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프럼 어스 해석 - maen peuleom eoseu haeseog

영화 '맨 프럼 어스' - 구조적 완성도가 돋보이는 수작

  • 2014.12.07 07:00
  • Culture/영화(Movie)

영화를 보는 제 주관적인 해석영화의 내용포함되어 있습니다.

맨 프럼 어스

리처드 쉔크만 감독, 데이빗 리 스미스, 토니 토드, 리차드 리엘 외 출연, 2007.


  레이니아입니다. 연극 덕분에 보게 된 영화, <맨 프럼 어스(Man from Earth)>입니다. 대개는 연극이 원작이고 영화가 2차 창작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 연극을 먼저 보고 영화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영화가 원작임에도 연극을 보고 영화를 봤는데요.

  제가 영화가 원작이라는 걸 몰랐던 이유도 있었고, 어쨌든 어떤 문화콘텐츠를 감상하기 전에는 해당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않으려는 제 고집(?!)에서 비롯된 이유도 있습니다.

  아주 예전에 연극을 좀 더 재미있게 보는 방법 부류의 글을 쓰면서 적었던 방법이기도 한 '사전 정보의 회피'는 제가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인 이유도 있으나 꽤 고집스럽게 지키는 원칙인데요. 이에 대해선 훗날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죠.

  오늘은 연극 <맨 프럼 어스>의 원작인 미국의 독립영화 <맨 프럼 어스>입니다. 영화를 보고 연극의 느낌이 바뀐 부분도 있으니 이번 포스트는 연극의 혹평을 먼저 감상하신 후에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연극과 영화의 실제적 차이

  시놉시스나 대부분 구성은 대동소이합니다. 연극 <맨 프럼 어스>의 모든 흐름은 영화 <맨 프럼 어스>를 철저히 좇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우선 영화와 연극의 실제적 차이[각주:1]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연극에서 괄괄한 여자 교수였던 린다와 그의 애제자(?!) 아트는 영화에서 아트 교수와 린다 학생으로 등장합니다.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잠시 들린 것으로 되어있지요. 연극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했던 이디스는 영화에서 신학자로 바뀝니다.

맨 프럼 어스 해석 - maen peuleom eoseu haeseog
(아트가 학생이 아니라 교수였습니다!)


  대사는 유사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이디스와 존의 대화에서 이디스의 대사가 연극에서 추가, 수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평균 연령대가 조금 더 높다는 것이 영화와 연극에서 볼 수 있는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섬세함의 차이

  영화 <맨 프럼 어스>는 연극에서 지적했던 부산스러움과 산만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연극보다 훨씬 오래전에 만들어졌지만, 극의 구성 자체는 훨씬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이는 섬세함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맨 프럼 어스>와 연극<맨 프럼 어스>의 차이는 위에서 보다시피 별다른 게 없습니다. 하지만 이 별다른 것들의 구조의 완결성을 바꿔버리는데요. 대표적으로 이디스의 위치입니다.

(이디스 교수, 그녀의 당위성은 그녀의 전공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디스가 미술사 교수가 되면서 고흐의 그림을 알아보고 연대를 추측하거나 질문에 함정을 넣는 행위를 훨씬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존과 이디스가 격렬하게 대립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앗아가 버립니다. 신학자인 이디스는 자신의 명확한 종교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존의 '유예된 사실'[각주:2]이 그녀의 세계를 뒤흔들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의견에 공격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미술사교수인 이디스는 어떤가요? 미술사를 가르치면서 종교에 편향된 시각을 가진 사람 정도로 보일 뿐, 그녀가 존의 이야기에 화를 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녀가 표출하는 분노는 무대 어딘가를 떠돌 뿐, 누구도 그 분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 말이죠.

(그녀에게 종교는 더욱 큰 의미였던 것입니다.)


  제가 '맥거핀'이라 비판했던 일꾼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에서 일꾼은 깊어지는 주제를 환기하면서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 작가는 희극적인 요소를 덧붙이며, 동시에 꽤 오랜 시간을 머물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오해할 수밖에요.

  영화를 봤다면 가볍게 웃고 넘길 소재였지만, 연극만 봐선 오해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위처럼 사소한 요소 하나가 영화와 연극의 인상을 갈라놓았습니다.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등장과 퇴장이 대사의 흐름을 잘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굉장히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신념과 종교에 대한 인간의 태도

  영화 <맨 프럼 어스>를 보면서 각 인물은 어떠한 정보를 접했을 때 이를 다양한 태도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각 인물의 태도는 일종의 유형화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보가 정보이니만큼 오롯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니 좀 더 세분화하자면 ‘상식을 넘어서는 정보를 수용하는 인간의 태도’를 유형화하였습니다.

(존의 이야기는 여러 사람에게 다양하게 전달됩니다.)


  존의 말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샌디[각주:3], 의심은 하지만 뭔가가 더 있다고 믿는 댄, 분노하며 인간적인 관계까지 끊으려는 아트, 흥미로운 유희 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해리, 순수하게 거짓이라 믿고 분노하나 용서하는 이디스, 그리고 격렬한 반응을 보여준 그루버까지요.

  이러한 다양한 반응이 결국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며, 동시에 종교에 대한 논쟁으로 특정 종교를 비판하는 힘을 이끌고 영화는 구조화됩니다. 인간의 모습과 종교에 관한 논쟁이 모두 맞아떨어질 때,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이 추리하면서 구조적으로 완성되는 것이죠.

(다양한 반응을 지켜보는 것도 영화의 재미입니다.)


  영화에서 누군가 ‘역사는 빈 공간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지도 구멍 난 것을 싫어하고 메우기 위해 ‘무의식적 추론’과정[각주:4]을 거치게 됩니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자연스레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 궁금해지는데요. 이 아리송함이 영화를 구조적으로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입니다.

  영화에서 존이 정말 구석기 시대에서 살아왔는지, 정말 그가 실제 역사적 인물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관객 역시 그 공간에서 함께 입증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공간으로 초대하는 것이 영화의 목적입니다. 종교에 관한 비판과 동시에 관객은 상식을 넘어서는 정보를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를 영화는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셨나요?)


  연극 <맨 프럼 어스>는 아직도 아쉽게 생각하지만, 영화를 봤다면 조금은 더 좋은 평을 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영화 <맨 프럼 어스>에 관해 적으면서 자꾸 연극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하게 되었는데요. 혹여나 이 글을 읽으셨다면, 부디 연극 <맨 프럼 어스>에 관한 글도 함께 읽으시면 좋겠네요.

  별다른 장치 없이 이렇게 구조적으로 잘 짜인 영화를 보는 건 관객으로서 무척 기쁜 일입니다. 연극 <맨 프럼 어스>에 감사해야 할 일이 늘었습니다. 이런 수작을 볼 수 있게 해줬다는 점에서요. 무척 흥미 있는 영화니만큼 꼭 찾아서 관람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영화 <맨 프럼 어스>에 관한 장황한 감상, 레이니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