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감정쓰레기통 - eomma gamjeongsseulegitong

 [정신의학신문 :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네 아빠 때문에 엄마가 속이 문드러진다… 아들 놈은 어쩜 그리 자기만 아는지 원… 우리 딸 너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이런 말 하겠니.”

“엄마의 사랑에 저는 늘 목마른데, 엄마는 남동생만 바라봐요. 남동생의 성취만 귀하게 여기고 제 성취에는 관심이 없거나 늘 깎아내려요. 시집살이의 고통과, 그것을 모른 척해온 아빠, 지극 정성에도 늘 시큰둥한 남동생에 대한 하소연을 듣는 건 언제나 제 몫인데도요. 저보다 그들을 계속 챙겨주면서도 비난하는 엄마를 달래줄 때만, 저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칭찬을 받았어요. 엄마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너무 불쌍하다가도 자주 화가 나고… 그리고 그런 제가 나쁜 사람인 것만 같아요.”

엄마의 시대와 딸의 시대가 만났을 때

진료실 안팎에서 엄마와 딸이 갈등을 겪는 경우를 꽤 많이 접합니다. 전근대적 체계 안에서 여성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50~60대 어머니와 20~30대 딸의 삶의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죠. 엄마와 딸의 갈등은 단순히 둘의 문제라기보다는 각 시대의 가치관과 가족 구성원에게 고정된 역할이 함께 작용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양육자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모델이 됩니다. 양육자들 중 누구를 모델로 할지에는 양육 환경, 주양육자 여부, 성별, 문화적 규범 등이 영향을 미치는데요. 양육자를 모델로 삼고 닮으려 할 수도 있고, 타산지석으로 삼아 양육자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도 있습니다. 두 방향의 마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가감정을 가질 수도 있죠.

딸은 보통 어머니의 삶을 보며 자기 인생의 더하기, 빼기를 해나갑니다. 우리는 양육자와 다르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가지는 동시에, (묘하게도)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 성장하면서 거치는 중요한 심리적 과정 중 하나입니다. 이 마음을 자신 안에서 어떤 식으로 소화하고 통합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았으면 합니다.

엄마 감정쓰레기통 - eomma gamjeongsseulegitong
사진_freepik

자기 자신을 제대로 존중하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딸에게는 스스로를 존중하는 작업이 잘 이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통 이를 ‘누구의 탓이고 누구를 응징할지’ 가려내는 작업이기만 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둘은 별개입니다. 말 그대로 그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일단 알자는 것이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발생하는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만 같은 마음’ 때문에 원인 탐색이 계속해서 방해받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왜 힘든지를 들여다보려다가도 그 작업이 어머니, 아버지, 동생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행위인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들면 (그들이 내 고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더는 원인 찾기 작업을 지속해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깔린 가치관과 시스템에서 원인을 찾으려다가도 자신이 마치 ‘핑계’를 대는 것만 같다는 생각에 멈추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무조건 자기 탓을 함으로써 은연중에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줄여줄 뿐 근본적인 원인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행위가 아닙니다. 만약, 관계에서의 갈등이 언제나 자기 비난으로 이어진다면 자신이 전능(omnipotent)해야 한다는 전제가 마음속에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행위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한테 너무 혹독하게 굴지 말고 자신을 존중하고 위로하라는 말을 자주 접합니다. ‘그래, 좋은 말이지.’ 그런데 왜 이런 말이 그저 허무한 구호에 그치게 될 때가 많은 걸까요? 나라는 개별적인 사람에게 왜 이 메시지가 잘 와닿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스스로에게 행하는 위로와 존중은 ‘정확하고 구체적’이어야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로 위로받을 자격이 있는지, 나는 어떤 점이 서운하고 속상한지, 내가 형편없거나 나쁜 사람이 아닌 게 진짜 맞는지에 대해 일단 나 자신이 충분히 납득이 가야, 스스로를 돌보고 싶은 마음이 본격적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본인을 혼낼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서 공감해줄 수 있는 대상으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고, 그 사람에게 맞춰서 자신의 감정을 조율할 줄 아는 사람들은 사실 누군가는 갖지 못한 굉장히 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그만큼의 공감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능력을 본인에게도 배분해서 자신의 내적 세계에 대해 충분히 공감적인 태도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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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freepik

자기 자신을 존중하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작업은, 어머니와 점차 심리적 분리(separation)를 이루면서 자신의 경계(ego boundary)를 잘 형성해 나가는 작업입니다. 어머니의 슬픔과 분노를 자신의 생각과 감정, 욕구와 동일시(identify)하지 않고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가 아마 여러분에게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집 사람들은 다 나를 무시하는구나. 어떻게 너까지 나한테 그럴 수 있니. 어쩜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니.” 등등… 

그런데 누군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죄책감’이라는 함정과 ‘사랑받고 싶은 욕구’라는 밑 빠진 독이 그동안 여러분을 움직여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먼저, 그 죄책감이 내가 진정으로 느껴야 할 합당한 감정이 맞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던져준 감정은 아닌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밑 빠진 독은 결코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고통스럽겠지만) 받아들이세요. 그것을 채우지 못해도 괜찮고, 당신은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방식으로만, 그리고 심리적인 보상이 돌아오지 않아도 괴롭지 않을 정도로만 어머니와 다른 가족 구성원을 도와주세요. 

이때 가족들이 던지는 원망을 내면화하여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족의 묵은 가치관을 변화시키기는 어렵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의 행위가 ‘옳다고’ 평가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로 ‘그런’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들에게서 사랑과 위로를 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끈질기게 말해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성취, 동등하면서도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으면 합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가족에게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하는 행동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엄마의 희생이 나의 고통을 약분하지 못한다

자신을 존중하기 위한 이 모든 시도를 과정에서 혹시라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여러분이 계속 자신을 소모한다면 그건 타인을 ‘착취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라고요. 그것을 멈추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바뀌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각각을 별개의 사실로만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는 희생했고, 당신은 고통받았습니다. 이는 모두 사실입니다. 부조리는 부조리이고, 희생은 희생이며, 고통은 고통입니다. 어머니가 희생했다고 해서 당신이 고통받지 않은 건 아닙니다. 둘은 서로 호환 가능한 값이 아니니까요. 어머니의 희생은 당신의 고통을 약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정하고,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만큼만 위로하세요. 다른 사람의 감정이 나를 덮칠 것 같다면 반드시 거리를 두세요. 여기서 자신의 거리두기에 반드시 따라오는 상대의 실망을 감수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존중해야 다른 사람들도 나를 천천히 존중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이 제일 중요한 성과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에 수록된 에피소드 「남동생과 차별하는 엄마가 미워요」에서 발췌·편집했습니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부속 의료원에서 수련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에서 석사를 수료했다. 12년간 1천여 명이 넘는 내담자를 만났으며, 여성들이 지닌 다양한 상처에 사회 환경 및 젠더 이슈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걸 깨닫고 이 문제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여성학을 공부했다. 

현재 광화문에서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위주로 진료하면서, 개인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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