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 juui injaga saengmyeongboda na-eumeu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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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 juui injaga saengmyeongboda na-eumeulo

◈시63:편 해석,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주를 찬양    시63:1~11    여러 설교 정리

오늘 본문의 표제에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그리고 11절에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었던 다윗이

‘유대 광야’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 때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 왕궁을 떠나 있을 때입니다.

시편 61편부터 시작된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광야에서 지은 시’는

이 놀라운 찬송인 63편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광야를 지나며 하나님을 바라보기 (1~7절)

▲1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나의 하나님’은 참으로 친근한 표현입니다.

(불경한 표현이지만) 젊은이들이 서로 연애할 때 ‘너는 내 것’이라 말합니다.

이와 같은 그냥 ‘하나님이여!’ 하면, 일반적인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지만

‘나의 하나님이여!’ 하면, 아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의 하나님을 부름입니다.

지구상 크리스천의 인구가 수 억이 넘지만, 신기하게도

밤에 달이 모든 사람에게 ‘저 달은 나의 달’이 되어주듯이

하나님은, 자기를 친밀히 사랑하는 자들 모두에게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평소에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은밀한 깊은 교제를 나누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지금 예루살렘 왕궁에서 쫓겨나게 되었을지라도

“하나님! 어찌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좌절하지도, 원망하지도,

항의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다 순응하는 것입니다.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다윗과 무리들이 도착한 곳은 마하나임입니다.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삼하17:24

이곳은 메마르고 곤핍한 땅이었습니다.

앞서 다윗은 그곳을 ‘땅 끝’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시61:2

다윗은 그 황폐한 땅이

오늘 하나님 앞에서 시련을 당해 도망가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유사하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오늘날 신앙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았지만

지금은 굳은 마음이 되어 갈망 없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간절함이 없기에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종류를 알 수 없는 영혼의 싫증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배어 있고

그 싫증과 나태함은 우리의 모든 삶에 스며들어 생명을 좀 먹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등불을 밝히고 진리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가요?

목마르게 주님을 갈구하는 눈물의 기도가 있는가요?

어두운 이 세상에 빛으로 살아가기 위해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사는가요?

또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로 나는 무엇을 하는데 주로 사용하는가요?

그것이 진정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까?

인생의 문제는 세상이 던져주는 문제지만

답은 세상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깊이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약4:8

하나님의 은혜 없이 메마르고 곤핍한 땅을 끊임없이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시인처럼, 가장 곤고한 때에 주는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고

영혼의 갈망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움 받아서

변화된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여러분 가까이 계셔서

어디에서든지 당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

마치 수술실에 들어가는 사람의 갈망처럼,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를 간절히 바라는 그 절규의 외침처럼,

나의 갈망, 나의 부르짖음이.. 본문의 다윗의 갈망처럼 되어서

본문의 다윗처럼 응답받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그리고 이렇게 응답을 받습니다.

시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중세 기독교 철학을 완성시킨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를 위해서 엄청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신학대전>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에게 얽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꿈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스야! 너 참으로 수고 많았구나. 내가 너에게 큰 상을 주고 싶구나.

무엇을 줄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에게는 오직 주님만 계시면 됩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2절,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이와 같이’는 1절에 연결되는 접속사입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함과 같이’

‘성소에서’

-성소는, 성전이나 성막의 성소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구별된 곳, 멀리 떨어진 곳’이란 뜻도 있습니다. *코데쉬

전자로 해석할 경우, 2절은 다윗이 과거의 시절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에 있을 때,

하나님과 함께 했던 때가 얼마나 좋았었는지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로 해석할 경우, 다윗이 지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런 의미에서 구별된 거룩한 곳에서, 즉 성소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예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시편이나 구약에 ‘성소’라는 말이 종종 나오는데,

꼭 성전의 ‘성소’라고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좀 더 확장해서, 유연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다윗이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광야 그곳이 ‘성소’인 것입니다.

일례로, 출3:5 ‘네가 선 곳은 거룩한(코데쉬)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같은 단어가 출3:5에서는 ‘거룩한 (곳)’이라 쓰였습니다. ‘성소’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표제도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지금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자기 앞에 모신 그곳이

바로 '성소'(거룩한 곳, 구별된 곳)인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성전' 개념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구약에서 ‘구원’이란 말이 나와도, 꼭 영혼구원이란 뜻이 아닙니다.

병고침, 기근에서 해갈, 적진에서 해방 등의 뜻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물론 2차적으로 ‘영혼구원’도 포함하겠죠.

2절에서 ‘이와 같이’ 간절히 주님을 찾았더니

그 결과가 3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3절,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생명인데,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 변함없는 사랑)이

그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나는 주님의 헤세드(언약적 사랑, 본문에 인자하심)가

내 생명, 내 물질, 내 가족, 내 명예, 내 커리어보다 더 낫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 인자하심(헤세드)만 내가 가진다면,

다른 것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 하나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면, 내 잔이 넘친다는 고백입니다.

앞서 다윗은 시62:2절에서도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다윗은 지금 2가지를 빼앗겼습니다.

