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왕 계보 - peleusia wang gyebo

                  페르시아 고레스- 멸망까지의 연표

고레스왕 이후에 페르시아에는 10명의 왕이 있었고, 그 연대표는 아래와 같다.

1. 고레스[키루스 2세](주전 539-530; 30년)

2. 캄비세스 2세(주전 529-522; 7년)

3. 바르디야(6개월), 고레스의 동생이자 캄비세스2세의 동생으로,

                             실질적으로는 가우마타가 통치함.

4. 다리우스 1세[대왕] 히스타페스(주전 521-486; 35년)

5.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1세(주전 485-465; 20년), 유명한 에스더 왕비의 부군.

6.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주전 464-424; 40년)

7. 다리우스 2세(주전 423-405; 18년)

8.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므네몬(주전 404-359; 45년)

9.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오쿠스(주전 358-338; 20년)

10. 아르세스(주전 337-336; 1년)

11. 다리우스 3세(주전 335-331; 4년)

                                      페르시아의 역대 왕들

                               키루스 1세 [Cyru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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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7세기말에 활동한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테이스페스의 큰 아들이며, 키루스 2세의 할아버지이다. 안샨(엘람에 있는 수사의 북동부)을 지배했으며, BC 7세기 후반에는 동쪽으로 파르수마슈까지 세력을 뻗친 듯하다.

  그는 아시리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바빌론의 샤마시 슘 우킨에게 지원을 보냈으나(BC 651),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에게 엘람을 정복당한 뒤로는 아시리아의 종주권을 인정해야만 했다(BC 639경).

  키루스는 큰아들 아루쿠를, 공물과 함께 볼모로 아시리아의 니느웨이로 보냈다.

               키루스 2세 (재위 BC559~BC 529, 30년간)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캄비세스 1세의 아들.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또는 고레스왕이라고도 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어머니는 메디아왕국의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인데, 생후 곧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
  BC 559년 안샨왕이 되었으며, BC 550년 아스티아게스를 쳐서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그 도읍인 에크바타나로 수도를 옮겼다.

 
  BC 546년 리디아의 도읍 사르디스를 함락시켜, 소아시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다시 또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등 동방의 여러 지역도 평정하여 북방 유목민에 대한 방비를 굳혔고, 이번에는 바빌로니아로 전진하여 BC 538년 나보니도스를 무찔러 칼데아(신 바빌로니아)를 멸하였다.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 포로들이 이 때 해방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여기서 페르시아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만년에는 파사르가다이로 도읍을 옮겼다. 피정복지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신(神)을 인정하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마사게타이를 토벌하는 도중에 죽었다고 한다.

                    캄비세스 2세(재위 BC 529~522, 7년간)

  BC 525년 이집트를 정복했다. 키루스 2세 대왕과 아케메네스 가문의 딸 카산다네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왕(父王) 생존시에 캄비세스는 바빌로니아에 대한 업무를 관장했다. 그는 BC 538년 신년행사에서 바빌로니아 왕의 의례 진행을 맡았으며, 부왕이 마지막 원정에 착수하기 전인 BC 530년에는 바빌론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집트의 정복은 키루스 때부터 계획되었지만, 캄비세스가 이룬 주요한 업적이다.정벌은 이집트의 프삼티크 3세 때 이루어졌다. 캄비세스는 이 원정에서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또한 이집트군에 있었던 그리스의 장군 파네스로부터 귀중한 군사정보를 얻었고, 아랍족으로부터도 시나이 사막을 횡단할 때 식수를 공급받았다.

  나일 삼각주에서 있었던 펠루시움 전투(BC 525)에서 캄비세스가 승리하고 헬리오폴리스와 멤피스를 함락하자, 이집트의 저항은 끝났다. 이집트에 머물면서 캄비세스는 에티오피아와 아몬의 오아시스, 그리고 카르타고에 대한 원정을 계획했다.

  캄비세스는 직접 에티오피아 원정에 나서, 에티오피아 북부 지방을 합병했지만, 보급품 부족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테베에서 출발한 파견부대는 알하리자(하르가) 오아시스를 정복했지만, 아몬의 오아시스에 도착하기 전 모래폭풍에 휘말려 전멸했으며, 카르타고는 공격해보지도 못했다.


  BC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캄비세스가 이집트에서 벌인 잔학행위를 미친 짓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측 사료에 따르면, 그러한 비난은 대부분 근거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 캄비세스는 적어도 그의 통치 초반기에는 화해정책을 추구했다.

