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자형 도시 단점 - gyeogjahyeong dosi danjeom

격자형 도시 단점 - gyeogjahyeong dosi danjeom
오늘날 도시가 아무리 규모가 크고 복잡하다 해도 도시를 만드는 기법은 본질적으로 고대나 그 이전 시대의 도시와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심지어는 고대에 사용되던 방법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격자형 패턴의 도시계획이다.

역사적으로 격자형 도시계획이 나타난 것은 B.C5 세기경이었으며 밀레투스(Miletus) 출신의 히포다무스(498 B.C-408 B.C)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소아시아에 위치한 밀레투스(475 B.C)를 비롯하여 아테네 근처에 위치한 피레우스(Piraeus, 470 B.C-그림) 등에 마치 그물을 씌우듯이 격자형 도로 패턴을 채용하여 도시를 만들어갔다.

말 그대로 선 하나하나는 도로가 되었으며 도로로 인해 구획이 생기고 각 구역에는 도시가 필요로 하는 공공시설과 주거지역 및 종교지역 등이 배치되는 아주 간단하고 명쾌한 도시 만들기였다. 하긴 그가 살고 있던 B.C 5세기가 페르시아 격퇴에 따른 그리스 고전시대의 시작이었으며 이후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황금시대로 이어지면서 여기저기에 식민도시를 건설할 때였으니 어찌 보면 신속하고 관리가 용이한 도시 만들기 기법이 필요했을 법이다.

격자형 도시 단점 - gyeogjahyeong dosi danjeom

그러나 격자형 도시계획은 단지 도시라는 공간에 줄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수많은 그리스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히포다무스도 도시계획가나 건축가 같은 엔지니어 이전에 철학자이자 기상학자, 수학자, 물리학자이기도 했으며 국가의 통치이념을 고민하던 정치가였음을 생각해 보면 격자형 도시계획 패턴은 새로운 시기를 위한 이상적인 정치 패러다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그는 격자형 도시계획을 통해 장인과 농부 및 군인으로 구성된 1만여 명의 시민이 공적 공간, 사적 공간 및 신성 공간으로 명확히 구분된 도시에 각자 역할에 충실하게 거주할 수 있는 이상적인 도시국가를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계획은 당시의 자연 순응적이고 비계획적이던 기존 도시와는 달리 기하학적 질서와 규칙성을 보장받았으며 급기야는 사회적 질서와 합리성의 표현으로서의 새로운 도시라는 칭송까지도 받게 되었다.

물론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격자형 도시계획이 출현하게 되자, 그리스 반도의 해안가나 구릉지 이곳저곳에 등고와 지형을 따라 아기자기한 집들과 공터 혹은 아고라들이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게 자리하던 당시 도시의 모습은 그 경관의 아름다움이나 삶의 여유와는 별개로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도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도시의 이상(理想)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히포다무스가 비록 도시계획의 아버지로 불리고는 있지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격자 속에서 자유와 자연스러움이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 마냥 허우적거리고 있는 한 꼭 그리 칭송만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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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서양의 격자형 도시공간 구조와, 우리나라의 격자형 도시공간 구조를 비교 분석하였다.

서론

1.도시의 개념
도시는 인간의 문명이 싹트기 시작한 오래전부터 이미 존재해 왔다. 최초의 인간은 사냥과 채취를 주요 생계수단으로 하면서 정주 형태는 가족 또는 종족단위로 물과 식량을 찾아 이동하는 형태였다. 이러한 정주형태는 인간이 가축을 사육하고 식량을 재배, 수확, 저장하는 방법을 거치면서 사회조직의 세분화가 이루어 졌으며, 이 과정에서 사회조직을 지배하는 통치계층과 생산품을 교역하고 거래하는 상인계층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변천은 취락의 형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어느정도 사회조직과 체계가 갖춰진 도시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 도시구조의 변화
역사적으로 문화의 발상지나 문화가 융성했던 도시는 계획도에 의하여 건설된 예가 극히 드물다.그들은 누적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으며, 주민들의 생활양식에 따라 불규칙한 형태를 취하면서 성장하였다. 따라서 이들 도시의 성격은 동적(動的)인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대제국에 의하여 건설된 중앙집권적 도시나 식민도시는 통치기관에 의하여 미리 계획된 형태를 따랐으며 그 형태는 규칙적이고 도시의 성격도 정적(靜的)이었다.
문명의 흐름과 더불어 도시의 형태도 변화되어간다. 불규틱한 형의 도시가 정치 경제 사회가 변화됨에 따라 점차 기하학적인 형태로 개조되는 경우가 많으며, 비형식적인 형이 격자형 도시 위에 중합되어 계획되기도 한다.
그러면 다음에서 그리스, 중국, 우리나라의 도시공간 구성에 대하여 비교하여 보자.

