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중 건축가 - gimchanjung geonchugga

한남동 오피스빌딩, 2013 3차원 곡면 프레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파사드는 시점에 따라 다양한 시각적 변화를 주어 새로운 도시 경관 구성에 일조한다. ©김용관

원래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다가 건축가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자동차는 언제나 제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반대를 하셨어요. 하루는 아버지가 지인을 통해 국내 자동차 회사 디자인팀 책임자급을 만나게 해주셨는데, 롤 모델을 만난다는 생각에 꿈에 부풀어 찾아갔지만 현실은 제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분이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 “저 자동차가 내가 모두 디자인한 줄 아느냐” 하는 식으로 어린 지망생의 꿈을 사정없이 짓밟으시는 거예요. 그 뒤로 자동차 디자이너의 꿈은 포기하고 건축과에 진학했습니다. 자동차를 좋아했지만 화가 어머니 덕분에 언제나 집에는 건축 잡지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온 설계도를 따라 그리곤 했어요. 아주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따라 외출하고 돌아와 거리에서 봤던 건물과 길을 회상해가며 그리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얘가 커서 지도 가게를 하려나?” 하고 싫어하셨죠(웃음).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어머니를 따라 화방을 갔었는데, 그곳에서 로트링 펜을 발견하고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쉽게 접하지 못했던 펜으로 가는 선을 그려나가며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또 제 마음대로 상상해 디자인한 미래 도시의 모습을 많이 그렸는데, 그 스케치를 제가 유학 갈 때 포트폴리오 첫 장에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스케치를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렇다고 작품처럼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고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가벼운 스케치 정도죠. 주로 이면지에 그리고 하나하나 바인딩 노트에 끼워 보관합니다.

대표님의 유학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하버드로 유학을 간 것은 순전히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버드를 가장 좋은 학교로 꼽는데, 과연 얼마나 잘하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던 거죠.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막상 가보니 특별한 것이 없더군요. 그럼에도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얻었는데, 바로 리더가 되기 위한 소양이었습니다. 건축가는 언변, 논리력, 글 솜씨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균형 있게 다루며, 이를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프로젝트를 어떻게 포장하고 정리하느냐 하는 문제죠. 저는 이런 것을 교과 과정에서가 아닌 같은 학생들에게서 배웠어요. 미국 대학은 저마다 학풍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컬럼비아 대학은 실험적인 교육을 하고 쿠퍼 유니언은 창의성을 강조하죠. 하버드에서는 ‘관계’와 ‘소통’을 배운 것 같습니다. 또 하버드 재학 시절 교환학생 자격으로 스위스 연방 공과 대학(ETH Zurich)에서 수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스위스 건축다운 극도의 정교함을 보았죠. 이런 특유의 결벽증적인 시스템 때문에 학생들이 매우 힘들어하긴 했지만, 이런 완결성과 치밀함을 보면서 건축을 함부로 장난치듯 다루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미국에서는 건축가 우규승 선생 사무실에서 일했습니다. 건축가로서 당시의 경험이 어떤 영향을미쳤나요?
건축가로서 보여야 할 태도와 자세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전에는 보스턴에 있는 제법 큰 건축 회사에서 일했는데, 제가 주도한 프로젝트가 공모에 당선이 되었음에도 비즈니스적인 문제로 크레디트에서 제 이름이 빠진 일이 있었어요. 이 일에 분노해 회사를 나왔는데, 친분이 있던 우 선생님이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우규승 선생님은 결코 흥분하지 않는 분입니다. 거기에 굉장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는데요, 회사에 처음 갔을 때 일입니다. 우 선생님이 백인 직원들 앞에 나타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어서서 선생님을 맞이하는 거예요. 모두 명문 아이비리그 출신의 자존심 센 친구들이었는데 말입니다. 강요가 아닌 존경심에서 나오는 태도라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항상 차분하게 상대를 존중하는 우 선생님을 보면서 상대 방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자신에게 돌아가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절대 직원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으시는데, 물론 저는 그분보다 감정 폭이 훨씬 큽니다만, 선생님의 영향으로 학생들이나 직원들에게 반말을 쓰지 않습니다. 존댓말이 더 무서운 효과도 있어요(웃음). 저는 직원들이 제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위해 일하기를 원합니다. 또 더 시스템랩이 건축가를 배출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길 원합니다. 우리 회사에서 인큐베이팅해서 독립하라고 그래요. 이런 마음가짐에 따라 건축가로서 최소한의 존중을 해주는 것입니다.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 2011 도로 사선, 정북 방향 일조권 등 각종 건축 규제가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진행한 프로젝트다.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기위한 형태로 시작해 스티로폼 거푸집을 사용한 독특한 형태로 발전했다. ©김용관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만큼이나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 역시 인상적입니다. 불황인 건축계에선 상상 못할 인센티브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고 이직률이 사실상 0%라고 들었습니다.
20대 건축학도 시절에는 무조건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채우고 싶어서 건축을 했던 것 같아요. 30대는 일종의 수련 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 기간이 너무 길다는 점입니다. 디자인 분야와 마찬가지로 매일같이 밤을 새우는데, 월급은 적고 보상이 너무 적은 거죠. 그러다 보면 순수하게 건축이 좋아서 시작했던 사람들도 이런 실정과 자긍심 문제로 떠나게 됩니다. 저는 프라이드를 가진 건축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프라이드에는 경제적 보상도 포함되어 있죠.