  후대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 대왕이 남긴 비문을 보면, 캄비세스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기 전에 그의 아우 바르디야를 남몰래 죽였는데(헤로도토스는 그의 아우를 스메르디스라고 불렀음), 그후 마기의 제사(祭司) 가우마타가 살해된 왕자로 분장해, BC 522년 3월 반란을 일으켜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캄비세스는 시리아에서 이 반란소식을 듣고, 이집트에 수비대를 남겨둔 채 황급히 귀국하던 도중, 시리아에서 BC 522년 여름 사고로 죽었는데,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다리우스 1세[대왕] (재위 BC522~BC 486, 36년간)

   페르시아명 다리야바우시. 흔히 다리우스 대왕이라고한다.

  제사(祭司) 가우마타는, 선왕인 캄비세스 2세가 동생 바르디아(스메르디스)를 죽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르디아라고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선왕은 이집트로 원정을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죽었으므로, 그와 동행했던 다리우스가 귀국하여 여러 제후와 함께 제사 가우마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크테시아스가 그의 즉위에 관해 쓴 글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분명히 비문을 따른 글이지만, 전설과 결합된 점도 있다. 예를 들면, 다리우스와 공모자들이 그들 중 누가 왕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그들의 말[馬]에게 맡겨 결정하기로 했을 때, 다리우스는 그의 마부가 속임수를 쓴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가우마타를 정통적인 계승자라고 오인한 제후들은, 다리우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2년간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다리우스는 이를 평정하여 제국의 기초를 확립한 뒤, 정벌의 상세한 기록을 비시툰의 산길 절벽에 새기게 하여,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BC 518년~BC 510년 인도의 펀자브 지방을 정벌하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도 평정하였으며, 국토의 북변을 자주 침범한 스키타이인(人)도 몰아냈다. 또 두 번에 걸쳐 그리스 본토에 원정하였는데, 첫번째는 사위 마르도니우스에게 지휘를 맡겼으나 중도에서 실패하였고, 두 번째는 마라톤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무장보다는 행정 조직가로서 후세에 명성을 남겼다. 광대한 영토를 20(23, 24, 28이라고도 한다)의 행정구인 사트라피(주 또는 방백령)로 구분하고, 총독에는 왕이 친히 임명하는 사트라프(방백)를 두어, 지방의 군사와 내정을 관장하게 하여 일정한 공물과 세금을 거둬들였다. 또한 중앙집화의 수단으로서 교통로를 건설하여 군용 및 통상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 역전제(驛傳制)와 사트라프 제도는 그 이후 오랫동안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통치제도로 답습하였다. 그리고 파르수아에 페르세폴리스를, 엘람 지방에 수사를 조영(造營)하여 여름과 겨울의 수도로 삼았는데, 규모의 광대함은 유적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1세

                          (재위 BC 486~BC 465, 21년간)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왕이라고도 한다.


  선왕 때부터 끌어 온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재위 3년째 되는 BC 483년부터, 아토스곶[岬]의 지협(地峽)에 운하를 만들고, 또 다르다넬스해협에 선교(船橋)를 가설하는 등 그리스 원정(제3차 페르시아 전쟁) 준비를 하였다.

  재위 6년째 되는 BC 480년 봄, 육해군을 이끌고 사르디스를 출발하여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살라미스의 해전에서 그리스군에 패배하자 급거 귀국하였다.

  재위 7년째인 이듬해 BC 479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대패하고, 나아가 미카레에서도 패배하였으나 페르시아 영토 그 자체는 빼앗기지 않아 국위는 여전히 융성하였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그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결과, 이때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때의 패배를 아케메네스 왕조 몰락의 시작으로 간주하지만, 당시로서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리스와의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의 패배에 불쾌해진 크세르크세스는,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에 틀어박혀, 이때부터 일찍이 무거운 과세로 긁어모은 막대한 자원과 부를, 그는 방대한 건설계획을 추진함으로써 국력을 더욱 소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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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의 재위 기간(1장 1절, 8장 9절)은 헤로도투스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페르시아 왕들의 역사에서는 유레가 없는 일이다.

 또한 아하수에로 제 3 년에 열린 대연회(1장 3절)의 기록도, 헤로도투스가 그의 책에, 페르시아 왕이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했다고 기록한 그 날짜와 시각이 일치한다.

 수산궁에 관한 묘사도(1장 6절) 고고학에 의하여 그 사실성이 입증되었다.

  아하수에로 왕이 제 7년에 새 왕비를 맞아들인 사실(2:16)은, '아하수에로가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후에 후궁(後宮 harlem)의 환락에 빠졌다'고 전하는 헤로도투스의 보고와 일치한다. 

                                            출처:톰슨성경 에스더서론의'역사성의 문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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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에는 왕궁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다가 하렘의 음모에 휘말려, BC 465년 그 자신이 장남과 함께, 그의 대신(大臣) 아르타바누스가 포함된 궁전의 살인집단에 의해 쓰러졌다.

