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全州崔氏)
작품명 천 종 권 조각가 작품설명이 조형물은 전주최씨 문충공 군옥시조와 六세인 위정공 완산부원군 정남대장 七夕의 훈공과 八세인 충익공 완산부원군 만육(晩六) 양(瀁)의 충신은 불사이군이란 충절의 의(義)를 선양하자는데 있다.
<뿌리공원에 새겨진 전주최씨 유래> 전주최씨 시조 문충공 최군옥은 고려 선종조(宣宗朝)에서 추밀원 지사, 진현관 대제학을 지냈고 서기 1086년에 중국 송(松)나라 철종(哲宗)때 하례사신으로 입송(入宋)하여 그 나라 문하시랑으로 천거되어 봉직하였다. 6세(六世)인 위정공(威靖公)의 휘는 지(池)요 자(字)는 중연(重淵)이고 사명(賜名)은 칠석(七夕)이다. 정남이라는 훈장을 받아 정남장군이라고도 칭한다. 칠석(七夕)장군은 1390년에 대마도를 정벌한 날이 7월7일이어서 칠석(七夕)이란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이밖에 오위도총관, 서북면 도지휘사(지방장관)를 거쳐 완산부원군에 봉군되고 시호는 위정(威靖)이다. 8세(八世)인 최양(崔瀁)의 자(字)는 백함(伯函)이오, 호는 만육(萬六)이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생질인 만육은 서기1351년에 탄생하여 1424년에 서거 하셨다. 두문동72현(杜門洞七二賢)의 한분인 만육은 39세에 고려 문하찬성사,보문각대제학에 올랐으나 1392년4월 포은이 선죽교에서 장절하자 전북진안 중대산(팔공산)을 찾아 3년동안 은둔하셨다. 이태조가 영상의 자리에 불렀으나 불응하셨고 전록(田祿) 8백결도 사양하여 오직 불사이군이란 충절의 의(義)를 지키기 위하여 초야에서 생을 마쳤다. 전북진안군 백운면에 있는 유허비각인 구남각이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고 전주어린이 회관 향토 문화관에는 만육의 영정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성계가 저작하고 세종이 계술하여 규장각에 비치하고 만육후손에게 한권을 준 유명한 금감록이란 책은 오늘도 보존되어 있다. 晩六先生 遺詩 고려국(高麗國)이 망(亡)하니 불사이군(不事二君) 하시고저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셔 충신(忠臣)의 길지키셨으니 그 충절(忠節)은 일월(日月)과 더불어 영원히 빛나리니 우리 그 후예(後裔) 됨을 자랑삼아 높으신 뜻 세세손손(世世孫孫) 계승(繼承)하리라. ------------------------------------------------------ <김진우작가의 해설> 전주최씨(全州崔氏) 신라 1최,전주 3최 "최고집"의 주인공 최양 최대 명절 "추석"은 전주최씨 원시조로부터 비롯 조선조에 장원급제자 6명 배출 전주최씨(全州崔氏) 중앙화수회와 역사서적,백과사전등의 기록에 의하면 최씨(崔氏)는 우리나라의 성씨(姓氏)가운데에서도 오랜 역사를 가진 씨족(氏族)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계(上系)가 여러 계통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주최씨 역시 동본이지만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4파로 나뉘어져 있다.
숙종때는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 벼슬로 국방부장관)겸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신호위는개경의 수비 및 변방의 수비를 담당한 6위의 하나이며 경군(京軍)의 핵심 주력부대로 병력은 총7,000명 이었고 상장군은 신호위 최고 지휘관으로 정3품)을 역임하였고,완산부개국백(完山府開國伯)에 봉해졌다.