일한 것보다 더 받으면 사기꾼이고, 덜 받으면 바보라고 생각해요. 일한 만큼 받는 것이 프로라고 생각했고 그런 건축가가 되는 것이 30대에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반드시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희 회사는 유학을 가거나 직종을 바꾸는 경우 말고는 아직 이직한 직원이 없어요. 이제 40 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공공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남도 좋아야 하지 않은가’,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면 좋지 않은가’ 하는 열망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수익을 내야만 가능한 일인데, 더 시스템랩은 다른 건축 사무소에 비해 클라이언트 지향 마인드가 강한 편인 것 같습니다.
디자이너와 건축가 모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DNA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갖고 싶은 물건을 디자인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엄연히 서비스업이고,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저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요소를 얼마나 집어넣을 수 있느냐가 이 일을 즐길 수 있는 관건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어요.

우리나라 건축주들은 대부분 싸게 그리고 빨리 건물을 짓기를 원합니다. 비용과 기간이 가장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는 만큼 다른 건축가들보다 싸고 빠르게 짓는 방법을 고민했고, 이 과정에서 바닥에서부터 지어 올리는 건축이 아닌 공장에서 부재를 생산해 현장에 도입하는 방식을 생각했습니다. 플라스틱을 건축에 활용하게 된 건 이런 과정에서 착안한 것이었죠. 그렇게 기간을 줄여 비용을 절감하면 클라이언트는 관대해집니다.

내가 건축물을 동그랗게 짓든 세모나게 짓든 수용할 가능성이 커지죠. 건축가가 시간과 비용도 맞추지 못하는 상태에서 동그란 건축을 제안한다면, 아마도 클라이언트는 “당신이 동그란 건물을 짓고 싶어서 예산과 기간이 초과되는 것이 아니냐?”라며 반문할 거예요. 저는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예산부터 물어봐요. 그다음에는 언제 완공해 문을 열고 싶은지를 묻고요. 젊은 건축가를 찾아올 때 합리적인 금액과 기간을 들고 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젊은 건축가를 찾는 이유는 딱 하나예요. 싸니까(웃음).

디자인이나 건축은 사실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죠. 때때로 나름의 논리와 수치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성적(定性的)인 분야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정량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바로 시간과 돈이에요. 그래서 저는 기본적으로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비용과 시간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이것은 사실 제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며 동시에 가장 큰 스트레스이기도 합니다. 저는 전체 설계 과정의 50%가량을 공사 기간과 예산을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투입합니다. 그리고 계약할 때, 클라이언트로부터 성공적으로 비용과 기간을 줄일 경우 인센티브를 지불할 것을 약속받죠. 절감하는 기간에 대한 금융 비용을 감안해 인센티브를 제공해달라는 것인데, 이렇게 받은 금액으로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줍니다.

1 국립현대미술관 큐브릭, 2011 3차원 정육면체 FRP 큐브를 쌓아 조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형태의 모호성’을 통해 시각적 형태 결정을 작가가 아닌 대중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특징이다. ©김용관 
2 미래디자인융합센터(2015년 3월 완공 예정) 한국디자인진흥원과 경남 양산시가 미래 디자인 산업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건립 중인 디자인 센터. 디자인을 다루는 연구소의 타이폴로지로 ‘디자인 헛간(Design Barn)’이라는 콘셉트를 제안했다. 

사실 건축가들이 다소 낭만적인 면모가 있어서, 클라이언트가 황당한 기준을 제시하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대한 대안을 찾으려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클라이언트의 상황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드라마 속 장면처럼 클라이언트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고 서류 뭉치를 집어 던지는 것은 사실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태도죠. 묘한 것이, 건축가는 클라이언트가 지불한 비용으로 지은 건축물을 보고 ‘내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가 한편으로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프라이드를 가지고 디자인했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 갔으면 좋겠어요. 그 이상 가면 건축가 스스로가 힘들어져요. 이것도 결국 비즈니스고, 비즈니스 차원에서 작품이 완성된 이후에는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설계를 할 때 건물이 내 작품이란 생각이 너무 강하면 건축주는 싸워야 할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건축이라는 범주 안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황당하다고 생각하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요구일 수 있거든요. 그런 만큼 건축주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잘 컨트롤해나가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건축가가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지나치게 앞서가는 것 역시 별로 의미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것보다 반 걸음 정도만 앞서가면 된다는 것이죠. 건축은 역사가 오랜 분야인 만큼 혁명은 없다고 봐요. 점진적인 발전만 있을 뿐이죠.

