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공황 이유 - migug daegonghwang iyu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공포가 주식시장을 휘감았다. 이날 주가는 12내지 25포인트가 하락하였다. 

대공황은 이 날 미국 주식시장 붕괴로 촉발되어, 초기 3년간의 디플레이션과 이후 8년간의 장기경기침체기를 거쳤다. 

경기침체의 대표적 척도인 실업률은 제조업의 경우 1921년~29년에 7.7%를 기록하였으나, 1930~38년에 26.1%로 치솟았다. 은행은 대공황시기에 9000개 이상이 파산하였다. 

1929년의 디플레이션으로 비롯된 대공황은 현재 저성장에 빠져있는 우리나라의 경제에 시사점을 던져준다.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가설은 크게 △지출가설 △통화가설로 구분된다. 

(1) 지출가설 

지출가설은 투자가 경기변동의 동력이라는 가정 하에서 출발한다. 즉  대공황의 원인은 1920년대 말 미국경제가 과잉설비상태에 빠져 투자기회가 소진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투자부족은 지출감소를 초래하여 국민소득을 감소시킨다. (외생변수인 투자부족으로  소비함수가 밑으로 이동하여, IS곡선이 아래로 이동한다.)

이러한 투자부진의 원인으로  △1920년대의 호황 국면에서 나타난 불평등한 소득분배  △출생률·이민의 감소로 주택 건설 침체등을 들 수 있다. 

혹자는  1929년 주식폭락으로 인한 부의 감소가  소비를 줄이고, 다시 투자를 감소시켰다고 주장한다.

재정정책의 실패도 지출을 줄인 요인이 된다. 1930년대, 재정 지출이 줄어 소득이 감소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정치가들은 재정정책을 이용하여 생산 및 고용을 유지하기보다 균형예산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2) 통화가설  

통화가설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통화를 긴축한 결과, 대공황이 발생하였다는 주장이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통화공급은 25%감소하였다. 이러한 통화공급의 감소가 이자율을 높여, 투자감소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통화정책과 관련, 연준은 △1929년 주식시장의 위기 △1930년~33년의 은행위기에 직면하였다. 전자에 대해  통화긴축으로 대응하였고, 은행위기에는 공개시장매입으로 통화량을 늘려야 함에도 이를 방치하였다. 오히려 달러를 방어하기 위해 추가 긴축을 시행하였다. 

① 주식시장위기와 긴축 

1920년대 미국은 호황이었다. 라디오 자동차 전기등의 신기술의 보급은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장미빛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믿음을 주기 충분하였다. 이러한 미래 낙관적인 현금흐름에 대한 기대는 사람들을 주식시장으로 이끌었다. 1921~1929년간 주가가 4배 이상 증가하였다.  

주식시장이 점점 투기의 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연준의 통화량의 확대때문이었다. 당시 연준은 국채매입등을 통해 1921~1929년간 총통화량을 61.8%까지 확대하여 유동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풍부한 유동성은 해외 대부로 연결되어, 1차 대전 이후 피해보상 및 전후 복구를 위한 자금수요가 높았던 독일등이  차입을 늘렸다. 

주식시장의 과열을 진정시킨 것은 미연준의 긴축통화정책이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통화정책이 펼쳐진 것이다. 시장의 과열을 식히기 위해 1927년 가을에 시행한 연준의 통화긴축은 주식자금을 위한 신용대출을 축소시키고, 이자율인상으로 신규투자를 억제하였다. 이는  민간의 미래전망을 비관적으로 유도하였다. 

결국 1929년 10월 주가가 폭락하여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대공황 발생 후 3년간 미국은 GNP 50%, 실업 25%, 소비 40%, 투자 82%가  하락하는 격심한 디플레이션을 경험하였다. 

주식가치의 하락으로 부의 실질가치가 감소하여 소비가 줄었고, 소비자의 자산대비 부채비율이 높아졌다. 이는 소비자의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의 가중과 이로 비롯된 투자의 감소로 이어졌다.  

② 은행위기 

1930년의 은행위기는 공황을 심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은행위기란 은행의 자본잠식으로 인한 파산, 예금인출 쇄도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29~33년간 미국은행의 1/3이 파산하였다. 9000개 이상의 은행들이 영업을 정지당한 것이다. 그 원인은 실물부문의 불황이 기업 영업을 위축시켜 은행의 부실채권이 늘었기 때문이다.  

◆ 통화승수의 하락

은행의 위기는 통화량의 대폭 축소를 초래하였다. 이는  통화승수의 하락으로 인한 것이다. 은행위기는 민간이 현금을 선호하게 되어, 현금통화비율의 증가로 통화승수가 하락하였다. (통화승수는 본원통화 1단위 증가에 증가하는 통화공급량을 의미한다. 통화승수는 현금통화비율과 지불준비금비율의 증가로 감소하게 된다.)