· 본 론

1.그리스 시대의 도시 공간구조
그리스의 자연적 조건은 해안선이 복잡하고 산지가 많으며 평지는 분산적이어서 각 지역이 분립하여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스 도시의 가장 큰 특성은 민주적 성격을 띤 자치도시로서의 성격이다. 이러한 고전적 민주체제가 도시계획에 구체화된 것으러 도시광장인 아고라(Agora)나 격자형 가로망이 있다. 아테네를 제외한 거의 모든 그리스의 폴리스는 1만명 내회의 소규모로서 성벽에 의해 도시부와 전원부로 구분되어 있었다. 도시부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엇으며 중앙 외측에는 Acropolis라는 구릉 위에 종교건축군을 이루어 종교적 중심이 되게 하였으며 시가에는 아고라라고 부르는 광장이 있어서 회의, 재판 및 사교 등 시민의 생활무대가 되는 다목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아고라의 위치는 도시의 주입구와 아크로폴리스 입구 사이에 배치되었고 중요 간선도로가 이것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고라의 크기는 모든 시민이 시장에 어거나 혹은 근처의 공공건물에 공용으로 온 사람 등을 수용학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아울러 아울러 주요간선도로는 아고라를 교차하느니보다는 이것에서 로단(路端)이 배치되었는데, 이것에서 광장이 보행인 교통과 동선을 위하여 보류되었던 사실을 볼수 있다.
그리스는 활발한 해외무역의 개발과 더불어 주요 식민도시에 체계적인 도시계획방식을 적용시켰다. 히포다무스는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나 이집트의 도시에서 시작되었던 격자형 도로망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대부분의 신도시의 계획이 이와 같은 도로 형식에 따르고 있다. 이전의 대부분의 자연발생적인 구도시가 왕궁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격자형 도시구성은 시민이 평등하게 전면도로에 면하게 되며 또한 기하학적 정연성의 요구를 크게 충적시켰다. 주요 도로도 일상 교통에 필요한 폭 이상으로 제사의 행렬이나 전승(戰勝)행진등에 지장이 없게 넓게 만들어 졌다. 대부분의 도시민 주택은 폐쇄형으로 중정(中庭)을 향해 배치되었고 거리에 면하는 벽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리스의 도시규모는 대개 인구 1만~1만5천 내외였으며 과잉인구는 지중해 연안으로 진출하여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다. BC 7,8세기에 형성되어 거의 200여년 동안 에게해 근방에서 서부유럽쪽으로 퍼져나간 그리스의 식민도시들은 그 규모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정연한 체계와 질서로 인해 후대 도시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식민도시의 계획에 있어서 기본이 된 것은 도시계획가 히포다무스에 의해서 발전된 격자형 도로망 패턴이었는데 그는 고대 이집트와 슈메리아의 도시패턴에서 응용발전하여 격자형 패턴을 도입하게 되었다. 가장 체계적으로 격자형 가로체계와 도시구성이 이루어져 있는 올린투스(Olynthus)는 초기의 불규칙적인 형태에서 도시성장에 따라 5세기경에는 완전한 격자형의 도시체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시기는 히포다무스의 계획방식이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주요도로는 폭 300ft, 동서의 폭 129ft로 상호 연결되어 구성되어 있다. 각 가구에는 장방형의 주거가 형성되어 엄격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세부적으로 당대도시의 Agora에 대해서 살펴보면 교역 및 정치생활의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하기 위해 도시 중심부에서 동서와 남북의 주요간선도로와 연결하여 구성되엇는데 아고라로 이루어진 광장은 정 도시구역의 5% 내외로서 길이는 도시의 폭 및 길이의 1/5정도이다.
Miletus나 Priene과 같은 계획도시의 경우, 아고라는 기하학적인 형태를 가지며 광장주변 건물의 열주(列柱)로서 둘러싸인 정방형 내지는 장방형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특이한 것은 도로구성에 잇어서 관장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동선과 상인들의 동선이 분리되어 계획되엇다는 점이당시의 광장배치의 기본이다.
Miletus의 도시계획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전체도시는 도심과 상업지역 및 종교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도심은 격자형 가구의 몇 개를 포함한 극장, 시장 및 경기장, 창고, 청사로 되어 있다. 기본가구 격자의 크기는 30×52m로서 전체 도시를 이 기본격자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

