불어 사적인 모임인 아카데미(academy)가 많은 도시에서 음악의 후원자로 등장한다.

이 시대 유럽의 음악가들은 왕이나 귀족의 하인 비슷한 신분이었고, 주인의 기호에 맞는 음악을 만드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루이14세가 호령하던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의 음악가인 장 밥티스트 륄리가 높은 직책에 있었다. 직위는 높았지만 하는 일은 왕의 주머니에 현금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 때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륄리와 몇 사람의 작곡가가 만든 화려한 바로크 오페라와 발레가 거의 매일 공연되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저녁마다 시청하는 TV의 쇼 프로그램 같은 것이 열렸다고 보면 될 것이다.

바로크 작곡가들은 작품들을 항상 위탁에 의해 썼고, 거의 항상 궁정, 극장, 교회, 공공연주회장에서의 구체적인 때와 특정 연주자들을 염두에 두고 곡을 썼다. 궁정과 귀족들은 고대시대부터 음악 후원자로서의 주도적 역할을 맡아 왔고, 베토벤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작곡가들과 연주가들을 고용했다.

예를 들어 헨델의 <수상음악>(Water Music)의 쾌활한 춤곡들은, 1717년 죠지 1세가 웨스트민스터에서 첼시로 향하는 선상여행을 할 때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되었던 것이다. 또 그 당시의 헨델의 귀족 제자들 중에는 웨일즈 왕의 첫째 딸인 앤이 있었는데, 헨델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모음곡>(Suite for Harpsichord)들은 아마도 그녀를 교육하기 위해 작곡된 것 같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는 바로 바하와 헨델이다. 당시 무명이던 바하는 독일 어느 교회의 오르간 주자였고, 오페라의 대가가 된 헨델은 런던에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화려한 '쇼 프로덕션'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7년 선배인 이탈리아 작곡가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가 바로 '사계'로 유명한 안토니오 비발디이다.

이탈리아의 물의 도시 베니스에서는 많은 부자들이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느라 매일 밤 파티를 열었고, 바로크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비발디는 밤마다 바이올린을 겨드랑이에 끼고 곤돌라를 전세내어 샬롱을 옮겨다니며 겹치기 출연을 했다. 즉 라이브 공연에 바쁜 연주자였던 셈이다.

비발디는 500개 가량의 콘체르토를 '오스페달레 델라 피아터'에서의 공공 연주를 위해 작곡하였다. 그곳은 불쌍하게 버려진 소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베네치아의 유명한 고아원이다. 그는 그 곳에서 바이올린 교사의 직위를 맡고 있었는데, 그의 임무는 '오스페달레 델라 피아터'의 공공 연주를 위해 매달 약간의 기악음악과 최소한 두 개의 콘체르토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연주회는 유럽 전역의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었다. 이 연주회에서 인기를 끄는 연주자들이 간혹 이 고아원생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도로 숙련된 학생들인 경우가 많았다. 비발디 음악의 난해함은 어린 숙녀들의 기술로 보기에는 무리가 되었을 것이다.

3. 음악의 시행

돈을 내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회는 아직 드문 편이었다. 표를 사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최초의 공식적인 공공 연주회장은 1672년 런던에서 생겨났고, 이런 실제는 18세기 동안 유럽 대륙 전체에 매우 강한 기세로 퍼져나갔다. 독일에서는 1722년, 프랑스에서는 1725년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음악회가 열린다. 그러나 이런 음악회가 보편화되는 것은 1700년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독일 최초의 연주제인 "콜레지움 뮤지쿰(Collegium Musicum)은 1704년 라이프찌히에 있는 한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그 개최자는 당시 라이프찌히 대학의 학생이었던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이었다. 바하가 성 토마스 성당의 오르간주자와 칸토르의 직위를 맡기 위해 1723년 라이프찌히에 도착했을 때, 그 역시 '콜레지움 뮤지쿰'의 리더 역할을 맡게 되었고, 7년 동안 그 임무를 계속해 나갔다. 바하는 이 콜레지움에서의 연주를 위해 쾨텐 시절에 작곡한 바이올린과 관악기를 위한 작품들을 건반악기곡들로 편곡하였다.

