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 야마 탈진 - kage yama taljin

카게야마는 교실 뒷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인사를 했다. 그의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 중에 누구 하나 카게야마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내지 않았다. 우중충한 쥐색의 교복이 좁은 문에 몰려 둑 사이로 잿빛 물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흘러가게 내버려두었다. 


작은 교습소였다. 카게야마는 그곳의 시간제 수학 강사였다. 배구를 하지 않는 자신이 무엇을 할까 상상해본 적도 없는데, 인간은 닥치면 살기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생물이었다. 배구 외에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었다. 공식을 풀면, 정해진 답이 나오는. 토스를 올리면 점수가 올라가는.


아이들이 전부 빠져나가고 잠시 고요한 정적이 오면, 카게야마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우중충한 회색 목도리를 목에 둘렀다. 몇 년 전 좋은 일의 기념으로 선물 받은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무거운 발을 질질끌고 교실밖으로 가면 원장이 카게야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헛기침을 하는 동작에 눈치없는 카게야마도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벌써 몇 번 겪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마지막이 아닐까.


교습소 밖으로 나가면 조만간 눈이 오려는 지 밤하늘이 한 겹 더 시커멓게 쌓여있었다. 별 것도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아직 밝은 빛이 쏟아져나오는 건물을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 오늘로 마지막이었지만 미련은 없었다. 


몇 블록 떨어진 마트까지 물 먹을 발을 질질끌고 들어가 부탁받은 생크림을 집어들었다. 별달리 더 볼 것도 없어 그것만 계산대에 올려둔다. 매번 규칙적으로 들러 항상 다른 것을 사가는 카게야마가 신기한지 말은 걸지 않고 흘끗 쳐다보기만하던 캐셔도 더 이상 이동네에 올 일 없으니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계산이 끝난 종이박스를 집어들었다. 이번엔 팔도 무거웠다. 이대로 조금만 더 걸으면 온 몸이 무거워져 땅 속으로 가라앉지 않을까, 조용한 희망을 한 번 읊조리지만 마트를 나와 몇 걸음 앞으로 향하다보면 커다란 경적 소리가 매번 카게야마를 불러 세웠다.


토비오.


카게야마는 서두르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던 잿빛 차에 탑승했다. 카게야마를 기다리던 오이카와가 그의 팔을 카게야마의 어깨에 두르고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렇게 떨어지고 나면 이미 카게야마는 안전벨트를 두르고 있었다. 


오늘은 어땠어?


뭐, 그냥요. 규칙적인 대답. 오늘은 정해진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잘렸어요. 카게야마는 뿌연 앞 유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안 봐도 뻔했다. 오이카와는 항상 꺼낼 수 없는 슬픔을 가득 담은 얼굴을 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품 안에서 생크림을 빼앗아 뒷 좌석으로 치우고 시동을 걸었다. 가자, 토비오. 


오늘은 까르보나라를 해줄게. 







====






그러고 보니 카레를 먹은 게 언제였더라.


애써 생각해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미 어제 뭘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옛날 일을 기억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었다. 오늘 저녁의 오이카와는 평소보다 조금 더 즐거워보였다. 대충 떠올리면 오늘은 면도 완벽했고 생크림의 농도도 완벽하다고 스스로 감탄했던 오이카와가 있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오이카와는 조금 더 들떠 보였다. 그날 저녁의 파스타는 미끈덩하고 눅진한 마르기 전의 콘크리트 같았었다. 어제 저녁도 그랬던가.



한밤중이었다. 탁상 위의 시계 초침이 똑딱이는 소리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이불 아래 단정하게 눈을 감은 오이카와가 보였다. 온통 검고 재투성이인데, 오이카와의 얼굴만 어둠속에서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종이에 그려놓은 듯한 반짝임이었다. 도저히 현실로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슬쩍 가까이 했는데, 들려야할 게 들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손가락을 그의 코 아래에 가져다 대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애를 쓰는 일은 몇 안되었지만 이번에는 오이카와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 애써보았다.


똑딱똑딱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째깍째깍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결국 울었다. 눈에서 온갖 쓰레기가 꽉찬 더러운 검은 물이 흘러내렸다. 






===






이와이즈미는 자기가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 줄 몰랐다. 

탈도 많았고 많은 것을 잃었어도, 들이 잘 극복해나가는 줄 알았다.


정말로 용서 못하겠어?


헛 숨을 들이삼키며 들키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카게야마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몇 년동안은 보지 못했던 그의 밝은 얼굴이었다. 






===






오이카와는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이와이즈미는 실신만 반복하던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장례식장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물이 담긴 잔을 입가에 가져가자 오이카와가 고개를 세차레 흔들었다. 참을 수 없던 이와이즈미가 뺨 한 쪽을 세게 때리자 그제서야 오이카와가 순순히 물을 들이켰다. 