최균은 고려 인종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였으며 예의(禮儀)에 밝았다. 의종때 재신 최윤희(崔允儀)의 추천으로 합문지후(閤門祗侯:통례문의 고친이름으로 제사와 조례,의례를 맡아보던 관청의 정7품)를 지냈으며 명종때 소주주부(낭관 벼슬)를 거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정6품의 벼슬)에 발탁되어 내시(內侍)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1172년(명종2) 금나라에서 사신이 들어와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경위를 조사할때 접반사(接伴使: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임시벼슬로 정3품관 이상 임명)로 나가 경위 해명을 잘하여 명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이듬해 정조사(正朝使:정월 초하룻날 중국에 가던 사신)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鄭仲夫)정권의 토벌을 내세우고 서북사람들과 반란을 일으키자 동북로도지휘사(東北路道指揮使:외직인 동북지방의 벼슬로 1280년(충렬왕6)에 없앰)가 되어 조위총에게 동조하던 동북지방의 여러 성(城)을 회유하게 되었다. 최균은 화주(和州,영흥)에 들어갔다가 조위총의 부장이던 김박승(金朴升)에게 잡혀 살해되었다.최균은 글씨에도 뛰어나 초서,예서를 잘썼다.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정3품 장관)에 추증되고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문성공파(文成公派)는 고려 충숙왕때 문하시중(門下侍中:정사를 도맡아 보살피고 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을 지내고 후에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진 최 아(崔阿)를 시조로 받든다. 문충공파(文忠公派)는 동주최씨(철원최씨)의 시조 최준옹의 후손인 최군옥(崔?玉, 시호는 문충)을 시조로 받든다. 문충공파 시조 최군옥(崔?玉) 은 여러 벼슬을 거쳐 진현관 대제학(進賢館 大提學:진현관은 학식이 풍부한 문신들을 뽑아 학문을 연구하고 임금을 시종하게 하던 관전으로 집현전을 1298년에 고친것이며 대제학은 종2품 벼슬,제학은 정3품,직제학은 종3품)과 추밀원지사(樞密院知事: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군기등을 맡아본 관청인 추밀원의 장관)에 올랐다.
이어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내사문하성,중서문하성의 정2품 벼슬로 문하시중 다음 벼슬)이르렀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1품 품계)로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충공 최군옥(崔?玉) 은 고려 선종때의 문신으로 고향이 경상북도 상산(尙山:현재의 상주)인데 후에 전북 전주로 이주하였다. 최군옥(崔?玉)은 고려 중기 사람으로 전주최씨 문충공계의 시조다. 전주최씨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문충공계 전주최씨는 다른 전주최씨와는 다른 혈족(血族)으로 다른 전주최씨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살다가 도래(渡來)하였으나 문충공계 전주최씨는 한국의 토착(土着) 최씨라고 한다. 또 "문충공 사적"에는 "공의 휘는 군옥(?玉)이요 자는 경윤(景潤)이니 고려 선종 때 벼슬에 나가시고 유명한 선비 한익군(韓翼君)의 사위이시다. 벼슬이 추밀원지사 진현관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중국 송나라 철종 원우 원년에 사신으로 중국에 들어가 황제께 축하(大賀)를 올렸다. 그 때에 사마광(司馬光), 여송저(呂宋著), 범조우(范祖禹) 등이 정이(程?,1033년~1107년,호는 이천,시호는 정공 正公)를 천거하여 숭정전(崇政殿) 설서(設書)로 삼고 공을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천거하였다. 정이(程?,1033년~1107년,호는 이천,시호는 정공 正公)는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로 형인 정호(程顥)와 함께 주돈이에게 배웠고, 형과 함께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며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그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편집자주> 얼마 안가서 정이(程?)