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켈리 결혼생활 - geuleiseukelli gyeolhonsaenghwal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배우에서 왕비로 동화같은 삶을 살았던 그레이스 켈리 이야기를 소개 합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미국 영화의 수도 할리우드에서 뛰어난 미모와 연기로 이름을 날리다가 작은 왕국의 왕비가 된 동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1929년 11월 12일,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에서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올림픽 스컬링에서 금메달을 세 번이나 딴 스포츠맨에 사업가이자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일찍부터 배우가 되려는 꿈을 안고 고등학교 때부터 춤과 연기를 배웠습니다. 그 후 뉴욕에 있는 아메리칸 드라마 아카데미 (American Academy of Dramatic Arts)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익혔습니다. 처음에는 모델로 시작했다가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가, 텔레비전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텔레비전 생방송에서 거의 60회나 연기를 할 만큼 인기를 끌었습니다. 모델과 텔레비전에서 성공적인 출발을 하자 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레이스 켈리가 맨 처음 출연한 영화는 1951년도에 개봉된 ‘14시간(Fourteen Hours)’이라는 영화였습니다. 정신이상자가 주인공인 이 영화에서 켈리는 단역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켈리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다음 해인 1952년 서부극 ‘하이눈(High Noon)’에 출연하면서 그레이스 켈리의 인기는 폭발했습니다. ‘high’는 높다, ‘noon’은 정오. 그러니까 태양이 높이 솟는 정오를 뜻하는 제목입니다. 어느 조그마한 읍에서 보안관과 악당들이 정오에 결투를 벌이는 서부극. 외로운 보안관 남편을 끝까지 보살피는 부인 역을 그레이스 켈리가 맡았습니다. 하이눈은 흑백 서부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1953년에는 아프리카 케냐를 배경으로 한 영화 ‘모감보(Mogambo)’에 출연했습니다. 고릴라를 연구하는 학자의 부인으로 나오는 그레이스 켈리와 현지의 사냥꾼 사이에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켈리는 이 영화로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그 후 ‘다이얼 M을 돌려라(Dial M for Murder)’, ‘이창(Rear Window)’, ‘나는 결백하다(To Catch a Thief)’ 등에 계속 출연을 합니다. 그레이스 켈리가 출연한 영화 중에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도 있습니다. 1954년에 나온 ‘도고리 다리(The Bridges at Toko-Ri)’라는 영화입니다. 미 해군 소속 제트 전투기 조종사가 북한의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철교를 폭파하고 끝내는 전사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레이스 켈리는 조종사의 부인 역을 맡았습니다.

그레이스 켈리가 가장 큰 영예를 차지한 영화는 ‘컨트리걸(The Country Girl)’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 영화가 ‘갈채’라는 이름으로 상영됐습니다. 자포자기한 알코올 중독자 배우와 그의 헌신적인 아내를 다룬 내용입니다. 1954년에 나온 이 영화로 그레이스 켈리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차지했습니다. 세계적인 권위의 영화제에서 받은 최고의 영예입니다.

1955년 시상식에서 켈리는 자신을 여기까지 오도록 해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레이스 켈리가 영화배우로 활동했던 기간은 고작 5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11편의 영화는 거의 모두 걸작품으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카데미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켈리는 1955년 봄, 프랑스의 칸느 영화제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화보를 찍기 위해 그곳에서 가까운 모나코를 방문했습니다. 이때 모나코의 통치자인 레니에 3세가 켈리를 궁으로 초대했습니다. 레니에 3세는 그때 32세, 아직 미혼이었습니다. 레니에 3세는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등 적극적으로 구애했습니다. 이때부터 두 사람 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졌고 드디어 결혼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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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61년 모나코의 통치자인 레니에 3세와 부인 그레이스 켈리가 미국 백악관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1956년 봄 그레이스 켈리는 대형 여객선을 타고 가족과 들러리, 결혼을 위한 각종 물품을 싣고 모나코로 떠났습니다. 워낙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결혼이다 보니 400명이 넘는 취재진이 그 배를 타고 가겠다는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켈리 가족은 이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모나코 거리에는 2만 명의 시민들이 나와 왕비가 될 그레이스를 환영했습니다.

결혼식은 1956년 4월 18일과 19일 일반 결혼식과 가톨릭 결혼 미사 두 차례 올려졌습니다. 이들의 결혼식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습니다. 결혼식을 지켜본 시청자의 수는 3천여만 명. 텔레비전이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시청률이었습니다. 결혼행사는 일주일간이나 계속됐습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이때부터 배우가 아니라 ‘Princess Grace’, ‘그레이스 공비’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모나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 국가로 프랑스와 인접해 있습니다. 세계의 주권 국가 중에서 바티칸시국에 이어 두 번째로 영토가 작은 나라이고 인구는 4만 명이 채 안 됩니다. 국가 원수는 모나코 공작(公爵), 즉 ‘Prince’입니다. 그러니까 Prince라고 해서 왕자가 아니고 군주입니다. 왕비는 ‘Princess’, 즉 공비로 불립니다. 국가 수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박 산업, 관광, 국제 중계무역, 스포츠 행사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결혼 후 카롤린 공녀, 외아들 알베르 2세, 차녀 스테파니 공녀 등 1남 2녀를 낳았습니다. 왕가에 후손이 없으면 모나코는 프랑스에 귀속된다는 조약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준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 시민들에게 독립을 유지하도록 해준 은인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레이스 켈리가 공비가 된 후 모나코에는 관광객이 이전의 몇 배로 늘어났고 카지노도 다시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레이스 공비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결혼 후에도 미국 국적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문화 예술계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964년에는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그레이스공비기금’을 창설했습니다. ‘그레이스 공비기금-USA’는 지금까지 미국에 있는 100여 개 기관에 500여 명의 예술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보인 그레이스 켈리였지만 결혼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는 설이 많습니다. 까다로운 궁 생활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고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고 늘 위엄을 갖추고 있어야 했습니다. 가치관이 다른 남편 레니에 3세와의 갈등도 많아 켈리는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습니다. 켈리는 언젠가 다시 할리우드에서 영화에 출연하기를 바랐지만 끝내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1982년 9월 13일 세계는 충격적인 뉴스를 듣게 됩니다. 모나코의 그레이스 공비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레이스 공비는 직접 차를 몰고 막내딸과 함께 별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켜 높이 37m의 절벽으로 떨어졌습니다. 딸 스테파니는 부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레이스 공비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다음 날 숨을 거두었습니다. 나이는 52세.