왜? ...도대체 왜?



오이카와는 다시 한 바가지 눈물을 쏟으며 매달렸다. 이와이즈미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 했다. 오이카와도 알지 못하는 이유를 이와이즈미가 알 리 만무했다.



몇 시간이 흘러서야 탈진한 오이카와가 눈을 붙였다. 이와이즈미도 충혈 된 눈을 부비며 밖으로 나왔다. 이미 올 사람은 모두 떠나고 넓은 장례식장에는 그 만이 남아있었다. 향 냄새가 나는 방 한 가운데 몇 년간 본 적없는 말끔하고 생기있는 눈빛을 한 카게야마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함에 참을 수 없어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떨구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눈이 오고 있었다. 





벌써 닷새 째 오는 눈이었다. 너 죽을 때 엄청 추웠겠다. 위로로는 도저히 못쓸 말을 혀로 쓸었다. 카게야마는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건지 폭설이 오는 날 다리 위에서 강으로 쳐박혔다. 거센 눈보라는 다 큰 성인 한 명이 물에 풍덩 빠지는 소리도 지우고, 물에 잠시 떠있었을 색도 가려주고, 강물을 얼려 흔적을 지웠다. 결국 카게야마가 발견 된 건 오이카와가 하루를 꼬박 기다리고 실종신고를 넣은 바로 다음 날 아침. 카게야마가 완벽한 죽음을 손에 넣은 다음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눈꺼풀을 꾹 감고 손가락으로 주변을 꾹꾹 눌렀다. 더 이상 이 눈을 쳐다보기 힘들었다. 잿빛으로 쏟아져 내리는 눈송이가 죽은 후배의 눈동자 색과 닮아있었다. 카게야마가 잃었던 많은 것 중에는 생기가 도는 푸른 빛도 있었다. 




카게야마의 평생의 파트너라고 불린 작은 거인이 오이카와 다음으로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왜, 이유를 알지 못하고 맞이한 친구의 죽음에 그는 이와이즈미에게 매달리며 소리 질렀다. 오이카와에게도 매달리는 것을 몇 명이 달려들어 겨우 떼어내었다.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말할 수 있는 이유따위 없었다. 





===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 연락이 온 날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사고 직후 병원이었나? 이와이즈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무너져내리는 오이카와를 위해 병원에 찾아갔었다. 가장 후회하는 일들 중 하나였다. 연인의 사고로 무너져내리는 친구가 걱정이 되어 찾아갔을 때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심장이자 영혼을 잃은 사람을 그곳에서 보았다.




그런 그의 후배가 이와이즈미를 개인적으로 불러냈을 때 이와이즈미는 내심 기대를 했다. 오이카와는 많은 것을 잃은 그의 연인의 빈 속을 채우기위해 극심한 노력과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조금 어리숙하지만 솔직하고 기운넘치는 카게야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솔직히 기대했다. 그리고 그가 약속 장소에 나타났을 때 그런 기대를 가진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





-----의 잘못이라는 것 알고 있어요.

이와이즈미상도 알고 계셨죠?



-미안하다. 


-그래도 카게야마, 그 녀석도 미안해하고 있어. 너도 이제는 이해하고 있잖아. 



이와이즈미는 스스로가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 줄 몰랐다.

오이카와가 잘 해나가고 있는 줄 알았다. 카게야마가 많은 것을 잃은 날, 오이카와도 큰 것을 하나 버렸다. 배구를 버리고, 오로지 카게야마가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헌신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이와이즈미와 만나면 항상 행복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카게야마와의 일과 얘기로 다른 이야기를 꺼낼 정신이 없었다. 그 정도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우리는 이렇게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텅빈 눈동자가 털 끝만큼의 미동도 없이 테이블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숨을 들이켰다.



-정말...


-정말로 용서 못하겠어?






===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몸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팔랑이다 붉은 바닥 위에 앉았다. 

피웅덩이었다. 카게야마의 오른쪽 팔목과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하반신에서 나온 피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오이카와상.'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항상 이곳에서 만나 짧은 거리를 오이카와의 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들어가는 게 일과였다. 최근에 어쩔 수 없지 다퉜지만, 이번엔 먼저 사과할 생각으로 그에게 줄 선물도 준비했었다. 히나타가 추천한 것이었다.

흘린 물건을 찾아 눈을 굴리자 검은 세단의 바퀴가 눈에 걸렸다. 카게야마는 그제서야 자신이 지금 차에 치여 널부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치채지 못한 고통이 밀려들려온다.

오이카와가 보고싶었다. 카게야마는 몰려오는 그리움에 견디지 못하고 훌쩍이고 말았다. 




도와주세요.




이제는 시야가 흐릿해지며 졸음이 쏟아져왔다. 카게야마라도 지금 잠들면 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정도는 알았다. 카게야마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다시 한 번 더듬거렸다.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