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 - ilbon gugbo 1ho mileugbangasayusang

일본이 자랑하는 보물은 무엇일까? 우리는 교토, 나라, 오사카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일본인의 자랑인 보물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혹시 교토 광륭사(廣隆寺, 고류지)의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일본 광륭사 책자에도 어김없이 국보 제1호라고 자랑하고 있다. 또 많은 이들이 그에 감탄한다. 특히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야스퍼스는 이 불상을 보고 크게 감동한 나머지 “고대 그리스 신(神)들의 조각과 로마 시대에 만든 수많은 조각품은 아직 완전히 인간적인 냄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불상은 지상에서 모든 시간적인 것의 속박을 초월해서 이루어 낸 인간 존재의 가장 맑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의 표상이다”라며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과연 그럴까? 오래전부터 이 불상을 보고 싶었으며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을 두루 섭렵한 야스퍼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직접 눈으로 확인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광륭사를 찾았다.

광륭사 ‘목조미륵상’과 한국 국보 제83호 ‘금동미륵상’이 닮았다?

2009년 7월 18일 아침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회원들과 서둘러 이 목조미륵보살반가상(木造彌勒菩薩半跏像,이하, 미륵상)이 있는 교토시 서부 우즈마사거리에 있는 광륭사를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광륭사로 들어가는 길은 그저 한적한 도시 변두리란 느낌이다. 절은 자동차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길옆에 붙어 있어 우리가 찾았던 다른 절들 곧 청수사, 금각사 등에 견주면 고즈넉한 산사 느낌은 전혀 없다. 또 동대사, 법륭사 등 규모가 큰 절에 비해 광륭사의 첫인상은 그저 소박한 절이라는 느낌뿐이었다. 국보 제1호를 소장하고 있는 절치고 명성에 걸맞지 않게 한적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절의 정문인 남대문(南大門, 仁王門)으로 들어가자 바로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는 강당(講堂)이나오고, 강당 뒤쪽으로 들어가면 성덕태자를 모신 상궁왕원태자전(上宮王院太子殿)인 본당(本堂)이 있으며 그 뒤로 미륵상을 전시해 놓은 영보전(

일본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 - ilbon gugbo 1ho mileugbangasayusang
)이 보인다. 700엔의 입장료를 내야 하는 이곳은 역시 사진촬영은 못 한다. 덴표(天平)시대에서 가마쿠라(鎌倉)시대까지의 불상, 불화, 미술 공예품, 고문서 등이 다수 보관되어 있어 미술학도라면 한 번쯤 들어가 볼만하다는 영보전. 여기 있는 미륵상은 1951년 6월 9일 일본문화재위원회에서 국보로 지정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본의 국보는 1호, 2호. 3호 식으로 매기지 않기 때문에 광륭사 불상은 한국의 숭례문처럼 그저 조각품 중 맨 먼저 등록했다는 의미밖에 없다.

한국의 웬만한 마을에는 미륵이라 불리는 돌부처가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과거 우리에게 ‘미륵’은 친근한 존재였다. 그 까닭은 새로운 세상을 약속한 미륵신앙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던 민중들에게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 향나무를 바닷가 개펄에 묻어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다.그것은 그때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침탈에 고통을 받던 민중들이 침향을 정성으로 준비하여 자신들을 구원해줄 미륵이 오기를 비손하는 뜻이었다. 묻은 향나무가 수백 년이 지나면 침향이 되고, 침향이 된 뒤에는 ‘서해에서 용이 솟아오르듯이’ 스스로 물 위로 떠오른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앙의 미륵보살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도솔천에 살며, 석가가 죽은 지 56억 7천만 년 뒤에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구한다는 보살. 반가 곧 오른발을 왼쪽 허벅다리 위에 얹고 생각하는 모습의 보살. 영보전에들어가서 다른 불상은 아예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미륵상을 찾기에 바빴다. 여기에 온 목적이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지상에서 가장 순진무구한 불상, 그리스, 로마 조각상이 풋내 나는 것이라면 광륭사 미륵상은 지상, 천상 최고의 조각품” 한마디로 이 이상 논하면 되레 불경죄로 벌을 받을 듯한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한국에서 예까지 와 1,400년을 미소 짓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이 불상을 보려고 한국인들은 불원천리 서울에서 오사카 간사이공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전철 타고 버스 갈아타기를 수차례 끝에 불상과 마주한 것이 아닌가? 미륵상의 수명을 고려한 것인지 촉수 낮은 희미한 영보전 안 깊숙한 중앙에 미륵상은 은은한 미소로 참배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나 극찬 된 얼굴인지라 찬찬히 올려다도 못 본 채 무릎 꿇어 하염없는 눈물만을 흘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마음의 눈물을 닦아야 했다.