당시의 음악도 요즘 대중음악에 트롯이니 블루스니, 레게니 하는 것처럼 여러 종류가 있었다. 당시의 교회음악은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이어지는 4악장 소나타 비슷한 종류였고, 우리가 조곡(suite)혹은 모음곡이라고 부르는 여러 춤곡을 모아놓은 댄스 매들리였다.

그런가하면 요즘 솜씨 좋은 기타리스트가 애드립을 하듯, 당시에도 '비르투오소(virtuoso)'라고 하는 명 연주자들이 귀신간은 솜씨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작품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하의 '이탈리안 협주곡'이다. 협주곡이란 제목이 붙어 있지만, 원래는 혼자 연주하는 독주곡이고, 혼자 연주하긴 하지만 반주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협주곡이라고 한 것이다.

4. 각 국의 성향

바로크의 음악적 사고는 이탈리아적 태도에 의해 지배된다. 바로크가 끝날 무렵이 되면 유럽의 음악은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국제적 어법으로 이루어진다. 16세기 중엽에서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는 음악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역이 되었으며, 이탈리아 반도는 이즈음 스페인, 오스트리아, 교황 국가, 그리고 여섯 개나 되는 작은 독립된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들 나라들은 서로 불신이 깊었으며 유럽의 세력 변화에 의해 서로 합했다가도 곧 갈라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몇몇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보자면 보잘것없이 작은 나라였지만 음악적으로 보자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플로렌스는 놀라운 혁신의 시기였던 17세기 초엽에 혁신의 주역을 맡고 있었고 로마는 꾸준히 교회 음악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한 때에는 오페라, 칸타타, 기악 음악의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했었다. 베니스는 17세기 내내 지도적인 음악 도시로서 오페라의 중심지였고 그 후 18세기에는 나폴리가 그 역할을 했다. 볼로냐와 다른 북부 도시들은 기악 음악 발전을 목격하는 증인이 된다.

1600년 오페라의 창출이 바로크 시대를 열어준다. 바로크 시기동안 극장은 음악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준다. 북부인들은 형식의 발생지인 이탈리아로 몰려들어, 오페라 시장을 부지런히 배우고 열심히 작곡했다. 그리고 헨델은 1714년 오페라 작곡가로 돈을 벌기 위해 영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이탈리아에서 먼저 극장음악의 첫 경험을 쌓았다. 헨델의 43번째 오페라이며, 유일한 희극 오페라인 <크세륵세스>(Xerxes)중 <라르고>(Largo)는 그 고귀한 분위기와 안 어울리게 가로수를 향한 사랑스러운 호칭이다.

프랑스에서 오페라는 유흥물일 뿐 아니라, 왕좌의 풍족한 권력에 대한 증거물이기도 하였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이민한 '쟝-밥티스트 륄리'는 프랑스어의 고집스런 어미부분과 궁정의 열광적인 춤곡 취향 모드를 충족시키는 프랑스 민족 오페라를 창출하였다. <터키 예식을 위한 행진곡>(la cl monie des Turcs)같은 음악은 그것이 나타내는 장엄한 名士들과 아주 잘 어울린다. 륄리의 제자인 '마랭 마레'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비올라 다 감바'의 주자였다. '비올라 다 감바'는 음색을 매우 미묘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첼로같이 생긴 6현의 악기이다. 마레는 베르사이유에 있는 루이 14세 궁정의 주도적 음악가였다. 거기서 그는 유례없는 명연주자로 알려졌고, '비올라 다 감바'와 무대음악의 작곡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특히 그의 묘사음악들이 유명하다. 그 예로는 오페라 <알시온느>(Alcyone)중 '미궁'(Lalyribth)과 '폭중의 음악'(Storm Music), '방광절제술에 대한 記述'(Description of the Cystostomy)과 <聖 제네비에브의 종들>(Bells of St.Genevieve)등이 있다.

프랑스는 자신의 분명한 민족적인 어법을 발전시키고 유지해 왔으나 이탈리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의 영향은 17세기 전반에 특히 심했다. 프랑스는 1630년대에 민족적인 음악 양식을 발전시키지만 그 발전은 앞으로 100년 가량이나 발전 없이 머뭇거리게 된다. 국민적인 양식을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87))는 플로렌스 출신으로서 13세에 귀족 부인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치기 위해 프랑스로 왔다. 그에 의해 프랑스 음악의 민족성이 지켜진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바로크시대에는 종교개혁으로 인한 혼란과 계몽주의의 새로운 인간애 정신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카톨릭 교회 음악은 이태리가 아닌 프랑스에서 더욱 훌륭한 예들을 많이 제시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교황이 샤르빵띠에의 <테데움>(Te Deum)같은 감동적인 대작들을 많이 만들어 낼 것을 장려하였다.