가 소철(蘇轍) 손각(孫覺)의 미움을 받아 모함으로 파직되어 돌아가게 되니 공께서 소철 손각이 저지른 일을 개진하여 잘못을 설명하므로 파직되어 환국하게 되었다. 그 때가 기사년 봄이었다. 공이 귀국하니 대현진사(大賢進士)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 품계의 벼슬이 주어지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하여지니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공의 큰아들 최송년은 전주 소년 3최 중의 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아 중의대부(中議大夫) 밀직사사(密直司使)에 올랐으며 6세손 위정공 최칠석은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서북면 도지휘사가 되시어 두 번째 완산부원군에 봉해지니 거족(巨族)으로 번창하여졌다." 라고 적혀있다. 최군옥(崔?玉)의 큰아들 최송년(崔松年)은 중의대부(中議大夫:고려때 정4품 문관 품계)로 밀직사사(密直事司:정령을 출납하고 궁중의 숙위와 군기에 관한일을 맡아본 관청의 종2품 벼슬)을 지냈다. 한편 최송년은 등과(登科)하기 전인 서기 1127년(인종 5) 완산군수(完山郡守:종4품 벼슬) 박춘령(朴椿齡)이 시문(詩文)으로 완산군내 소년들을 시험보게 하여 뽑을때 최척경(崔陟卿),최균(崔均)과 함께 뽑힌 세칭 "전주3최"중의 한 사람이다. 그때의 기록에는 이들 "3최" 모두가 문영공(文英公)최언위(崔彦僞:868~944)의 후손이라고 했다. 최언위(崔彦僞)는 신라말 고려초의 문신으로 최치원,최승우와 함께 "신라 3최"로 일컬어졌다. 최언위는 885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과(文科)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고 귀국하여 고려초에 태자사부(太子師傅:태자의 스승)등을 지냈다.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를 통해서 잘 알려진 신라와 발해의 "웃자리 다툼사건(席次爭事件)"은 당시 남북국(신라와 발해)의 첨예한 대립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당나라에서 있었던 두나라 외교관,유학생의 경쟁관계에서도 확인된다. 이때 최언위는 당나라에서 외국인들을 위해 설치한 빈공과(賓貢科)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다.당시 빈공과 시험에는 발해와 신라인들이 서로 경쟁했다고 한다. 875년 발해의 오소도(烏昭度)가 신라의 이 동(李同)보다 높은 점수를 얻고 수석을 차지하자,최치원은 이 사건이야 말로 "일국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며 치욕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906년에는 신라의 최언위(崔彦僞)가 오소도의 아들인 오광찬(烏光贊)보다 상위에 합격하자 당에 있던 오소도가 자기 아들의 순위를 최언위보다 올려 달라고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했던 사건도 있었다. 신라 3최중 한사람인 최언위의 빈공과 상위 합격은 신라인의 자존심을 지킨것이고, 아울러 외국인의 콧대를 꺾어 버린 통쾌한 사건이었다. 일본 승려 원인(圓仁,엔닌)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신라인들이 발해와 싸워 이긴 날을 기념하기 위해,8월15일이 되어서 1백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3일 동안 밤 낮으로 춤과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는 사실이다. 한민족의 <추석명절>이 여기서 비롯되었으며,이로써 더욱 추석 명절이 성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전주최씨(全州崔氏)가 중국 청하에서 살다가 도래했다는 설(說)이 있는 것과는 달리,문충공파(文忠公派)는 한국의 전통적인 토착 최씨(崔氏)라고 한다. 