2.중국의 도시공간 구조

1) 낙양(洛陽)
낙양은 삼국시대 위(魏)의 수도였고 5호16국시대의 쟁탈의 중심이었으며 또한 북제(北帝) 여러 국가들의 제도(帝都)였다. 낙양은 문화 정치의 중심으로 그 규모가 자대하였는 바 오(吳)의 건업(建業)이나 촉(蜀)의 성도(成都)는 이에 비하면 지방의 대도시에 불과했다.
성 전체의 크기는 동쪽 성벽의 길이가 7312m, 남쪽 성벽의 길이가 7290m, 북쪽 성벽의 길이가 6183m, 서쪽 성벽의 길이가 6776m로서 기본적으로는 정사각형에 가깝다. 서남쪽 모서리는 낙하의 물결을 따라서 나 있는 관계로 성의 담장은 굴곡이 있다. 도성의 서쪽에는 문이 없으며, 북쪽에는 4개의 문이 남쪽과 동쪽에는 각각 3개의 문이 있었다. 도성의 건물배치가 정확하게 대칭으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성문의 위치도 대칭이 아니며, 각 문의 간격 또한 각각이다. 낙하가 도성전체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기 때문에 성은 남북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북에는 궁성이 있고, 그 동쪽에는 큰 방리가 있는데 이곳에는 모두 29개의 방이 있었다. 남부에는 74개의 방이 있어서 도합 10³개의 방이 있었다. 방 내에는 폭이 14m인 십자형 도로가 있다. 방의 면적은 일반적으로 450×450㎡로서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사방 1리의 척도와 서로 같다. 장안과 비교해서 낙양의 방은 그 규모면에서 작은 편이다.
도로는 궁문 정면의 남북 간선도로가 주축선으로서 이는 성 전체에 있어 최대의 간선도로이다. 각 성문의 정면에 있는 길은 모두 주요 간선도로이며, 이 밖에 방리를 구분하는 일반 간선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각 간선도로는 직교하고 있다. 도로폭은 장정문 앞의 가장 넓은 대로는 그 폭이 120m에 달한다. 성문 정면의 주요 간선도로는 40~60m에 달하며, 일반 간선도로의 폭은 30m 이하였다. 이러한 위계를 가진 도로망은 장안 건설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서 교통량 수요에 대응하는 한편, 토지의 낭비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2) 장안(長安)
장안은 서주 이래로 800년 이상 계속해서 주,진,한 시대에 역대 왕조의 정치중심지였다. 당(唐)의 장안은 세계적인 국제도시였다. 서방사람들은 서시(西市)부근에 사고 있었고 외곽성 서북쪽의 개원문(開遠門)은 서방 여러 나라 상인들의 출입구였다.
장안성은 평지에 새로 건축한 도성으로서 먼저 세밀한 계획을 세운 후 성벽을 쌓고 도로를 개통하였으며, 이후에 점차로 방리를 개축하여 나갔다. 장안성의 평면형태는 정사각형이다. 기록에 의하면 수 도기의 도성규모는 외곽성이 동서로 18리 115보이고 주위는 67리라고 한다. 도성의 각 면에는 3개의 문이 개설되어 있다. 궁성은 중앙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위치하고 있고, 황성의 좌우에는 종묘와 사직이 있다. 도성 내의 분포계획은 궁정부와 일반인 거주자를 서로 분리시키는 의도하에 진행되었다. 이러한 분포계획과 더불어 엄격한 방리제도는 통치자의 엄격한 통제를 위한 것이었다.
도로들은 질서 있는 격자망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남북방향으로 11개의 도로와 동서방향의 14개의 도로가 서로 직각으로 교차되고 있다. 이중 각 성벽의 문을 연결하는 도로는 주요 간선도로에 해당된다. 도로 폭은 궁성앞을 가로지르는 도로는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441m인데 실측 결과 200m이었으며 사실상 이는 하나의 광장과 같았다. 남북의 주요 간선도로인 주작대로는 150m이다. 동서로 향하는 주요 간선도로의 폭은 120m에 달한다. 거주지역의 방리 안에는 십자형과 일자형의 길이 별도로 있었으며 폭은 15m이다.