    다른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아르타 크세르크세스[아닥사스다] 1세

                          (재위 BC 465~BC 425, 40년간)

  크세르크세스 l세의 아들. 부왕을 암살한 아르타바누스에 의하여 제위에 올랐으나, 얼마 후 그를 죽이고, 이집트와 박트리아 등의 난을 평정하였다.

  재위 17년째인 BC 448년, 칼리아스 협약을 성립시켜 아테네와의 화평에 힘썼다. 

  헤로도토스와 데모크리토스가 당시의 제국을 여행하여 그 지식을 그리스인에게 전하고, 또한 그리스 미술의 양식을 동방으로 전하기도 하여, 동서 문화교류로 왕의 치세는 고대 페르시아제국 융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기였다. 

  그러나 같은 해 BC 448년[재위 17년째] 키프로스섬 앞바다에서, 키몬이 거느리는 아테네 해군에 패함으로써 트라키아 등지에서 세력을 상실하게 되어, 그후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여 가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오른팔이 왼팔보다 길어 ‘롱기마누스(긴 팔)’라는 별명이 있다.

             다리우스 2세(재위 BC 423~404, 19년간)

   아르타 크세르크세스 1세와 그의 첩(妾) 바빌로니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원래 이름은 오쿠스였다.


   히르카니아 지방 사트라프(총독)를 지내다가 ,이복 형 세키디아누스(또는 소그디아누스)의 왕위를 빼앗고 그를 처형했다.
  

   노투스(서자)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는 다리우스라는 이름을 썼다.

  그의 치세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궁정은 음모와 부패로 가득 차 있었으며, 왕은 잔인하고 야심만만한 아내이자 이복 누이인 파리사티스와 환관들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히르카니아와 메디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했다.

   다리우스 2세는 BC 413년에 시라쿠사에서 아테네군을 무찌른 후, BC 448년부터 아테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의 해안도시들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소아시아 지방 사트라프인 티사페르네스와 파르나바주스를 시켜 밀린 공물을 거두어들였고, 아테네와 맞서기 위해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아테네와 전쟁을 한 후 이오니아 지방을 대부분 되찾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이는 스파르타군에게 제한된 지원만을 했던 티사페르네스의 정책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BC 407년 다리우스 2세는 스파르타군을 아낌없이 지원하기로 결정해, 티사페르네스 대신 자기 아들 소(小) 키루스를 소아시아 지역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스파르타 함대 재건에 필요한 자금을 아들에게 주었다.

  그결과 아테네는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미에서 참패했다. 그러나 얼마 후 다리우스는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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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재위 BC 404~BC 358, 46년간)

   교양이 높고 기억력이 뛰어나서, 그리스사람은 그를 무네몬(기억이 좋다)이라고 불렀다. 다리우스 2세의 장자이다.

   치정 초기에 동생 키루스(小)가 그리스인 용병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은 쿠낙사 전투에서 동생을 죽이고 그리스 용병을 패주시켰다. 이것이 그리스 용병 l만 명의 퇴각이라 하여,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Anabasis>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집트 원정에는 실패하여, 유프라테스강 이서의 땅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소아시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국내가 동요하고 궁정 안에서도 암살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이 불안 중에 아내와 자식이 잇달아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죽었다.


                    다리우스3세 (재위 BC 336~330, 6년간)

    왕가에서 갈라져나온 먼 친척이었지만, 전왕(前王)인 아르타 크세르크세스 3세와 아르세스를 독살한 환관 바고아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다리우스 3세가 환관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자, 바고아스는 그마저 죽이려 했으나 도리어 왕에게 사약을 받았다.

   BC 337년에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리고 있는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코린트 동맹을 결성하고, BC 336년초 소아시아에 선발대를 보냈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7월에 다리우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암살당했다.

   BC 334년 봄,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이 대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페르시아는 전쟁 태세를 전혀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라니코스 강에서 패배했다. 

  알렉산더는 이듬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한 후, 킬리키아까지 진격했다. 마침내 다리우스가 직접 출전했지만, BC 333년 가을 이소스에서 패배해, 어머니·아내·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후 다리우스는 알렉산더에게 화해하자는 편지를 2번 보냈는데, 2번째 편지에서 동맹을 맺어준다면 자기 가족의 몸값으로 막대한 재물을 주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 영토를 마케도니아에게 모두 넘겨주겠으며, 자기 딸을 바치겠다고 제의했다. 

   알렉산더가 이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자, 다리우스는 그가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을 건너게 내버려둔 다음 ,지금의 모술 동쪽에 있는 가우가멜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다(BC 331. 10. 1).

   그는 싸우고 있는 부하들을 버려둔 채 엑바타나로 달아났고, 알렉산더가 쫓아오자 다시 박트리아로 도망갔지만,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던 베소스에게 폐위당한 후 살해되었다. 이로써 페르시아제국은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