그러나 통설은 전주최씨는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3세손 문영공(文英公) 최언위(崔彦僞:868~944)의 자손으로 이해하고 있으며,다만 족보에 의한 연결은 중간계대(系代)의 실전으로 문헌 발굴 이전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문영공(文英公)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원시조(原始祖)이며,문영공을 통하여 득성시조인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로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최씨상계세보>에는 최순작을 시조로 받드는 문열공파와 최균을 시조로 받드는 사도공파는 최치원의 후손이고,최군옥을 시조로 받드는 문충공파는 동주최씨(철원최씨)의 시조인 최준옹의 후손으로 나타나 있다. 기록에 따르면 1678년(무오년 戊午年) 겨울, 전국의 전주최씨(全州崔氏) 각 종파 대표자 10여명이 공주(公州)의 계룡산 동학사에서 모임을 갖고,최씨(崔氏)의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전주최씨의 대동보(大同譜)를 만들기 위한 토론을 하였으나,세대가 분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족보를 통합하는 것은 윤리를 그르치는 것이라 결론지어 통합을 못하였다고 한다.그러나 그때 모임에서 같은 조상에서 나누어진 후손임은 틀림없으니 비록 고증은 못하였으나 "<같은 조상의 후손임을 후대에 전(傳) 하라>"고 하였다. 한편 문열공파(文烈公派)는 예의판서공파(禮儀判書公波),판윤공파(判尹公波),양도공파(襄度公波), 지평공파(持平公波) 등 6개 지파로 나뉘어졌고,
문충공파는 군수공파(郡守公波),현령공파(縣令公波),절도사공파(節度使公波)등 8지파로 분파되었고 사도공파(복야공파)는 완성군파(完城君波),판서공파(判書公波),총랑공파(摠郞公波)로 나뉘어졌다. 전주최씨(全州崔氏)의 뿌리는 경주 6촌의 돌산(突山)고허촌장(高墟村長)인 소벌도리(蘇伐都利)이지만,뒤의 계대(系代)가 확실치 않아 고려때 크게 활약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시조로 받들며 전주최씨(全州崔氏)라는 씨족(氏族)으로 뭉쳐져 있다. 4파의 선조가 전주(全州)에 봉군(封君)을 받는 등 인연으로 전주(全州)를 근거지로 가문을 창립했으나 서로 간의 관계는 확실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동보(大同譜)는 내지 못하고 있으나,종친회 활동은 함께 하는 등 동성동본(同姓同本)의 우의를 다지고 있다.
전주최씨(全州崔氏)는 고려시대에 예부시랑(禮部侍郞:정4품벼슬.차관)을 지낸 최균(崔均)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벼슬) 최보순(崔甫淳),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 벼슬)를 지낸 그의 증손 최성지(崔誠之),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정3품 벼슬로 이조판서의 예전이름)를 지낸 최 재(崔宰)와 같은 명신(名臣)들을 배출하여 가문을 빛냈다.
강종 2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문하부의 벼슬로 왕에게잘못을 고치도록 간하는 임무를 맡음 후에 사의대부로 바뀜)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과거시험의 감독관으로 지공거의 다음 벼슬)를 지냈으며 고종9년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재신반열)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의 감독관 즉 시관(試官)으로 타관이 겸직했음)를 겸했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2품 벼슬)에 올라 판병부사(判兵部事:고려때 시중이나 평장사 같은 재신급이 겸하던 병부의 으뜸벼슬)를 지내 명성을 떨쳤다. 이듬해에는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수문전은 고려때 학자가 왕에게 학문을 강의 하던곳 태학사는 종2품 벼슬)와 동수국사(同修國史:사관(史館)의 2품 이상의 벼슬이 겸임함)를 역임하고, 1226년에 감수국사(監修國史:사관(史館)의 으뜸벼슬인 시중이 겸임)로서 수찬관(修撰官:승지가 겸하던 춘추관의 정3품)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등과 함께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했다. 1228년에는 수태사판이부사(守太師判吏剖事:판상서이부사로 상서이부의 으뜸 벼슬로 재신(宰臣)이 겸임)가 되었다. 