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쿠데타 당시 계급 - jeonduhwan kudeta dangsi gyegeub

12.12사건은 신군부세력의 권력 장악 하극상[박성제]

입력 1995-12-03 | 수정 1995-12-03

[권력장악 하극상]

● 앵커: 전두환氏 등 신군부 세력은 12.12사건이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하면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충돌이였다고 주장해왔습니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결과는 12.12가 군권을 찬탈하고 장차 국가 권력까지 장악하려는 음모의 시작이였다는 것으로 신군부의 주장을 뒤엎고 있습니다.

박성제 기자입니다.

● 기자: 12.12는 하극상과 반란으로 얼룩진 창군 이래 최악의 사건이였습니다.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계급이 소장이였던 전두환氏는 보안사 요원들을 시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참모총장을 권총으로 위협하고 강제 연행했습니다.

준장이였던 최세창 3공수 여단장은 자신의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했습니다.

대항하던 정병주 장군은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전두환氏와 쿠데타 세력들은 또 국가방위의 중추인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무력으로 점령했고 끝까지 국방부를 지키던 병사를 살해했습니다.

노태우 9사단장은 국가안보를 외면하고 전방에서 서울로 병력을 빼돌렸습니다.

군인이라면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온갖 하극상이 하룻밤 사이에 한꺼번에 일어난 것입니다.

게다가 전두환氏는 이 모든 과정에서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의 재가를 무시함으로써 국가권력무력화에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당시 전氏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조사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16년이 지난 지금 밝혀진 사실들은12.12가 이른바 하나회로 대표되는 정치군인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장차 5.17 계엄확대로 이어지는 정권장악 음모의 시작이였음을 명백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MBC뉴스 박성제입니다.

(박성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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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플러스

    [한국강사신문 이미숙 기자] 오늘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서막, 암호명 ‘생일집 잔치’, 12.12 군사반란” 편이 방송된다.

    전두환 쿠데타 당시 계급 - jeonduhwan kudeta dangsi gyegeub

    [사진출처=KBS]

    1979년 12월 13일 아침,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박정희 대통령 피살 당시 김재규와 공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그를 체포한 사람은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다. 소장이었던 전두환이 대장 정승화를 불법적으로 체포한 군(軍) 사상 초유의 하극상이자 군사 반란이었다. 전두환은 왜 정승화를 체포했고 어떻게 권력을 쟁취하게 되었을까? 제5공화국의 서막을 알린 12.12 사태에 대해 낱낱이 알아본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의 HOT DEBUT!

    전두환 쿠데타 당시 계급 - jeonduhwan kudeta dangsi gyegeub

    [사진출처=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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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KBS]

    전두환이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10.26 사건 중간 수사 발표를 위해서였다. 당시에도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가지고 있던 그는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등장이었지만 사실 물밑에서부터 차근차근 권력의 중심으로 향하는 단계를 밟고 있었는데... 5·16 쿠데타 당시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띄었던 전두환,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정계 진출 제안까지 거절하며 군에 남아 충성을 보인 전두환은 군 내 박정희를 위한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권력 쟁취 행보를 이어간다.

    하나회의 수장 전두환의 리더십(?)

    전두환 쿠데타 당시 계급 - jeonduhwan kudeta dangsi gyegeub

    [사진출처=KBS]

    전두환 쿠데타 당시 계급 - jeonduhwan kudeta dangsi gyegeub

    [사진출처=KBS]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생들로 구성된 군 내 사조직 ‘하나회’. 전두환이 소속한 육군사관학교 11기 생들부터 지속적으로 모인 이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던 기반에는 본인들만의 독특한 ‘엘리트 의식’이 있었다. 날고 기는 엘리트 장교들 사이에서 사실 그는 우등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이 조직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여러 능력들 중에서도 특히 ‘정치 감각’ 때문이었다는데..

    작전 암호명 ‘생일집 잔치’ 전두환의 군권장악 시나리오

    전두환 쿠데타 당시 계급 - jeonduhwan kudeta dangsi gyegeub

    [사진출처=KBS]

    전두환 쿠데타 당시 계급 - jeonduhwan kudeta dangsi gyegeub

    [사진출처=KBS]

    10.26 사건 이후 본인들의 입지가 줄어들 것을 걱정한 전두환과 하나회. 위기의식을 느낀 이들은 사전 모의를 통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작전을 전개하고자 한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체포와 동시에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내야 하는 작전. 정승화 체포 조가 정승화 총장의 공관에서 무력으로 정승화를 체포하는 동안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한다. 촌각을 다투던 작전 상황 중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가 바로 떨어지지 않는데.. 결국 불법적으로 정승화를 체포해 반란군이 된 이들! 긴박했던 작전 상황의 과정을 하나하나 좇아본다.

