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교수 상담 질문 - jidogyosu sangdam jilmun

얼마 전 지도교수님(제인 블로커, a.k.a. 죄인 블로커)과 구술시험을 앞두고 최종 미팅을 했다. 구술시험에는 별로 신경을 안썼는데, 내가 필기와 프로스펙터스 과정을 워낙 힘들게 치렀고 만족스러운 피드백을 받아, 이것과 비교하면 구술 즘이야 하고 지나치게 안심했었다. 그 날의 미팅을 통해 구술시험의 중요성과 함께, 이 후의 과정에 대한 보다 중장기적인 전망과 평가도 할 수 있었다. 이것을 마치고 "이번에야말로" 하며 꺼낸 주제가 있었는데, 첫 질문은:

"나는 졸업 후 북미 연구중심 대학에서 동시대 북미 미술사로 테뉴어가 되기를 바라는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언제부터인가, 늘, 그렇듯, 지도교수는 한아름 되는 to-do-list를 쏟아냈고--이를테면, 임용심사에 논문을 가져가면 "흥미있군요, 그 다음은 뭘 연구하실건가요?"란 진심 짜증나는 질문에 잘 대처하고, teaching experience에 대한 최근 아카데미 강박을 매우 견실하게 충족시켜 주고, 그리고 약 5년을 주기로 순환하는 북미 미술사학계의 관심 주제와 키워드의 변화상 속에서 장기간 "현역으로" 살아남을 거라는 기대감을 (환상을) 심어줄 것 등등등--"이상의 것들을 충분히 해낸다는 전제 하에, 비로서 너는 피말리게 힘든 경쟁을 치를 자격이 주어질거임"이란 조언을 들었다.

이게 힘든 질문은 아니었다. 지도교수도 잘 준비된 스크립을 읽듯 내게 조목 조목 항목을 설명해 주었으니까--늘 그렇듯이. 열심히 하라는 격려가 없지야 않았겠지만, 이 사람 특유의 절제된 감정과 프로페셔널한 태도는 간혹 무보수 법률조언가의 자문을 듣는 것 같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익히 들어온 것을 또 들어서였을까, 결국 다음의 힘든 질문을 마찬가지로 힘들게 꺼냈다:

"님이 지난 4년간 나를 알고 지냈고 내 기말 레포트, 플랜비 논문, 필기시험, 프로스텍터스를 꼼꼼히 읽은 논 당신이 볼 때, 만약 내가 연구대학 테뉴어 지원을 머뭇거린다면 당신은 나로 하여금 포기하지 말고 그 길로 가라고 자신 있게 권유할 수 있겠어요?"

참 힘든 질문. 또 고약한 질문. 만약 나에게 누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다른 방식으로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는 일을 한다),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하는 질문이다. 일종의, 양심 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타인을 책임질 수가 없으니까. 최소 청년기의 6년 (아마 약 90프로는 그 이상)을 써야 하는 이 일에서, 누군가의 졸업 후 진로결정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 이것만큼 큰 부담이 어디 있을까? 실제로 그녀의 한 과거 지도제자는 학과에서 쫓겨난 후 8년간 간혹 이상한 메일을 보내서 지도교수로 하여금 경찰에 보호요청을 하게 했다. 결국 프로페셔널로서 답변하기엔 매우 힘든 질문을 던진 셈인데, 그렇다고 친한 친구나 가까운 동료로 급모드를 전환해서--"we love you and you can do it!"--응원할 수 있는 가능성도 완벽하게 차단해버린, 그런 힘든 질문. 하지만, 때로는 이런 질문에 답을 주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지도교수와 제자의 관계일 때. 그 때가 그런 순간이었다.

지도교수는 그 질문을 듣고 희미하게 웃었고, 생각한 후 말했다. 난 두 개의 강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둘이 북미 잡마켓이 주목하고 원하는 부분들: 하나는 the global에 대한 비판적이고 매력적인 관점을 논문을 통해 증명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종종 터무니없게) 넓게 생각하고 비판하는 사고능력이 글쓰기에 두드러진다는 점. 두 번째 것이 과연 강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색인으로서 다양성의 측면을 보장한다 뭐 이런게 아닌 점은 일단 마음에 들었다. 또 그 두 번째 장점은, 지도교수가 보기엔 내가 스튜디오 미술 전공자로서 배양해온 독특한 방식의 사고회로인데, thesis를 세우고 글을 쓰기 보다는, 일단 글을 쓰면서 (혹은 글을 쉬는 사이) 생각하고 경험하는 속에 다가오는 흥미로운 것들을 계속해서 비판하고 섭취하고 반영한다는 것--형식적으로 패스티쉬한 특징. 그리고 지난 몇 년간 내 그런 성향을 눌러야 할지를 가지고 큰 고민을 했다고 한다.