최윤개(崔允愷)는 최보순(崔甫淳)의 아들로 상서우승(尙書右丞:상서도성의 종3품 벼슬로 우승이라함)에 올랐다. 성품이 강직하여 집권자이던 최의에게 아부하지 않았는데 최의가 그의 성품이 검소하며 공평한 것을 알고 우부승선(右副承宣:고려때 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밀직사(密直司)승지의 옛 이름으로 승선.부승선의 통칭 정3품)에 임명하여 이부(吏部),병부(兵部)의 인사권을 장악했으며, 후에 어사대부(御史大夫:시정에 대한 논술,풍속의 교정,관리에 대한 규찰을 맡아보던 어사대의 으뜸 벼슬로 정3품)와 추밀원사(樞密院使: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의 숙위를 맡아보던 추밀원 종2품)에 올랐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귀국하여 즉위한 후에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종2품 벼슬)와 대사헌(大司憲:사헌부의 종2품)에 이르렀으며 이어 첨의평리(僉議評理:첨의부의 종2품벼슬 참지정사가 고쳐진것)등을 거쳐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 벼슬)에 올라 추성량절공신(推誠亮節功臣)에 책록되고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져 부자(父子)가 재상반열인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는 충숙왕때 일부 원나라 세력에 의해 고려에서 입성(立省)책동이 벌어졌을 때 김정미(金廷美),익재 이제현등과 함께 원나라에 상소하여 입성론(立省論)을 잠재우기도 했다. 그는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원나라에서 배워온 역수(易數)의 학(學)은 고려의 학계(學界)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는 충숙왕때 과거에 급제하고 지평(持平:사헌부의정5품 벼슬)이 되었다. 충목왕때 정치도감(整治都監:각 도의 논밭을 관리하던 관청)이 설치되어 각 도의 양전(量田:논밭을 재는것)이 실시될 때 판관(判官:종5품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어 전법정랑(典法正郞:고려때 6조의 하나인 형조의 예전 명칭으로 정랑은 전법의 정5품 벼슬)을 거쳐 지흥주사(知興州事)로 나갔다가 인정승(印政承)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충정왕 때 지양주사(知襄州事)로 있다가 원나라 강향사(降香使:강향사는 원의 황제가 각 관아나 절에 의식용 향을 내려줄때 보내는 사람,이들은 암행어사 처럼 금패를 차고 다녔고 고려 출신의 '예수보카라'는 사람이 행패를 많이 부렸다함)가 존무사(存撫使:도에 파견한 지방관으로 그간의 안렴사를 제찰사로 바꾸고 강릉도,평양도에 존무사를 설치함,공민왕 후기에 도순문사가 관장함)를 욕보이는 것을 개탄,벼슬을 버리고 귀가했으나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감찰장령(監察掌令:고려때 사헌대의 나중 이름 장령은 정4품의 벼슬)에 특진되었다. 후에 감찰대부(監察大夫:고려때 어사대가 고쳐진것 정3품 대간이 으뜸 벼슬)를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이조판서와 같음 고려때는 정3품 장관)에 올라 5년뒤에 완산군(完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그의 아들 최용각(崔龍角)은 충숙왕때 학행과 충절(忠節)로 문명이 높았으며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고려때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아,대제학은 종2품),검교대호군(檢校大護軍:검교는 명예직으로 대호군은 대장군이 바뀐 명칭 종3품)을 역임했다.
남대문(南大門)은 태조7년에 세워졌는데 당시 경기도관찰사이던 그가 감역(監役:역사(役事)를 감독하는것)했다는 상량문(上樑文:집을 지을때 마룻대를 올리는것이 상량이며 상량문은 상량하는 것을 축하 하는 글)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최사규(崔士規)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 벼슬)을,최사강(崔士康)은 우찬성(右贊成:의정부의 종1품 벼슬)에 올랐으며 최사용(崔士庸)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벼슬)를 지냈다.