또한 은행은 자금을 위험 회피적으로 운용하였다. 일부 은행의 파산을 지켜 본 다른 은행들이 예금대비 지불준비금 비율을 상승시켰다. 이처럼 법정 최저 지불준비금 이상으로 지불준비금을 증가시켜 통화승수가 하락하여 통화량이 축소되었다.  

◆ 통화량의 감소와 디플레이션

이러한 통화량의 감소는 디플레이션을 야기하여 대공황을 초래하였다. 

일부에서는 통화량의 축소에도 명목이자율의 상승은 발견되지 않아, 통화와 대공황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통화량의 축소는 부채디플레이션과 실질이자율 인상의 방아쇠가 되어, 경기침체를 초래하였다. 

△부채디플레이션=

당시에 물가의 하락은 자동적으로 경제가 완전고용수준으로 회복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피구효과가 있다. 고전학파 경제학자인 피구는 물가하락은 실질화폐잔고를 늘려,  「부의 증가 → 소비증가 → 지출증가→ 기업의 소득증가」를 유발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경기가 호황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물가하락은 경기를 회복시키기보다 침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부채디플레이션이 등장하였다. 

기대하지 못한 물가변화는 채권자와 채무자간의 부를 재분배하게 된다. 물가하락으로 채무자의 실질부채는 증가한다. 이로 인해 채무자의 증가한 부채는 채권자의 부를 증가시킨다. 이 경우 채권자와 채무자간의 부의 이동은 경제 전체 부의 변화를 야기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부채 디플레이션의 경우에도 경기는 하락될 수 있다.  이는 대리인 비용으로 설명된다. 대리인인 채무자와 주인인 채권자의 관계에서, 채무자의 순자산가치가 하락하게 되면 대리인비용이 늘게 되어, 차입자의 조달비용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는 채무자의 금융위기를 조장하게 되어, 실물경제의 침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 기대디플레이션과 실질이자율의 상승= 

통화량의 감소로 명목이자율이 오르지 않아도, 실질이자율의 인상으로 경기침체가 발생 할 수 있다. 

명목이자율은 실질이자율에 기대된 인플레이션을 가산한 것이다.  그러므로 통화량 감소로 물가하락이 기대된다면, 기대인플레이션은 음수가 된다. 따라서 「실질이자율= 명목이자율 - (-)기대인플레이션」이 되어 물가하락이 기대되면 실질이자율은 높아진다. 

실질이자율의 인상은 투자를 축소시켜, 지출의 감소와 소득의 감소를 가져온다. 그 결과 경기는 침체된다. (투자의 감소는 IS곡선을 아래쪽으로 이동시켜, 국민소득은 감소한다.  명목이자율은 감소하고 실질이자율은 상승한다.)  

결국 통화감소로 물가하락 디플레이션이 발생한다면, 물가하락 기대로 인한 실질이자율의 상승이 투자를 감소시켜 소득을 줄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 연준은 달러방어 

1931년 연준의 긴축정책은 공황의 심화를 가져왔다. 영국이 1931년 9월 영국이 금본위제를 탈퇴하였다. 연준은 달러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이자율을 대폭 인상하였다.  이로 인해 미국경제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처럼 1929년의 연준의 긴축정책이 대공황 발발의 직접적 원인이며, 1931년의 미국의 통화긴축은 경기침체 심화의 방아쇠가 되었다.  

그러므로 경제학자들은 그 당시 정치가들이 균형재정대신 적자재정을 편성하여 지출을 늘렸다면 공황의 정도는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통화당국이 은행 위기로 예금인출이 쇄도하는 기간 동안, 긴축대신 은행의 파산을 방지하기 위해 공개시장 매입으로 통화량을 늘렸다면, 대공황의 심각성은 완화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자료 

맨큐, 「거시경제학」, 2003

양동휴, ‘1930년대 세계대공황과 2008년 위기’, 2010

박종현, 「케인즈 & 하이에크: 시장경제를 위한 진실게임」, 2008

이헌대, ‘세계대공황의 원인과 경제정책’,1997

손명석, ‘대공황 사례로 본 현위기 진단 및 전망’, 2012

미국 대공황 이유 - migug daegonghwang iyu

사실 시장경제를 부인하거나, 반박하거나, 정부의 개입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는 예시가 미국의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인 거 같습니다. 자유방임주의가 국가, 더 나아가 전 세계의 경제를 파탄냈다는 것인데요. 제가 미국에서 역사를 공부했을 때도, 대공황은 자본주의자들의 탐욕과 자만의 결과인냥 묘사를 했습니다. 많은 중앙은행의 관료들은, 대공황이야말로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는 증거라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1930년 대공황이 오기 이전까지는, 미국은 일명 재즈 시대(Jazz Age)라 불리는 역대급 호황장(또는 으르렁대는 20년대, Roaring Twenties)이 있었어요. 그러면 대공황은 코인판처럼 역대급 호황장에 따른 역대급 하락장이 온 것일까요? 뭐, 시장의 자연스러운 호황(Boom)과 불황(Bust)의 사이클이라 보실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국 대공황 이유 - migug daegonghwang iyu

일단 후버 대통령에 대해서 알아봐야 합니다.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인 하버트 후버(Herbert Hoover)는 역사속에선 철저한 시장주의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파 정치인이기도 하고, 시장주의를 지지하는 공화당(Republican Party)소속이었기 때문인데요. 사실 이거부터가 굉장히 큰 오해입니다.