독일은 1618년에서 1648년에 이르는 30년 전쟁으로 문화적 후진국으로 전락한다. 30년 전쟁은 신구 양파의 종교적 전쟁으로 독일 전역을 황폐화시킨다. 17세기 중엽 이후 이탈리아 양식은 독일 작곡가들이 세워야할 음악의 기본 원리로 받아 들여졌다. 정치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세대들이 놀라운 업적을 이루게 된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가 가장 유명하다. 바하의 예술은 대부분 이탈리아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리고 헨델의 작품은 독일적이라기보다는 이탈리아적이다.

독일의 루터 교회 작곡가들은 대형의 작품들보다는 개인적 표현과 조심스럽게 정제된 형식미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가장 중요한 바흐의 선조 중의 한 사람이며 작곡가이고 오르간주자인 요한 파헬벨은 <라장조 캐논>(Cannon in D major)을 작곡하는데 있어서 바로크 시대의 두 타입의 종교음악 형식을 결합하였다. 즉 그것은 반복되는 그라운드 베이스위에 선율을 계속적으로 변주하는 타입(통주저음, 바소 콘티누소)과 카논 타입니다. "카논"은 한 선율을 여러 성부가 시작 시간을 달리 연주함으로써 얻어지는 장식된 돌림노래이다. 카논이란 이름은 악보 위에 진행 방법을 지시해 놓는 관습에서 생겨났다. 즉 악보의 윗부분에는 지시("카논"="규칙")가 있으면, 그것은 하나의 선율을 성부들이 시간 간격을 두고 연속해서 연주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곡 전체를 통해 상음부가 캐논으로 연주하는 동안 베이스가 8음표의 주제를 반복하는 완벽한 음악적 구조로 하여 더욱 탁월한 곡으로서 이 작품 또한 감정적이며 감각적인 매력이 넘치는 몹시도 아름다운 곡이다.

영국의 경우, 엘리자베트와 야코비안의 음악적 영광은 시민전쟁(civil war)과 커먼웰스(commonwealth)로 인해 사라진다.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탈리아 양식이 다시 부흥해 영국의 음악은 이탈리아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된 지경에 이른다.

5.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의 감정이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바로크 시대 음악의 큰 특징은 음악을 사용하여 생각과 감정을 생생하고 격렬하게 표현 또는 재현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분노, 흥분, 장엄, 영웅심, 명상, 신비, 기이함 등의 감정 등을 표현하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적 효과를 강렬한 대조를 통해 강조하였다. 바로크의 건축, 조각, 회화에서 때로 그 대상들이 과도하게 왜곡되는 것은 바로 대상 자체의 자연적 한계를 넘어 예술가의 격정적인 심정을 표현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모든 바로크시대의 작곡가들은 이러한 감정 표현에 중점을 두고 음악을 만들었는데, 이는 17세기 철학을 대표하는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아 음악은 '분명한 이념'을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6개의 기본 감정(놀람, 사랑, 미움, 열망, 기쁨, 슬픔)에서 연역적으로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내면서 감정의 독자적 의미를 인정하였는데, 이러한 이론적 기초가 바로크 시대 감정 이론의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크 감정이론의 이해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점은 이미 언급했듯이 감정의 '표현'이 모방적 차원에서의 재현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즉, 음악에 나타나는 감정은 '모방'의 결과로서 작곡가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감정이론에서는 음악의 감정적 성격이 일차적으로 객관화되어 파악된다는 전제가 암시되었던 것이다.