주작대로의 양측에는 동시(東市)와 서시(西市)의 2개의 시장이 있었다.
3) 북경(北京)
북경은 현재 중국의 수도이자 유명한 역사도시이다.
북경 내성(內城)의 동서 길이는 약 7000m, 남북의 길이는 5700m로 지금의 북경성의 벌뮈이다. 남쪽을 제외한 3면에 각각 2개의 문을 만들었고 남쪽에는 3개의 문을 만들었다. 내성의 중심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있는 궁성은 도성의 핵심이다.
계획 구조는 궁성을 핵심으로 하여 도시전체의 중앙에 궁성을 위치시키고 앞은 조(朝),뒤는 시(市), 좌측에는 종묘(宗廟), 우측에는 사직(社稷)을 두었다. 궁성 안은 앞에 치조(治朝)를 두고 뒤에 침궁을 두었다. 5문 3조를 위주로 조성된 남북 주축선은 도시전체의 계획축선으로서, 조사(組社), 방리(坊理), 교단(郊壇) 등을 기본적으로 이 주축선에 연하여 배열하였다. 격자식 도로망을 채택하여 궁성을 빙 둘러서 대칭적으로 배열하였다.
도로는 원(元)의 대도(大都)를 기초로 하였다. 중앙에 위치한 황성과 남북 주축선에 의해 도시는 동서로 나누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하였다. 성내의 주요 간선도로는 궁성 앞에서 영정문의 중앙축선과 각 성문으로 통하는 큰길이다. 외성에는 영정문 좌우의 좌안문, 우안문을 포함한 7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성문을 연결하는 직교의 길들도 역시 주요 간선도로이다.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
고공기(考工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수공업 관계 문헌이다. 이 책은 각 업종별로 여러 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전체는 종사자의 직명을 표제로 삼고 있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장인(匠人)'부분은 왕성을 건설하는 것에 대한 지침을 담고 있다.
도성건설 이론의 성립의 배경에는 주대에 걸친 두 차례의 건설 붐이 자리잡고 있다. 한 번은 서주(西周)개국 초였고, 한 번은 춘추전국 시대였다. 이 시기는 중국사회가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엿다. 노예제 사회를 고수하려는 구세력과 신흥봉건 세력 간의 갈등은, 특히 도시건설과 관련하여 첨예하였다. 신흥봉건 지주계급은 '선왕의 제도'의 속박을 타파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여, 그들의 의지에 따라 옛 도시를 개조하고 새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당시 봉건제도의 도시경제 발전의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구세력들은 기존 도시건설 원칙을 다시금 정식화하여 봉건적 도시경제를 저지하였다. 고공기에 나타난 도성건설 이론은 이러한 구세력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노예제 사회의 도시건설 경험을 총결산한 것이면서 노예제 사회 도시계획 이론의 전통을 청합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노예제 사회하에서의 도시건설의 전통을 후대에 전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3. 한국의 도시공간 구조