"모든 냄비에 치킨을!"

이라는 요란스러운 슬로건을 달고 경제대통령이 될 것을 약속한 후버 대통령은(최근에 구속되신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경제를 살릴 것 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경제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주범이 됩니다.

스무트 할리 관세(Smoot–Hawley Tariff)

경제학자 약 1,000명의 반대서명에도 불구(참 이럴 때 보면 전문가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요), 국내 상인과 농민들을 보호하겠단 선량한 목적으로 스무트 할리 관세를 도입하여 약 2만개의 수입품에 관세를 도입합니다. 이는 100년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관세였는데요. 덕분에 미국에 수입, 수출을 하던 국가는 수입과 수출을 절반으로 줄이게 됩니다. 외국도 보복관세를 내놨기 때문이죠. 결과로 미국의 총수출도 1929년 70억달러에서 1932년 25억달러로 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후버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 1929년도부터 1933년도까지 있었습니다.

미국 대공황 이유 - migug daegonghwang iyu

후버는 작은정부주의자?

아닙니다. 일단 후버가 취임하기 전까지 미국은 재정적으로 흑자를 기록했는데, 연방정부의 지출은 7억달러 였던 반면에, 세출액은 33억 달러였죠. 하지만 후버가 취임하고 몇 년 새에 재정지출이 약 40%나 급증하게 됩니다. 그래프를 보시게 되면 그 이후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정부 지출을 막대하게 늘리게 되는 뉴딜 정책에 비해서는 소규모(?)의 지출규모지만, 쿨리지 대통령 시절에 흑자였던 연방정부의 재정이 적자로 돌아갈만큼 후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 대비 정부의 지출액을 크게 늘렸던 대통령 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으론 전용덕 교수의 '후버 대통령의 경제정책 재평가’를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그는 각종 공공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는 '축소판’ 뉴딜정책을 펼쳤다. 1929년 그는 연방정부 건물 공사비에 약 4억달러 이상, 해운위원회를 위한 공공사업으로 약 1억7500만달러의 정부지출을 결의했다. 1930년 7월 국회는 약 9억1500만달러의 공공사업비를 의결했다. 그는 주 정부 차원에서도 공공사업 지출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후버댐, LA 수도교 등의 대형 토목사업이 후버의 작품이다. 후버 재임 4년간 공공사업을 위한 지출은 루스벨트에 비해 작다는 의미에서 축소판 뉴딜이라 불릴 만하지만 실은 후버 이전 30년간의 공공지출보다 많다고 한다. (전용덕, '후버 대통령의 경제정책 재평가’)

미국의 그 유명한 후버 댐 또한 후버 정권에서 시작한 야심찬 프로젝트 였습니다. 사실 후버 대통령은 후임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 비해서 덜 지출을 한 것 뿐이지, 전임 대통령들에 비하면 굉장히 많은 지출을 했던 대통령으로 평가받아야 맞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재건금융공사(RFC)를 만들어서 약 10억달러를 부실 기업들과 은행들에게 빌려주었던 것 역시 후버 대통령 이었습니다.

미국 대공황 이유 - migug daegonghwang iyu

연방준비제도의 과도한 통화팽창

많은 분들이 미국 중앙은행은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후에나 생겼다고 생각들 하시는데, 이는 틀린 주장입니다. 연방준비제도(The Federal Reserve)는 1913년 우드로 윌슨 정권일 때 만들어졌죠. 같은해에 소득세도 도입이 되었고, 국세청(IRS)도 설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시장주의자들에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만큼이나 국가주의적인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라스바드의 역작 미국의 대공황을 참고해보면, 미국은 중앙은행이 설립된 후, 통화량을 꾸준히 늘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즉 1920년대 지속적인 통화팽장으로 인해서 대공황의 씨앗은 싹트고 있었다는 것이죠.

맺으며

최근에 많은 분들이 시장실패를 외치며, 대공황을 그 예시로 들고는 합니다. 뭐, 시장이 실패한다는 말 조차도 사실 너무 애매모호 한 말입니다. 누군가의 사업이 도산하고, 파산하고, 하는 경우야 당연히 있습니다. 그리고 특정 기간동안 소비가 줄고, 투자가 줄고 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시장경제를 채택해서 모두가 잘 먹고 잘 산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이 실패하는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개인만이 행동한다'라는 공리를 무시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시장경제가 때때로 실패할 때가 있다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의 의견은 존중하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대공황이 시장실패의 예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욕하고 비판할 때 하더라도 사실관계는 명확하게 해야하는게 아닐까요?

론 폴의 말로 이 포스팅을 끝내겠습니다:

"우리는 시장을 탓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번도 제대로 된 시장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