한강시민공원으로 들어가는 보행자 통로인 ‘토끼굴 프로젝트’에서 처음 플라스틱 소재를 선보인 이후 자주 플라스틱을 활용해왔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플라스틱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토끼굴 프로젝트는 꽤나 촉박하게 진행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프로젝트를 빠르게 진행하기에 적합한 재료를 찾다가 자재를 양산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때 폴리카보네이트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막상 사용해보니 효과가 괜찮아서 래미안 갤러리와 가로수길 MCM 파사드 같은 이후의 프로젝트에도 사용하게 됐습니다. 산업 디자이너가 고 싶었던 본능적 욕구를 충족할 기회가 생겼던 것이죠.

기존 건축 재료와는 전혀 다른 재료를 쓰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요?
새로운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은 곧 그만큼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발주처는 언제나 기존에 있던 사례를 보여주길 원하기 때문에 새로운 자재를 쓴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구상한 대로 결과물이 나왔을 때는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죠.

구름에 리조트, 2014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 지역에서 이전ㆍ재현한 고택 단지를 리조트로 활용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아름다운 전통 속에 호텔의 현대적 편리함을 결합시키고자 했다. ©황인철

이런 소재 선택은 기존 건축가들의 발상과는 사뭇 달라서 흥미롭습니다.
건축은 산업적 측면으로 보자면 가장 오래된 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기본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분야죠. 예를 들어 구부러지는 휴대폰이 시중에 등장하면 휴대폰 시장의 판도가 바뀝니다. 하지만 건축은 아무리 혁신적인 형태가 등장한다고 해도 급진적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아요.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구성 논리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강성(强性)이 강한 산업인 만큼 건축 생산 방식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어려워요. 저는 이런 생산 방식의 솔루션을 기존 테두리 안에서 찾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고 시간과 비용을 효과적으로 줄이려면 건축 내부의 논리가 아닌 다른 산업의 논리를 가져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산업 디자인을 벤치마킹하게 됐습니다. 결국 제한이 다른 분야의 방법론을 차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죠.

디자이너로서 정체성이 강하고 산업 디자인적 요소를 건축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만큼 두 영역에 대한 이해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저는 건축을 제품 디자인 차원에서 이해하곤 해요. 부품화나 생산 개념을 적용한 것이 대표적이죠. 하지만 제품 디자인과 건축은 근본적인 차별점도 분명합니다. 제품 디자인은 훨씬 더 표준적 기준을 세워야 하는 분야고, 공간을 넘어 퍼져나가는 특징이 있죠. 반면 건축은 고정되어 있고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의 성격이 강합니다. 주변 지역의 맥락을 모두 수용하는 유기체적 속성이 있는 만큼, 한번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나면 똑같은 것을 반복할 수 없다는 특징도 있죠. 가치 문제로 봤을 때도 두 영역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무조건 오래 버텨야 하는 건축과 달리 디자인은 아무리 명품이라도 사용 주기 안에 빨리 유통되고 빠져주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건축은 소비 단계에서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앞으로 건축과 제품 디자인의 가치 모두 유니버설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니버설이라는 개념은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폭력적인 양상도 있다고 봐요. 미래의 제품 디자인은 건축처럼 원본적 성격을 더 띠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좀 더 개인 맞춤형을 추구하는 마이크로 커스터마이제이션(micro-customization)이 일어날 것이란 이야기죠.

건축은 어떨까요? 훨씬 더 어려운 이야기가 될 테지만 역시 이런 성향이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 건축은 얼핏 커스터마이징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은 사실 매우 표준적인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손잡이 높이나 계단 높이를 보세요. 계단 높이가 꼭 17~18cm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형적인 유니버설 디자인에 기반을 둔 사고죠. 하지만 키가 더 커서 보폭이 넓은 사람은요? 앞으로 건축과 디자인이 서로의 영역을 수렴할 것이라고 보는데, 양쪽 모두에 관심을 두고 있는 만큼 이 영역들이 변해가는 흐름을 보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1, 2 KH 바텍사옥, 2012 건물 구조를 외부로 노출시켜 전자 부품을 생산하는 첨단 기업의 이미지를 입면에 반영했다. 추후 용적률 완화를 고려해 전 층 정면부에 증축 가능한 공간을 두고 증축 이전에는 테라스로 활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최근작인 한남동1은 시안만 수십 개를 만들었다고 들었는데요.
저는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이 있어요. 그래서 시안을 많이 만드는 편이죠. 한남동은 하드를 갈아 가면서 만든 프로젝트입니다. 가지 친 것까지 포함하면 수백 개는 될 거예요. 건축주에게는 40개 만 보여줬습니다. 케이스에 따라 일부러 과격한 안도 시안으로 시도합니다. 채택이 안 되어도 남는 것이 있고, 나중에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요. 금액과 상관없이 저희 회사 건축에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거나 시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면 용도를 막론하고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시간도 꽤 쏟아붓죠. 지금은 작은 주택을 하나 1년째 상담하며 설계 중인데 아주 재미있어요. 두 자매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집입니다. 건축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모계 사회적 공간이란 현상이 흥미로워요.

