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업적 평가 - gwanghaegun eobjeog pyeong-ga

다섯 번째, 광해군이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대외정책을 어떻게 해나갔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모두들 알지만 광해군은 명을 설득하고 후금을 다독거리면서 조선을 보호해나갔다. 광해군은 명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나 조선의 존망여부까지 걸어야 할 요구는 거부했다. 또한 후금이 오랑캐임은 분명하지만 일단 그들을 다독거려 침략을 막고, 얻어진 평화의 시간동안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한 실력을 배양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기도 한다. 주변 열강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되 그 관계를 바탕으로 얻어지는 시간동안 능력을 길러야한다는 것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도와준 것을 재조지은이라고 해서, 재조지은을 명분으로 조선에게 베푼 은혜를 생색내었고, 이는 파병요구와 은 징수로 이어진다. 임진왜란 이후 명은 광해군 말년까지 수 만냥을 수탈해갔다. 은혜에 보답해야 된다는 의식이 퍼지면서 명은 더욱 생색을 냈고 조선은 재조지은을 은으로 갚아야만 했던 것이다.
오항녕은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상황을 모면했다고 했다. 광해군은 많은 은과 인삼으로 중국 차관에게 뇌물을 주고, 이 때 처음으로 뇌물을 먹이는 길을 틔웠던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광해군 대의 호조는 명나라의 사신들에게 줄 뇌물인 은을 마련하느라 허리가 휘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광해군은 즉위 당시부터 불안하고, 명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은을 바친 것이지 뇌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명과의 관계를 위해 무리인줄 알면서도 요구에 순응한 것이다. 명사신들을 적극적으로 은을 찬탈해갔고, 그에 대한 피해를 막기 위해 은을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조정도 명에 대해 예를 갖춰야한다고 했기 때문에 반명사상을 가진 광해군이 일부러 명에게 은을 바쳤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는 후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미리 방어책을 강구했다. 선조와 광해군은 임진왜란 기간동안 서북변방인 평안도와 압록강 일대를 전전하고, 의주에 머물게 되면서 변방의 사정에 대해 훤히 알게 되었다. 의주에 머무는 동안 선조와 광해군은 누르하치 집단의 동향과 군사적 위력에 대해 알게 되고 여진 문제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선조 때부터 양국의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배려하고 회유책을 쓰면서도 그들의 동향을 탐지하고, 방어대책도 세웠다.
광해군 역시 누르하치의 위협이 커져갔을 때 즉위했으므로 선조처럼 행동했다.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은 피하고, 한편에서는 힘을 길러 침략에 대비하려 했다. 실제로 누르하치를 방어할 대책을 세우고 누르하치 진영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강홍립을 통해 누르하치 내부 동향을 얻어내 후금 막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조선 내부 사정이 들어가지 않게끔 조심했다. 무기제작과 우수한 병력확보와 군사관계보고와 같은 상황은 반드시 들었다고 한다. 후금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간파했던 것이다.
그래서 명이 파병을 요구했을 때 후금에 대한 정보에 대한 결론은 원병을 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망가진 민생회복과 남은 궁궐공사라는 과제가 남았고, 후금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변사 신료들은 재조지은에 보답해야 한다고 해 어쩔 수 없이 후금과 명 사이에서 유연하게 행동할만한 강홍립을 보낸 것이다. 그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라고 말했다. 명나라의 철저하지 못한 준비와 날씨, 후금의 전력 등으로 인해 당연히 패배하고 말았지만 광해군의 선견지명을 볼 수 있었다. 끝까지 조선을 위해 파병을 막고, 유연한 강홍립을 보낸 그는 과연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능력 있는 병사들을 보내 명의 파병요구를 들어주고, 후금과는 나쁜 상황이 되지 않았으니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대후금정책에 상황을 제어할 능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숱한 옥사가 벌어지다 보니 조정에서 일할 인재가 없고, 대동법을 흐지부지 되고, 궁궐공사에 국력을 낭비하다보니 자원과 군비가 허술해졌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는 인조반정의 빌미가 되었는데, 나는 광해군이 그 때의 선택이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반정세력들은 광해군이 한 일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징병을 보내지 않을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듣고, 경험한 후금의 위력을 알기 때문이다. 부왕인 선조 때부터 후금에 대해 전해들은 것이 다른 관료보다 많은 광해군은 피할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조정을 강타하고 있었던 재조지은에 보답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파병에 대해 진 것에 대한 광해군의 책임까지 묻기는 힘들다고 본다.