1) 고구려의 도성계획
고구려는 평양의 장안성이 대표적인 도시이다.
평양 장안성은 동남방은 대동강, 북방은 진텅상을 외곽으로 하여 이 사이에 광활한 지역을 포위한 토성이 구축되고 다시 목단대에서 을밀대에 걸쳐 깊숙이 내성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와 비슷한 시기에 수의 수도인 장안에 대흥성을 축조하였으므로 시기적으로 수의 도성제의 영향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장안성은 3단의 방어선으로 만들어져서 북단의 복단대에서 을밀대까지 일곽을 이루고 그 밖에 구릉의 지형을 이용하여 크게 내성을 만들었으며 다시 회성 주위에 외곽성벽을 돌렸다. 그 당시에 조방제에 따른 도시건설에 착수하였다 하며, 이로써 주례 고공기에 의한 도시계획법이 적용되어 도시건설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해 준다. 장안성 내는 기자정전이라 불리는 바둑판식의 정연한 가로망이 형성되었고 가로의 크기는 5m와 12m, 구획의 크기는 150m였으며 이는 수(隨)시대의 도시구획과 흡사하였다. 이 정연한 형상을 갖추고 있는 정전지의 가로에는 포장의 흔적도 있다.
2) 발해의 도성계획
발해의 도성은 크게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동성은 정사각혀으이 내성이 가운데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약 400m×200m로 된 직사각혀으이 외성이 둘러싸여 있었다. 팔련성과 서고성에도 정사각형에 가까운 내성이 있는데, 팔련성에는 내성 남쪽에 외성이 있었으며 서고성에도 외성 흔적이 있었다. 상경용천부에서는 외성의 중심 북쪽에 내성이 있다.
발해도성의 평면형태는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이었다.내성의 중심 남쪽 대로를 기본축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곧은 길이 나 있었으며, 이 도로들에 의하여 정연하게 방리가 조직되어 있었던 상경용천부의 도성 내부구조와 크게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본 간선도로는 황성 남문으로부터 외성 남문에 이르는 남북으로 뻗은 대도로이다. 남북 길이 2195m,폭 110m나 되는 이 도로는 도시의 중심도로이고, 궁성 안의 주요건물들이 이 도로축을 따라 전개 되어 도시의 기본 구성축을 이룬다. 이도로를 줄기로 해서 그와 평행되는 남북 도로 네 개, 또 그와 수직되게 동서로 일솝개 도로가 뻗어 있었다. 즉, 열두개 도로가 전체도시를 바둑판처럼 구획하고 잇는 것이다. 도시주변에 돌을 쌓고 흙을 덮은 성벽을 둘렀으며, 그 밖에 해자를 팠는데 그 폭이 약 6.5m정도로 추정된다. 외성벽에는 내부 도로와 직접 연결되는 열 개의 성문이 있었다.
고구려의 도성건설은 자연석이 많은 것에 돌로 성을 많이 쌓았다면, 발해에서는 돌이 많지 않은 형지에 주로 흙으로 성을 쌓았다는 특성이 있다. 또 고구려는 인공해자 외에도 큰 강을 도시성곽의 천연해자로 이용하는 방법을 많이 썼다. 반면, 발해에서는 성주면에 인공해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고구려 도성건설 방법을 새로운 지리적 환경에 맞게 발전시킨 것이었다.
3) 통일 신라 시대의 도성계획
신라의 시가지의 가로망 형성에는 정전법(井田法)이 사용되었으며, 고려척으로 대략 400척이나 되고, 남북방햐으이 길이는 360~480척이 되어 일정하지 않게 구획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주요가로의 폭은 중앙대로가 80척, 그 밖의 구획로는 40척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분황사리로(分皇寺里路)라 하여 모든대로는 그 당시의 폭이 80척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동서를 연결하는 중앙대로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도시계획 발전은 동남방에 있는 내동면일대 및 서남부 내남면일대와 북천을 건너 서북쪽에까지 시역이 확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 지역에서는 모두 정전식 가로망의 형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동남쪽 내남리 동서방향으로는 불규칙하나 남북방향으로는 비교적 직선으로 된 도로형적을 남기고 있으며, 내남면 지역에는 가로형적이 현재는 거의 없다.
4) 고려의 도성계획
*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 : 도선선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당나라 말기에 일행선사에 의하여 형성된 중국의 감여설(堪輿說)과 한국 고대의 샤머니즘적인 고정요소, 불교의 선근공덕사상(善根功德思想), 도교의 음양오행설 등이 결합된 것으로서, 지형과 지세가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지리에는 쇠왕순역(衰旺順逆)이 있어 순처 즉, 명당(明堂)을 택하여 양택(陽宅;주거)이나 음택(陰宅;분묘)을 만들면 국가나 개인이 복리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풍수도참설은 고구려부터 널리 믿어지게 되어서 많은 영향을 미쳤고, 후에는 일상생활의 지도 원리로 생각되게까지 되었다. 실상 이 풍수사상은 미신적 추복기원의 요소를 제거한다고 하면 자연에 적응하고, 귀화되려는 정신의 발로라고도 생각될 수 있겠다. 개경의 지리와 만월대 궁궐의 위치는 풍수설에 잘 맞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5) 조선의 도성계획