    군사 반란 이후 펼쳐진 반란군의 진짜 ‘생일집 잔치’

    전두환 쿠데타 당시 계급 - jeonduhwan kudeta dangsi gyegeub

    [사진출처=KBS]

    전두환 쿠데타 당시 계급 - jeonduhwan kudeta dangsi gyegeub

    [사진출처=KBS]

    군권을 모두 장악한 신군부 세력. 민주화를 열망하던 민중들에게 다가온 것은 또 다른 독재 군부세력이었다. 성공적으로 군사 반란을 마무리 한 전두환과 반란군은 이후 신년행사에서 연예인까지 동원한 화려한 파티를 연다. ‘충격적인 군사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며 자축하는 전두환. 이들의 추악한 면모들이 담겨져 패널들의 공분을 일으킨 영상의 정체가 밝혀진다.

    또 다른 유신 정권으로 변형되어 시작된 독재 정치. 1월 26일 화요일 밤 10시 <역사저널 그날> “전두환 정권의 서막 암호명 생일집 잔치, 12.12 군사 반란”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저널 그날 - 기본정보 : '역사'와 '이야기'의 만남. 우리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가 바뀐 결정적인 하루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역사가 움직인 터닝 포인트인 '결정적 하루'를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교양과 재미가 있는 인포테인먼트(정보 오락) 프로그램이다. 그날의 주연과 조연은 누구였으며, 그 당시 세계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고, 오늘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출연진이 수다로 풀어보는 본격 역사 토크쇼이다. 프로그램 정보, 공식영상, 회차 정보, 출연진 등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지식 다큐멘터리 방송이다.

    *정승화는 1929년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증조부와 조부모, 부모 슬하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광신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1947년 7월 조선경비대사관학교 제5기생으로 입학하여, 1948년 4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소대장과 중대장을 지낸 후 1950년 6·25전쟁 개전 직후 대대장에 보직되어 1951년 9월까지 기계-안강전투, 영천회전, 원산전투, 영흥-함흥-성진진격전투, 현리지구 철수전투 등 각종 대소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사단 작전참모, 미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육군대학 교관 등을 거쳐 1956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연대장을 지냈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12사단 부사단장으로 있으면서 사단장과 함께 쿠데타를 지지하였다. 이후 2군 작전처장을 거쳐 그해 8월에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1962년 7월부터 방첩부대장을 지냈다. 1963년 민정 이양 선거 당시 군의 부정선거를 철저히 감시하여 군내에 야당후보의 득표가 높아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듣기도 하였다. 1965년 7월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불편한 관계로 예편의 위기에 몰렸으나, 1966년 말 육군참모총장이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교체되자 소장으로 진급하여 국방부 인사국장을 지냈다. 이때 불교신자 장병들을 위한 군승(軍僧) 제도를 도입하였고, 육군종합행정학교를 창설하여 초대 학교장을 지냈다. 이후 제1야전군 참모장,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을 거쳐, 1973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3군단장을 지내고 1975년에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육사 교장으로 있을 때, 사관학교 졸업 후 5년 근무한 장교를 행정부 사무관으로 특별 채용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1977년 12월에 제1야전군사령관이 되어 1978년 5월에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79년 2월에 제22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육군의 인재 육성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10·26사건)이 발생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12월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하극상 사건(12·12사건)에 의해 날조된 죄목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불명예 전역을 당했다. 1981년 3월에 사면 복권되었고, 1997년에 재심판결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고 계급과 명예가 회복되었다. 1987년 대통령선거 당시 민주당 총재인 김영삼 후보를 돕기 위해 잠시 당 고문을 맡기도 하였으나, 김영삼 총재의 국회위원 전국구 1번 제의를 사양했다. 1999년 12월 성우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저서로는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2002)가 있다.

    *12.12 군사반란 : 10·26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 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참고자료 : 정승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2·12사태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