또한 명은 심할 정도로 재징병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광해군은 현명하게 조선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부각시켜 명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유유부단한 광해군이 군사적인 면에서는 단호했다고 한다. 명과 후금같은 강대국에서 전쟁을 피하면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정보를 계속 수집하고, 상대방의 동향을 파악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제껏 우리가 참고해본 자료들은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의 주체들은 자신들의 거사를 정당화하기 위한 과정에서 작성된 <광해군일기>이다. 광해군 정권이 쫓겨날 수 밖에 없었던 정권임을 알려줌으로써 서인들이 자신의 정권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일기의 신뢰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광해군일기를 부정하는 것은 모든 실록에 대한 사료의 비판일 될 수 있고, 서인만이 아니라 남인은 물론 북인도 참여해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본사료는 광해군 재위 당시 기록된 사관의 사초이며, 반포된 글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없는 사실을 주장하거나 사실을 과장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반정의 주체들이 반정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반포된 글일지라도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정주체가 폭군으로 매도한 광해군에 대해 사실에 덧붙여서 정당성을 강화할만한 부분에서는 그대로 둘 수도 있고, 내용을 뺄 수도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광해군일기를 봐야될 것이다.
영화 <광해군>을 보면 가짜왕이 대동법을 즉각 실시하고, 고리를 상납받은 자를 엄중히 처벌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궁궐공사를 폐지하겠다고 상참에서 말한다. 이는 가짜왕을 통해 광해군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나, 대동법을 다시 실시하고, 하루 빨리 궁궐공사를 폐했으면 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사이에서 뛰어난 대외정책을 썼다. 백성과 조정을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방어책을 사용해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그로 인해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친형인 임해군을 살해하고, 김직재의 옥사, 계축옥사, 영창대군의 증살이 이어지고 폐모론이 등장했다. 정인홍의 회퇴변척 등은 씻지 못할 광해군의 비판으로 이어졌다. 또한 임란의 경험으로 민생을 생각해 대동법과 동의보감의 반포는 좋았으나 무리한 궁궐공사와 과도한 포목 징수로 인해 민생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대동법을 끝까지 이어나가지는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왕권강화에만 힘쓰느라 신료들의 조정에 어려움이 있었고, 경연의 불성실함 역시 조선의 내부 시스템이 위태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광해군으로 인해 분명히 발전한 것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광해군 15년동안의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표현한다. 민생 회복, 사회 통합과 재정확보 등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고, 동아시아의 판도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광해군은 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대외정책 외에는 과오가 많았다. 하지만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대동법을 반포하였고, 비대해지는 대북파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려고 왕권강화에 힘썼던 것이다. 대동법이 광해군의 시대에는 실패하였지만, 광해군 이후의 세대에서는 사용되어 백성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으며, 광해군으로 인해 동아시아 판도는 달라졌다. 적어도 작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위협적인 나라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하며, 명분보다는 실제 어떤 위치인지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조반정 이후에 사람들의 삶이 편해졌다면 광해군의 시대는 반정당할만한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조반정의 주체들은 친명배금을 걸었지만 배금은 현실화되지 않았고, 정묘호란을 맞아 후금이 제시한 강화조건을 수용하였다. 또한 대북파가 저지른 비리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재성청이라는 기구를 만들었지만 개혁사업 역시 지지부진했다. 권세가들에게게 토지를 강탈당했던 사람들 역시 반정 이후에 원래 주인에게 반환되기는 반정공신들에게 불하되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하나의 역사를 살아온 그가 후대에 다양하게 평가되는 것이 신기했고, 그 다양한 평가 속에서 광해군을 파악하는 것은 즐거웠다. 무조건적으로 그를 훌륭하다고 생각하거나 폭군이라고 보기보다는 다른 왕들처럼 어떠한 면에서는 뛰어난 군주였고, 반면 다른 면에서는 조금 부족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어느 군주와 마찬가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