도성 축조의 의의는 주로 외적의 방어 등에 있었던 것으로, 당시의 전략상 절실한 조치였다. 또한, 도성은 일반 주민에게 직접적인 혜택은 없었지만 성내의 주민에게 필요한 제반시설이 이 범위 내에서 실시되고 있고 한성부로서 일체화된 도시의 규모를 명백히 했다는 점에서 전략상의 의미 외에 도시계획 구역을 결정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한양은 대체로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두고 고려시대의 남경계획을 기준으로 하였다. 도성계획은 서울의 지리적 여건에 의해 동양고래식 수도배치 방법의 변형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왕궁의 위치가 수도의 중앙으로 옮겨진 것이다. 간선도로도 남북3행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으며 도성에는 12개(동서남북 각 3개)의 분이 있지 않았고, 도성의 형태도 고래의 중국식인 정방형 내지 장방형이 되지 않고 있으므로, 한성부의 계획자들이 중국식을 모방했다기보다는 이를 기초로 하여 독자적 계획기법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중심 도시였던 한양은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지세를 배경으로 궁궐과 관아를 중심으로 계획되었으며, 중심부의 일부 주요 가로망은 격자형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일률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자연지세를 잘 활용하여 계획된 것으로서, 자연 발생적인 불규칙한 곡선로와 우회로 및 막다른 골목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중국의 도성계획과는 판이하게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백악 앞 명당자리에 경복궁과 창덕궁을 병립하여 배치하고,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서 궁궐의 동측에 종묘, 서측에 사직을 두었다. 동서 주요 간선도로는 흥인문에서 시작되어 종묘 앞과 종루를 지나서 경희궁 앞에서 약간 굽어져 돈의문에 이르러서 한서을 남북으로 양분하고 주요 간성도로를 이루고 있느며, 남북 산선도로는 숭례문에서 시작되어서 호형 노선을 따라서 종루에 연결되어 3교차를 형성하고, 북쪽에 경복궁 앞에서 현재 광화문 네거리까지와 창덕궁 앞에서 현재 종로3가까지의 2개의 간선도로가 3교차로를 형성하여 동서 주요가로와 연결되었다. 주요도로의 노단에는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 숭례문, 흥인문 등의 웅장한 건물들이 노단경을 현성하였으며, 주요 간선도로의 좌우에는 연달아서 계속된 행랑건축이 이채를 나타내고, 도성을 둘러쌓은 성곽 및 도성의 중심을 이루는 궁궐건축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들과 관가건축,사묘,시전 등은 당시의 수도 한성의 도시미관을 일관성 있고 특성있게 만든 주요한 요소들이었다고 생각된다.
도로폭은 경국대전에 의하면, 대로 56척, 중로 6척, 소로 11척으로 하였고, 그 양쪽에 도랑을 가 2척씩 두었다.

·결 론

이상에서 각 도시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
격자형 가로망은 자연 발생적인 도시에서 보다는 계획된 대규모의 도시나 식민도시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문명의 흐름과 더불어 도시의 형태도 불규칙한 형(形)의 도시가 정치 경제 사회 가 변화됨에 따라 점차 기하학적인 형태로 개조되는 경우가 많으며, 비형식적인 형이 격자형도시 위에 중합되어 계획되기도 한다.
각 도시의 격자형 가로망의 차이를 살펴보면 그리스는 시민광장인 아고라를 중심으로 격자형의 가로망 체계가 확립되어 있음을 볼수 있다. 이것은 평등을 의미 하는 듯 하다. 모든시민이 중심지인 아고라를 중심으로 평등하게 모이고 흩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중국의 격자형 가로망은 대규모의 중심간선인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뻗어있다. 또 중국 도성계획의 특징은 성곽을 만들어 성의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퐁수지리사상이 도시의 배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이 도성계획이 중국의 도성과 흡사하게 구성되어져 있다. 그리고 특이할 만한 사항은 부분적으로 격자형을 띄고 있으나 기하학적인 형태는 드물게 나타난다. 그리고 시민을 위한 광장이 없음도 특이할만한 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