공양왕 2년에는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한때 유배되었고 1392년 조선개국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정3품 벼슬)로서 경기우도수군절제사(京畿右道水軍節制使:절도사 밑의 수군을 통솔하던 벼슬)가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진안의 팔공산에 은거하였으며 3년후에 전주 대승동 봉강리에 퇴거(退居)했다. 이성계가 만육을 친구로 대우하여 전록(田祿) 800결을 하사했으나 이 역시 거절했다.(아래 인물탐구 참조)
최덕지(崔德之)는 문성공(文成公)의 현손으로 태종 5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식년마다 보던 과거 즉 3년마다 보던 정기 과거시험)에 급제한 후 추천을 받아 사관(史官:역사를 기록하던 고려때의 수찬,검열등의 벼슬)이 되었고, 뒤에 3사(三司:삼사 즉,홍문관.사간원.사헌부)의 벼슬을 역임하고 남원부사(南原府使:정3품 외관직)가 되었다가 사퇴하였으며 문종이 즉위하자 예문관직제학(藝文官直提學:예문관은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던 관청 직제학은 정3품)이 되었으나 노령(老齡)으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아버지인 최 담과 형인 최광지(崔匡之),최직지(崔直之),6촌 형제인 최구지(崔久之)가 모두 제학(提學:홍문관.예문관의 종2품,규장각의 종1품 벼슬),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 벼슬)에 올라 세칭 <5 제학(提學)의 집>으로 불렸다.
인조 3년 부제학(副提學:왕의 자문 및 문한의 처리,경서와 사적의 관리를 담당한 삼사의 하나인 홍문관의 정3품 벼슬)이 되어 대동법(大同法:현물로 바치던 공물을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던 법)의 시행이 재론되자 그 선행조건으로 호패법(號牌法:열 여섯살 이상의 남자가 차던 패로 성명과 태어난 해의 간지를 쓰고 뒷면에 관아의 낙인을 찍었음)의 실시를 주장,호패청(號牌廳)의 당상(堂上:당상은 벼슬의 계제(階梯)를 이르던 말로 문관은 통정대부 이상,무관은 절충장군 이상 품계)이 되어 이를 관장했다.
1637년 우의정(右議政:의정부의 정1품 정승)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의정부의 정1품 정승)이 되어 사은사(謝恩使:우리나라에 호의를 베풀었을때 중국에 가던 사신)로 심양(瀋陽)에 가서 포로의 석방과 척화신(斥和臣:주전론을 펴서 잡혀간 신하)의 귀환을 교섭하고 다음해 귀국하여 영의정(領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에 올랐다. 1645년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어영청도제조(御營廳 都提調:조선시대 3군문(三軍門)의 하나로 군영인 어영청의 정1품)를 지냈다.
다음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정1품이 맡던 왕의 친척을 관리하며 친목을 꾀하던 관청)에 전임했다가 서기 1701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領議政:의정부의 정1품 정승)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그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당쟁 속에서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서 파란을 겪으며 전후 여덟 번의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인물로 특히 유명했다. 1710년에는 영의정(領議政)으로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提調:대궐안에서 필요한 의약을 맡던 관청의 으뜸 벼슬로 도제조는 정1품관이 겸임)를 겸했고,뒤에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중추부의 종1품벼슬)를 지냈다.
소론(少論) 4대신(大臣)의 한 사람으로 경종조에 소론(少論)정권이 수립되자 우의정(右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이 되었다. 경종3년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官)으로 숙종실록(肅宗實錄)의 편찬을 주재하고,다음해 좌의정(左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이 되어 형제가 나란히 이름을 날렸고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임진왜란때 스님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8도의 승병(僧兵) 총수가 됐던 서산대사(西山大師)휴정(休靜:1520년~1604년,이름은 최여신,자는 현응,호 청허.별호는 서산대사.백화도인.풍악산인) 또한 전주최씨(全州崔氏)가 배출한 인물이다. 사명당(四溟堂)의 스승이기도 한 서산대사(西山大師)는 불도(佛道)의 연구와 수련에도 높은 경지에 이른 고승으로 그가 남긴 선가귀감(禪家龜鑑)등의 저술은 오늘날까지도 불가(佛家)수행의 지침서로 쓰인다.
인조반정후 사인(舍人;의정부의 정4품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 벼슬)에 이르렀으며 이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종2품 외관직으로 감사)에 올랐다. 인조 5년에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투옥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전주최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06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3년마다 실시됨)에 68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348명,의과에 2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4명 등 6명의 장원급제자를 포함하여 무려 52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주최씨는 우리나라 최씨의 약 18%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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