광륭사 측에서는 참배객을 위해 미륵상 앞에 좁다란 다다미를 2미터쯤 깔아 놓고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게해놓았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참배객 중 중년 여성은 소리 내어 울기도 하였다. 아! 우리를 울리던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저 미륵님은 일본 땅 눅진 곳에서 한국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미륵님의 얼굴을 찬찬히 살핀 뒤 뇌리에는 하나의 작은 의문점이 생기고 말았다. 이 미륵상이 한국 국보 제83호와 똑같다고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몸체나 닮았을까? 얼굴모습은 다르게 보였던것이다.

이 불상을 보고 간 많은 국내외 학자들, 연구가들, 사진가들…. 심지어는 언론까지도 가세해 모두 한결같이“꼭 닮았다”를 외쳤던 탓일까. 얼핏 보면 닮은 듯하지만 닮지 않은 구석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영보전을나온 것이 한 달 전 일이다.

교토에서 돌아와 나는 이 미륵상에 대한 국내의 반응을 조사해보았다. 이곳에 다녀간 한국의 누리꾼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한국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불과 “꼭 닮았다”를 연호했으며 이 말들은 이곳저곳 누리집을 드나들며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선일보사에서 나온 이 미륵상에 대한『일본 속의 한민족사, 2008』책에는 다음과 같은 찬사의 글이 있다.  

“웃는다. 입만 웃는 것이 아니다. 얼굴 전체가 웃고 있다. 웃으려고 의식한 것이 아니다. 삼매(三昧)에 몰입하면서 느끼는 환희로 기쁨이 마음에 넘치면서 얼굴이 환하게 피어난 것이다. 조각한 것이 아니다. 적송 그나무속에 들어앉아 삼매의 희열이 바깥으로 배어나면서 완성된 모습이다. 합장하고 가슴 두근거리며 바라다보아도 전혀 인위(人爲)를 감지할 수 없다. 전혀 구애됨이 없는 천연스러움이다. 순수 무구한 지락(至樂)의 형상을 저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도 그럴 일이다. 어느 누가 감히 이 미륵상을 두고 한국의 국보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감히 내가 언급할 정도가 안 된다. 이렇게 감동을 하고 있으니 어찌 그 누가 손사래를 칠 수 있으리오.

또 한편의 글을 보자. 이 글은 문화재 관련 기사를 쭉 써왔던 동아일보 이광표 기자의 글이다.

“일본의 대표적 국보인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백제관음상’과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 ‘목조(木造)반가사유상’. 이들 두 목조불상은 삼국시대 때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백제관음상은 이름에 ‘백제’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반가사유상은 얼굴과 전체적인 모습이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83호)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지금으로선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우리 것이라는 뚜렷한 증거가 거의 없다. 물론 앞으로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될 수는 있지만. 우선 호류지 백제관음상을 보자. 백제에서 만들어졌다는 물증이 거의 없다. ‘백제’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우리쪽으로 해석한 경우다. 대표적 백제불상인 서산 마애삼존불 왼쪽 협시보살의 얼굴과 비슷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은 다르다. 유달리 길고 늘씬한 몸매에 길쭉한 얼굴은 백제풍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중국 수(隋)나라 불상에 가까운 편. (중략)

이 기자는 강우방(불교미술사) 경주박물관장이 문제의 이 목조반가상을 우리 반가사유상의 모작으로 본다고 운을 떼었다. 모작이기에 삼국시대 양식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모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목조불상이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삼국시대 불상이라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 두 불상도 ‘백제 신라의 영향을 받은 일본 작품’으로 보아야 하며 학문세계에서 국수주의보다는 지적 엄격성이 우선돼야 함을 일깨워준다는 강우방 관장의 말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기자는 강우방 씨의 논거를 들어 자신도 백제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일본학자들이 흔히말하는 “고대 한반도보다는 중국 영향이 크다”라는 것을 그대로 따라주는 것일까? 한국의 불상들이 중국과간다라 불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명백히 그것들과 다르다. 분명히 간다라 불상 다르고 중국, 한국, 일본 불상은 사람이 다르듯 특히 그 얼굴이 각각 다른 것이다.

일본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 - ilbon gugbo 1ho mileugbangasayusang

하단메뉴로 이동

1.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 신라 · 가야인들

4)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 신라 · 가야인들

◆ 쌍둥이처럼 닮은 두 나라의 불상

용산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본적이 있나요? 머리 위에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 관을 쓰고, 눈을 지그시 감고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이 불상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와 쌍둥이처럼 닮은 불상이 일본에도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국보로 교토의 고류지(광륭사)에 있는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이 불상을 보고 “이 불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그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있는 예술미의 극치이다.” 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두 나라의 불상이 이리도 닮을 수 있을까요?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일본에서는 나지 않은 적송(붉은 소나무)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 불상이 닮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랍니다.

일본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 - ilbon gugbo 1ho mileugbangasayusang

삼국 시대,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문화재청)

일본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 - ilbon gugbo 1ho mileugbangasayusang

일본, 목조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일본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 - ilbon gugbo 1ho mileugbangasayusang
일본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 - ilbon gugbo 1ho mileugbangasayu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