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팅게일 크림전쟁 - naiting-geil keulimjeonjaeng

입력 2017.03.03 16:53
수정 2017.03.03 16:53 생글생글 545호

장원재 박사의 '그것이 알고 싶지?'

"전쟁터보다 병원에서 병사들이 더 죽는다"
깨끗한 병원으로 사망률 낮춘 나이팅게일

■기억해 주세요^^
나이팅게일은 환자 사이의 최소 거리 유지, 간호사 1명당 최대 환자의 수(12명), 병실내 온도 습도의 조절 등을 처음 시도했어요.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1820~1910)은 누구나 안다. 그가 간호학의 창시자라는 것도 일반 상식이다. 1893년 제정돼 간호학도들이 맹세하는 ‘나이팅게일 선서(Nightingale Pledge)’도 유명하다. 하지만 ‘간호학’이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기에 나이팅게일의 이름이 불멸의 명성을 획득했을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부유한 영국 상류층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 ‘플로렌스’는 피렌체의 영국식 발음이다. 언니 파세노프도 이탈리아 출생인데, ‘파세노프’는 나폴리의 그리스식 이름이다. ‘나폴리’는 그리스어 사투리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이다.

간호학을 창시한 여전사

나이팅게일은 신의 소명을 받았다며, 어린 시절부터 본인의 천직을 간호사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간호사는 ‘병원이라는 특수공간에서 일하는 하녀와 청소부’ 정도의 이미지였다. 상류층 여성이 지원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나이팅게일은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깼다.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업적은 이것이 아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크림반도에서 크림전쟁(제1차 동방전쟁)이 벌어진다. 러시아제국에 맞서 오스만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나 공국 등이 연합전선을 편 전쟁이다.

병원의 더러운 붕대, 시트가 더 문제

30대 중반의 독신 여성(당시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일이다. 나이팅게일은 평생을 독신으로 시종했다) 간호사로 참전한 나이팅게일은 이스탄불 야전병원장으로 활동하며 영국군 부상병의 사망률을 40%대에서 2%로 획기적으로 낮춘다. 한 장군이 ‘전쟁터보다 나이팅게일의 병원에서 병사들이 더 많이 죽어 간다’고 발언한 것이 개혁의 시작이다. 장군의 발언을 반박하기 위해 사망원인 통계자료를 만들던 나이팅게일은 장군의 말이 사실이며 더러운 붕대, 침대시트의 재사용, 오염된 물 등이 2차 감염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위생’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현대 통계학의 창시자가 나이팅게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는 병사들의 사망원인을 시각적 도표로 만들었고, 통계학에 바탕을 둔 나이팅게일의 자료는 설득력이 높았다. 이 공적을 바탕으로 나이팅게일은 영국 왕립통계학회의 첫 여성 회원이 되었으며 미국 통계학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된다. 통계를 바탕으로 의료시설을 개선해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업적은 나이팅게일을 신화(神話)로 만들었다. 밤중에 등불을 들고 병상을 회진하는 그녀의 모습을 형용한 말이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이다. 당대의 신문기사와 미국 시인 롱펠로의 시에서 나이팅게일을 묘사한 구절이다. 우리나라에서 간호사의 상징으로 널리 쓰이는 ‘백의의 천사(White Angel)’는 나이팅게일의 생애를 다룬 여러 전기영화 가운데 하나의 제목이다.

나이팅게일이 처음 시도한 환자 사이의 최소 거리 유지, 간호사 1명당 최대 환자의 수(12명), 병실 내 온도 습도의 조절, 환자 개인을 위한 별도의 조명 설치 등은 현대 병원설계에서도 참고하는 대목이다. 나이팅게일 이전에는 병원이 다른 시설에 비해 특별히 위생 상태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부재했다.

의료복지 체제 확립에 기여

크림전쟁 이후 영국 사회는 나이팅게일을 전쟁영웅으로 대우했으며, 나이팅게일은 ‘빈민원의 의료복지체계 확립’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1911년부터 시행한 영국 국민보호법, 1946년부터 시행한 전 국민 의료보험의 기본 아이디어가 나이팅게일의 것이다. 여담이지만, 2차 대전 이후 비로소 시행된 전 국민의료보험의 완전실시를 막은 것은 대한민국 현대사와 관련이 있다. 1950년 6·25 동란에 참전한 영국군의 전비조달 문제다. 6·25 동란의 영국군 참여로 영국인들은 실시 예정이던 ‘진료무료 약값무료’의 꿈을 접고 ‘진료무료 약값 자비부담’ 선에서 만족했다.

