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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Password * I agree to the terms of service Cancel Comment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0-26)" 본문에서 ‘한 알의 밀’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며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시기를 가리킨다.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헬라인과 같은 이방인까지 구원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땅에 뿌려진 씨가 썩어져서 나무에 생명을 주고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다. 우리들도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려면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보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하셨고 고린도 후서 5장4절에는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썩지 않고 죽지 않으면 생명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명언으로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死必卽生)’, 즉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하면 살 것이다.”는 말이 있다. 또 오자병법(吳子兵法)에서 “오자왈(吳子曰) ‘...필사즉생(必死則生) 행생즉사(幸生則死)...’ 즉, 오자는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요행히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오” 라고 말했다. 마태복음 16장 25절에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신앙을 지켜야 영생을 얻게 된다. 실재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던지는 대신 영혼의 영생을 택했다. 우리가 영생의 길을 가려면 먼저 자신이 성경적 근거에 의해 ‘생명’의 의미를 마음 판에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볼 때 문자 그 자체는 생명이 없으니 그 문자 안에서 생명을 발견해야하는 것이다. 이순신: “아직도 살고자 하는 자가 있다니,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정녕 싸움을 피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냐? 육지라고 무사할 듯 싶으냐? 똑똑히 봐라! 나는 바다에서 죽고자 이곳을 불태운다. 더 이상 살 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목숨에 기대지 마라!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고, 또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병법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의 적도 떨게 할 수 있다 하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을 두고 하는 말 아니더냐?” 영화 명량 중에서[1]
즉, 상관인 충무공의 명령을 어기고 도주하면 전투에서 패해서 왜군에게 죽기 전에 먼저 군율로써 죽이겠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상관을 신뢰하고 끝까지 죽음을 각오한 채 전투에 임한다면 싸움에서 이겨서 살 수 있다는 의미. 그러니까 쉽게 말해 죽어라 싸우면 내가 살려주겠다. 목숨을 아까워하는 놈은 나한테 죽는다.라는 연설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난중일기 원문에서도 바로 다음에 '군율을 어긴다면 용서치 않겠다'라고 하고, 전투 중 우물쭈물대는 안위와 김응함에게 니들 진짜 뒈지고 싶어? 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으므로, 농담이 아니라 저 해석 맞다. 3. 왜곡[편집]종종 이 문구와 같은 의도를 왜곡하여 보다 효율적인 방법이 있는 상황에서 비합리적인 선택을 정신론으로 정당화하거나 또는 억지로 개인의 의지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를 요구할 때 이를 합리화하는 의도로 쓰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세기 초반 프랑스 육군의 엘랑 비탈[3]에 영향을 잘못 받은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말의 대명사인 이순신부터가 자신의 연설에 처음부터 "병법에 이르기를"이라고 말했다. 곧 이 말의 출처는 병법이다. 병법이라는 게 원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군사 운용방식과 군사전술이론을 설명하는 것인데, 이런 병법에서 비합리적인 정신론을 주장할 리가 없다. 4. 성서[편집]구체적인 맥락과 의미의 차이는 있지만 신약성경 복음서에서 예수가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다.
5. 그 외[편집]후대의 레이테 만 해전의 사마르 해전에서도 일본 주력 함대에게 죽기를 각오하고 덤빈 4척의 구축함이 혈투 끝에 승리한 사건이 있어 근대판 명량 해전이라고도 한다. [1] 위 영상의 1:15 부터 나온다.[2] 충무공의 부대는 전사자보다 군율 및 군령 위반으로 처형된 사람이 더 많았다. 당시 충무공 휘하 장병들의 사망 원인 1순위는 전염병, 2위는 처형이고 전사는 3위였다고. 물론 이순신이 포악해서 처형이 많았다거나 한 게 아니라, 군기와 군율 유지에 그만큼 철저했고 그 결과 전투에서의 전사자 수가 극적으로 적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순신이 처형했던 병사들의 죄목을 보면 현대의 기준으로도 중형을 피할 수 없는 중범죄를 범한 경우가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물론 그 사정을 알고 보더라도 이순신이 처형한 수 > 일본군에게 죽은 수라는 게 상당히 기묘한 일인지라, 역덕후들이나 밀덕후들에게 '충무공 휘하 부대 사망원인 2위가 이순신', Execution(처형)에서 따와 'E순신' 등의 농담거리가 되곤 하는 소재. 충무공 휘하에서 전사자 수가 비상식적으로 적었음을 역설적으로 칭송하는 농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