그것은 왕의 자리와, 아버지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는, 그 빼앗긴 2개를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나보다 높은 바위' 즉 하나님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왕위보다, 아버지 라는 지위보다,

지금 다윗에겐 '하나님'이 더 급하고, 더 간절히 회복되기를 소원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왕위나 아버지 직분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었고

반면에 '하나님'은,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보다 높은 바위로 (하나님의 임재로) 나를 인도하소서'

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지금 본문 63: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주님의 헤세드의 사랑(인자하심)이라고

자기는 그 헤세드의 사랑을 가졌으므로, 그래서 만족하므로

지금 그같은 광야에 풍천노숙을 하고 있지만, 찬양할 수밖에 없다고

3~4절에서 그는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으므로, :3

자신의 평생 하나님을 송축하겠다고 결단합니다. :4

다윗은 참으로 기가 죽지 않습니다.

다윗은 지금 기가 죽어야 되는 상황입니다.

왕권도 뺏기고, 아들 교육도 잘못 시켰고, 일부 신하들도 배신해서 돌아섰고,

무엇보다 지금 마하나임까지 피신 와 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치면 신의주)

한 발짝만 더 밀리면, 이제 이방인 암몬이나 아람으로 망명갈 신세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주님을 송축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요, 기도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 응답하셨다는 믿음이 올 때,

현실은 여전히 암담하지만, ‘미리 응답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이 터지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만족한다’까지 얘기하고 있습니다.

※‘송축하다’는 단어는 인간의 편에서는 ‘무릎을 꿇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편에서는 ‘복을 주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손을 들다’는 것은 ‘하나님께 항복을 선언하는 것’이고,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놓겠다’는 결단입니다.

▲5절,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다윗은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것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는 것과 같이 만족스럽다고 고백합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의 문자적인 의미는 ‘지방과 기름’인데,

‘최상의 음식’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최고로 지금 만족한다, 더할 기쁨이 없을 정도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은, 다윗이 처한 현실을 보고서

‘네 꼬라지나 아십시오!’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절체절명의 환경에 처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3절에 주의 인자하심을 내가 가졌다,

그러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찬양하고, 진수성찬을 먹는 것처럼 만족한다는 것인데요.

이는 또한 그가 모종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아래 8~11절에 나옵니다.

▲6절,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당신 생각, 밤을 새워가며 당신 생각뿐'

'읊조린다'는 묵상한다 meditate 는 뜻입니다. 

'말씀'이란 단어는 원문에 없습니다.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을 묵상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다윗이 침상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칼을 겨누고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 일당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온갖 정성을 다했던 것을 떠올리면 한없이 서글펐을 것입니다.

또한 침상에서 아히도벨을 비롯한,

자신의 신하였다가 압살롬에게 붙은 사람들을 기억했다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대적과 배신자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이,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초래된 결과임을 알기에,

다윗은 그것을 묵상하며,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어쩌면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았으면,

다윗은 현재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와 주셨으므로, 지금 현재는

자기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날개 그늘'은 '보호'를 뜻합니다.

◑광야에서 누리는 승리의 확신 (8~11절)

▲8절,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7절에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머물겠노라’ 고백했던 다윗은,

8절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겠노라’ 고백합니다.

‘따르다’는 단어의 원 의미는 ‘달라붙다’입니다.

마치 우리의 몸의 살이 뼈에 찰싹 달라붙듯이 붙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은 그만큼 하나님과 동행하고픈 마음이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자신을 붙드신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의 ‘오른손’, ‘오른’, ‘오른편’ 등은 대부분이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사41:10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시60:5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9절,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절,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다윗의 대적들이 땅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죽고),

승냥이(여우 or 자칼)의 밥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히도벨과 압살롬의 마지막을 압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가다가 그의 긴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리고,

노새만 빠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요압장군의 부하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11절,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다윗이 백전노장이라서 그랬을까요?

지금 그는 전혀 주눅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전혀 기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반란이 일어나서, 왕권이 넘어갔고, 수도를 잃었으며

부하들과 백성들의 민심이 많이 압살롬에게 넘어간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으로 인하여, 나는 찬송하겠다고 합니다. :3

그리고 11절에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지금이 즐거워할 상황입니까?

다윗은 지금 전혀 상식적이거나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기도응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직 왕권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아직 예루살렘을 되찾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내 편이시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므로

나머지 모든 것은, 시간이 되면 차츰 회복될 것을 내다봄으로.. 느긋한 것입니다.

앞서 시61:5~7절에서도, 다윗은 기도응답으로, 왕권의 회복을 미리 내다보고

이렇게 찬양한 바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시61:5~7

이것이 <기도응답의 능력>입니다.

현실은 여전히 처량하고 황무하지만, 마음은 확신이 넘치며, 얼굴엔 생기가 있는 것이죠.

본문의 다윗과 비슷하게

링컨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남북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남군의 리장군은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워싱턴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펜실베니아주의 게티스버그를 향해서 밀어닥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 백악관에서는

링컨 대통령을 위시한 각료회의가 열렸습니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링컨 대통령만큼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각료 가운데 한 사람이 놀랍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각하, 지금 리장군의 군대가 게티스버그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미국 전역이 전쟁의 도가니로 변해버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께서는 어떻게 그처럼 침착하실 수 있습니까?"

그 물음에 링컨은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나는 어젯밤 늦게까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소.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오.

어제도 역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소.

의를 위해 싸우는 우리에게 승리가 있을 것임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데 우리가 두려워할 까닭이 무엇이겠소?"

링컨 대통령의 그 말에 모든 각료는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