나이팅게일은 자애롭고 따뜻하기보다 성격이 강한 여장부 스타일의 전사였다. 전장에 도착한 의료품은 적법한 행정 절차를 거쳐야 병원에 보급할 수 있다는 한 장군의 명령에 맞서 손으로 의료품 상자를 부수고 ‘이것이 행정 절차요’라고 말하며 약품을 꺼내갔다는 일화가 있다. 여성과 간호사에 대한 편견, 위생이라는 개념의 정립과 새로운 병원제도의 도입 등을 위해 그는 평생을 싸웠다. 자신의 이상을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시하는 것뿐 아니라 통계자료를 통한 설득, 실행을 통한 증명, 그리고 사회적 투쟁을 통해 하나하나 구체적인 현실에서 구현했다는 점에서 나이팅게일의 생애는 위대하다. 위대함 그 이상이다.

글=황인희

전투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 더 많아…간호의 중요성 일깨운 전쟁

흑해의 크림 반도는 언제나 화약고였다. 1853년부터 3년간 지속되었던 크림 전쟁의 전쟁터가 되었고, 4년전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이었던 크림 반도의 영유권을 주장해 점령했다.

160년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원하는 것은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원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북쪽 발트해와 동쪽 블라디보스톡에 항구를 두고 있지만, 겨울에는 얼어버린다. 러시아로선 겨울에도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흑해 연안에 영토를 확보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크림 전쟁은 오스만 투르크가 먼저 걸었다. 1853년 10월 4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러시아 니콜라스 1세에 선전포고를 했다. 중동과 동유럽, 아프리카 북부를 장악한 오스만 투르크의 힘이 쇠하고, 러시아의 힘이 강해지던 때였다.

전쟁은 종교 분쟁에서 시작된다. 종교적 광기가 개입되면 전쟁은 피도 눈물도 없어진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국내 카톨릭의 인기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지에서 카톨릭의 특권을 달라고 투르크 술탄에게 요구했다. 당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투르크가 지배하고 있었다. 술탄은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성지 관리는 그동안 그리스 정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러시아 차르가 담당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774년에 체결한 조약을 거론하며 예루살렘 성지의 관리권을 주장했다. 이에 투르크 술탄이 프랑스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고 러시아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자 프랑스가 무력시위를 했다. 나폴레옹 3세는 전함을 흑해에 파견해 러시아 차르에 압력을 넣었다. 이에 1853년 7월 러시아군은 지금 루마니아 영토인 몰다비아·왈라키아를 침공해 오스만 투르크를 북쪽에서 위협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누가 먼저 선전포고를 하는지의 형식만 남았을 뿐이다.

전쟁은 처음에 오스만 투르크와 러시아 두나라 사이에 전개되었지만, 곧이어 프랑스와 영국에 투르크 편에 서고, 사르데냐 왕국이 가담하면서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전투는 흑해 일대와 동유럽의 다뉴브강 일대, 카프카즈 산맥에서 벌어졌다. 개별적 전투에 관해서는 수많은 저작물들이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 크림전쟁 전투도 /위키피디아

이 전쟁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현대 기술이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포탄과 철도, 전보가 오갔다. 또 종군기자가 전쟁에 참여해 전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첫 전쟁이었으며, 카메라로 담은 전투 장면이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크림 전쟁이 역사적으로 조명받는 이유는 엄청난 사상자를 낸 전쟁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참전 인원만 150만명에 이른다. 투르크등 연합군이 60만, 러시아군이 90만명 참전했다. 사망도 많았다. 사망자가 오스만 투르크 4만5,000명, 프랑스 10만명, 영국군 2만명이었고, 러시아 사망자는 무려 45만명에 이르렀다.

물론 최신 무기가 등장했기 때문에 사망자가 큰 탓도 있지만,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러시아의 경우 전투를 벌이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무려 37만명이나 되었다. 전염병이 그 원인이다.

▲ 크림전쟁 /위키피디아

크림 전쟁은 전쟁의 비참함과 잔혹함보다 전쟁에서 병참, 의료, 지휘관의 실패 등에 대한 이슈가 더 큰 문제로 부상했다.

특히 플로렌스 나이팅 게일(Florence Nightingale)의 의료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영국군 사망자가 러시아나 프랑스에 비해 적었던 점은 전쟁 의료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청소년시절부터 가난한 이웃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나이팅게일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읽은뒤 간호학을 공부하고 전쟁터로 갔다. 나이팅게일은 전쟁 발발 이듬해 38명의 잉글랜드 성공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야전 병원에서 초인간적인 활약을 보였다. 나이팅게일은 유능한 행정가요 협상가였다. 그녀는 관료주의에 물든 군 간부들을 설득했고, 병원에서 쓰는 물건들을 세심하게 조사했으며, 무질서한 병원에 규율을 세웠다. 환자의 사망률은 42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뚝 떨어졌다는 사실은 나이팅게일이 뛰어난 병원 행정가임을 말해준다.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위키피디아

이 전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는 패전국 러시아였다. 니콜라이 1세는 전쟁 중인 1855년 2월에 사망하고, 알렉산드르 2세는 그 뒤를 이어 1856년 3월 파리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후 러시아에서는 패전을 계기로 근대화 운동이 일어나, 1861년의 농노해방을 비롯하여 일련의 개혁사업이 추진되었다.

김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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