지도교수가 보기에, 나는 연구주제의 발전단계에서 엉성한 논리구조로 인해 분산된 주의, 즉, 래빗홀과 같은 그런 부분에 빠지는데--"as we all do, but you, more than any"--이 때 보통 하듯이 발을 빼려고 노력하는게 아니라 몸을 아래로 굽혀서 굴을 파고 들어가서 뭐가 있는지 보려고 한다는 것. 그래서 가끔 목덜미를 잡고 방향을 고쳐잡아 주기도 했는데, 그게 결과적으로 제 시간 내에 박사를 마치는 데에 필수적인 부분이었다는 자평을 했다--음, 시간 내에 마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하면서. 다른 말로, 만약 내가 타고난 기질대로 논문을 썼다면, 이 프로젝트는 "10년, 12년, 도대체 얼마가 걸릴지 모를 거대한 주제에 더해, 계속해서 무언가가 추가되어서 점점 그 끝이 안보이게 될 것" 같았다란다. 그리고 "오늘날 그런 종류의 연구는 테뉴어가 되는데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다."

희미하게 뭔가 떠오르긴 했나, 한동안 계속 대화가 이렇게 이어지다가 내가 원한 방식의 강한 단언이 없어서 다시 물었다.

"음, 결국 아까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나에게 돌아오는 건가요?"

꽤 웃음이 이어졌는데 ("oh, it is very difficult, yes," said she), 그 힘든 질문에 길게 우회해서 답변한 이유는 다음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내가 판단하기에 너가 동시대 미술사로 연구 중심대학의 테뉴어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없었다고 생각했다면, 내가 자신하건데, 다양하고 복합하고 미묘한 피드백 과정을 거쳐 나는 너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유도해오지 않았을까 싶다. 결과적으로, 너는 현재 매우 강하게 그 가장 힘든 진로를 원하고 있고,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커미티도 너의 해당 진로에 건설적인 피드백을 주며 지지를 하고 있는데, 꽤 분명한 의견이 아닐까 (해석: 이 이상 분명하게 말하는건 힘들어 좀 봐줘.)"

지난 4년간, 지도교수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 속에는 이해도 오해도 있었고--고백하건데, 나의 부족한 hearing과 comprehension 능력이 키운 오해야말로 좌절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결과적으로 큰 가르침과 영향을 받아왔다. 이 사람은 여러모로 모델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책 What the Body Cost는 21세기 기술된 최고의 monograph 중 하나라고 생각해왔고, 주디스 버틀러의 Gender Trouble 말고는 지도교수의 책에 비견되는 시각 오브젝트와 gender-sexuality의 구축에 관계에 관한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장기간, 나는 그런 책을 쓰고 싶다 생각해왔다. 그리고 지난 약 1년간, 여러 시험을 치르면서 이 생각은 이내 지도교수의 책과는 다르지만 다른 차원에서 기능하는 결과물이 나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지도교수의 답은, 나로 하여금 이 기간 중에 내가 이 사람과 가져온 상호과정의 섬세한 의미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나에게 달렸다는 거군요." 그 이상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게 결코 쉬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크나큰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숱한 학생들이 지도교수 앞에서 다음의 말을 목구멍에 삼킨다: "결국 나는 안되는군요." 지도교수는 지금 10명의 제자를 두고 있고 (솔직히 돌았...), 그 중 절반은 장담하건데 졸업을 안할/못할 (I am deadely certain that 이 둘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것이다. 애초에,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조언들--6년차에 졸업하고, 트랜디한 세미나와 렉처 코스 프로포절을 준비하고, 출판 계약을 따내고, 논문 이 후의 방향을 제시하는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연구 논문을 유명 저널에 하나 내고--을 해 준 까닭이 있었다면,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진작에 "유도"되었을 것이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피드백은 격려 정도야."

격려의 단계를 지난 상태에서 바보처럼 격려를 바랬다. "A pivot from a student to a scholar," 긴 세션의 마지막에 지도교수가 한 말이다, "represents the long procedure you undertook." 공부를 시작하면서 처음 지녔던 희망이 그 후 6년간 점점 더 커다랗게 발전될 수 있었던 것, 그 자체가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할까? 이 마음을 캐논볼 애덜리와 조 자비눌의 공연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로 정리한다: "Mercy, Mercy, Mer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