또한 감정이론에서 주목할 점은 '감정'의 개념이 현대적 의미의 '감정'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음악에서 묘사되는 대상으로서의 감정은 개별적 감정의 복합체 또는 통일체였다. 즉, 그것은 작곡가 자신의 내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기반을 전제로 하여 유형화된 더 높은 단계의 감정이다. 즉, 사람들은 한 공동체 안에서 특정한 자극에 의해 공통적인 어떤 구체적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 하에 모든 이가 공통적인 어떤 구체적 감정을 느낀다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크 시대의 감정이론에서는 이러한 전제 하에 모든 이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다양한 음악적 수단을 통하여 표현되어 왔고, 표현된다고 본다. 즉, 선율, 화성, 리듬, 템포, 음향, 다이나믹, 양식, 조성, 등은 감정을 모방하는 수단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템포는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알레그로는 기쁨을 아다지오는 슬픔을 빠른 템포는 전쟁이나 성남을 표현한다. 연주기호도 예외가 아니어서 역시 감정의 표현과 연결되었다. 장조와 단조에 관계없이 개개의 조성에는 각각 성격차이가 있어 그것이 인간의 심적인 상태, 감정의 여러 형태를 표현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C장조는 대담한 성질이지만 축제나 기쁠 때, F단조는 깊고 무거운 절망과 거친 치명적인 불안, 우울의 표현 등등이 있다. 여러 정서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면, "슬픔을 잦은 한숨으로 끊어지면서 천천히, 나른하고 졸리는 선율로 표현되어야 한다"라든지 또는 "증오는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는 거친 화음 및 그와 유사한 선율로 나타낸다"등이다.

17-18세기 중반까지 음악의 창작, 연주, 이론, 미학의 전 분야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던 감정이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 중요성이 퇴색하게 된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바로크 시대의 유형화된 감정 묘사는 주관적 감정 표현으로 대치된 것이다. 즉 감정의 서술 원리에서 표출 원리로 미학적 중심이 바뀌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바로크 시대의 종언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정이론은 바로크 시대의 성격과 깊은 연관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음악의 내용을 인간의 구체적 감정으로 규정하면서 헤겔은 이러한 바로크 시대의 기본적 견지를 수용하고 있다. 즉, 음악의 과제는 대상 자체(자연 현상, 자연적 사건, 사회적 사건, 갈등 등)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주관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헤겔은 음악의 주관성을 말하고 있다. 헤겔이 지적하는 예술의 특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감각적인 소리를 통한 정신적인 것의 표현이며, 이는 음악에 그대로 적용된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의 감각적 요소들과 그 다양한 형태들에 정신적인 것이 적절하게 표현될 때에야 비로소 음악은 참된 예술로 승화된다. 그 내용이 언어를 통해 구체적 이름이 발설되든지, 아니면 더 불분명하게, 음들, 화성적 관계, 정신을 활성화시키는 선율로부터 나와도 무방하다." 요약하자면, 헤겔의 미학은 바로크 정서이론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내용미학에 가까운 것이었고, 이는 예술 전체를 절대정신의 발현과정으로 보는 그의 전반적 미학관과도 깊은 연관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바로크 음악은 심사 숙고해서 만들어진 음악으로서 고전 양식이 사고의 비약에 힘입어 이루어진 음악으로 정의되기도 하고, 다이내미즘이 그 음악의 성격으로 나타나, 변화와 풍부함을 추구하며 그 결과 필연적으로 매너리즘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음악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바로크 양식은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허영심에 의해서 지나칠 정도로 추구된 장식법이나 묘기에 대한 선호가 배경이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바로크는 비현실적이고, 상궤를 벗어나 있으며, 대조성이 강조된 세계, 예를 들어 음 크기의 대조인 포르데(f )와 피아노(p )의 대비를 창조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된다.

이렇게 표현된 감정은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반화된 감정이었다. 그것은 음악적 모형 또는 착상이라고 불리 수 있는 것들을 모아 놓은 공통된 창고에서 체계적으로 규제된 어법에 의해 전달되었다. 바로크의 수사법(rhetorics)은 음악 역시 서론, 본론, 꾸밈, 강조, 결말 등의 순서를 따라 만들어진고 보았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 이론서들은 음악의 전개 방법을 수사학에서 사용되는 모형과 기법에 비유하였고 수사학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몬테베르디에서 바하에 이르는 바로크 작곡가들은 가사의 어떤 구절의 뜻을 강조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일정한 선율, 리듬, 화성, 성부짜임새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음악적 어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언어였다. 우리가 바로크 음악을 대할 때에 생각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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