1982년 9월 18일 모나코의 성니콜라스대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영화배우 캐리 그랜트, 미국 대통령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 프랑스 대통령 부인 다니엘 미테랑 여사, 영국의 다이아나 왕세자비 등 400여 명의 저명인사가 참석해 명복을 빌었습니다.

동화 같은 일생을 갑작스럽게 마감한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의 왕족 묘지에 안장됐습니다. 남편인 레이니에 공은 그 후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지내다 2005년 그레이스 옆에 함께 묻혔습니다.

    입력2014.06.17 10:38 수정2014.06.17 10:38

    그레이스켈리 결혼생활 - geuleiseukelli gyeolhonsaenghwal

    ‘할리우드 여신’ 그레이스 켈리(니콜 키드만)는 모나코의 레니에 3세(팀 로스)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면서 할리우드를 떠난다.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 왕실 생활에 답답하던 느끼던 그녀는 히치콕 감독의 할리우드 복귀 제안에 귀가 솔깃하다. 하지만 모나코를 호시탐탐 노리던 프랑스는 할리우드 복귀를 고민하는, 이제는 모나코의 왕비인 그레이스 켈리를 이용해 모나코 왕실을 위기에 빠트린다. 기지를 발휘해 위기의 모나코를 구해낸 그녀는 가장 사랑받는 왕비로 추앙받는다. 12세 관람가, 18일 개봉.

    10. 모나코를 택한 그레이스 켈리의 삶은 정말 행복했을까. ∥ 관람지수 7

    그레이스켈리 결혼생활 - geuleiseukelli gyeolhonsaenghwal

    영화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 스틸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는 할리우드 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삶을 되살렸다. 그녀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다이얼 M을 돌려라’(1954), ‘이창’(1954)을 비롯해 ‘회상 속의 연인’(1954), ‘나는 결백하다’(1955) 등 약 1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활동기간도 5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가장 기품 있고, 우아한 할리우드 여배우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또 아카데미 트로피도 챙겼다. 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스타 중의 스타였던 셈이다. 물론 그 당시 국내에서 그녀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긴 어렵지만, 여하튼 인기 절정의 순간 그녀는 레니에 3세와 결혼을, 그리고 모나코 왕실의 왕비가 돼 할리우드를 떠났다. 가장 화려할 때 사랑을 찾아 할리우드를 떠났기에 더욱 극적이다.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은 그레이스 켈리의 삶 중에서도 결혼 후 모나코에서의 삶을 담았다. 화려했던 배우의 삶이 아닌 모나코 왕비의 삶, 그것도 위기의 모나코를 구해낸 그 순간을 중심으로 했다.

    사랑을 쫓아 모나코를 선택했지만, 답답함은 어쩔 수 없는 일. 은막의 스타였던 그녀에게 모나코 왕실은 꽉 막힌 공간이다. 모나코의 아름다운 풍광도 보고, 느끼지 못한 사람에겐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 날 히치콕 감독의 신작 제안으로 잠시 숨겨뒀던 연기 열정마저 꿈틀거린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배우가 아닌 모나코의 왕비다. 체통을 지켜야 하는 바로 그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또 프랑스와 대치중인 모나코의 국제 정세는 그녀의 행동반경을 더욱 제한한다. 더욱이 프랑스는 모나코 왕비의 할리우드 복귀라는 흥미로운 가십을 빌미로 모나코를 더욱 곤경에 빠트린다. 이처럼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는 배우에서 진정한 모나코의 왕비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사실 이야기 자체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지점에 놓여 있다. 보통 사람들도 결혼 후에 삐걱대기 마련인데, 화려한 스타였던 켈리의 삶이 순탄하기만 했겠는가. 그리고 배우와 모나코 사이에서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때문에 초반보다 중후반부가 더욱 극적이며 그레이스 켈리의 매력도 제대로 드러난다. 가족과 모나코를 위한 마음을 깨친 그녀의 거침없는 행보를 따라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추진력과 강단, 거침없는 언변은 그녀를 얘기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처럼 보인다. 또 켈리의 우아함은 니콜 키드만이 잘 살려냈다.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우아하고 기품 있는 배우를 묻는다면, 니콜 키드만 역시 빠지지 않고 상위권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는 올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보인 뒤 혹평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정도로 무참히 몰매 맞을 수준은 결코 아니다. 프랑스의 샤를르 드 골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그려놨으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칸 인근에 위치한 모나코 왕실 역시 무능하게 그려졌다. 이 영향이 분명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니 크게 의식하지 않고 극장을 찾길 바란다. 충분히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영화다.

    글. 황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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