‘산업적 공예’라는 개념을 중시한다고 하셨는데, 특히 더 시스템랩의 건축을 보면 모듈과 유닛에 대한 관심이 돋보입니다.
부품화 개념은 비용 및 기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언뜻 유기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논리가 내재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 제 건축물은 곡선적이고 비정형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고도로 컨트롤되는 방식입니다. 모듈은 비정형인데 전체를 관통하는 규칙은 기하학적이고 유클리드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비용을 줄이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규모의 공사 비용으로 새로운 표현을 하는 것인데 비정형으로 보인다고 하면 저희에겐 칭찬입니다.

언제나 ‘애매모호한 건축’을 선호한다고 얘기하시는데요.


논리는 명쾌해도 해석은 각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애매함을 주는 것을 좋아해요.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자기 완결성 강한 건물에는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제가 진행했던 연희동 갤러리는 사람들이 냉장고 같다고 하고 폴 스미스 매장은 이빨 같다고 하는데, 이런 예상 밖의 반응이 즐거웠어요. 사람들이 보고 피식 웃을 수 있는 그런 건물이 좋아요. 하지만 이런 즐거움이 키치로 흐르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위트 있는 스토리텔링을 구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축가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만 건물이 사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봐요. 건축적 축선이나 동선 같은 논리 이상으로 부드럽고 감성적인 부분이 사람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을 알려면 사람 자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SK행복나눔재단 사옥, 2012 업무 능률 향상과 쾌적함을 위해 각 업무공간마다 총 5개의 중정과 테라스를 도입했다. ©김용관 

건축 디자인에 대한 감성적 접근이 강해 보입니다. 프로젝트마다, 또 건물의 용도에 따라 필요한 감성이 다른가요?
사무실이나 집처럼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편안함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싫증나지 않는 편안함. 이런 공간을 너무 디자인으로 특정화 해버리면 변화의 폭이 적어지고 힘들어지죠. 반면 상업 시설은 아주 특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일탈이에요. 사람들은 집과 똑같은 느낌의 공간을 시간과 돈을 써가며 찾으려 하지 않죠. 따라서 상업 시설을 디자인할 때는 과격 할지라도 특정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상업 시설은 철저히 소비자 중심으로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맥락(context)이 더 중요해지죠. 신도시냐 구 도심이냐, 배후 아파트 단지가 크냐 작냐에 따라 연결되는 맥락이 달라집니다. 주변 커뮤니티에서 먼저 인기가 높아야 다른 지역에서도 손님이 오는 법이니까요. 지하철역 옆에 자리 잡은 상업 시설이라면 멀리서도 손님이 올 것 같지만 사실 지역 주민들을 우선시해야 해요. 주변에서 문제를 풀고 그다음에 광역을 생각해야 합니다. 광역권은 지속적 소비자는 아니고 어쩌다 오는 손님입니다. 그다음에는 고객이 되는 지역 주민의 캐릭터를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ㆍ유아를 둔 가정주부의 비중이 큰 지역이라면 일단 죄책감을 없애주는 게 우선입니다. 남편은 돈 벌러 가고 애들은 학원에 보내고 나면 브런치를 먹고 수다를 떨어도 부담감에 마음이 무거워지겠죠. 그런 곳에는 영ㆍ유아 학원 프로그램을 접목하라고 권해요. 잠깐 기다리다가 애들을 데리고 가는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거죠. 저는 자주 쇼핑을 가는데 물건보다 사람 보는 게 좋아서 가요. 상업 시설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섞이잖아요. 도도한 강남 아줌마부터 뜨내기 손님, 그들을 대하는 점원의 태도까지…. 그 안에 참 많은 게 있어요. 상대적으로 공동의 목표가 너무 강한 야구장 같은 공간은 흥미가 떨어지죠(웃음).

자동차에 대한 애정이 대단합니다. 차를 사기 위해 건축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죠(웃음).
자동차가 고객을 사로잡기 위해 얼마나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썼느냐를 보면서 공부를 하는 겁니다(웃음). 가령 포르셰 파나메라(Porsche Panamera)를 보면 현대인에게 죄책감을 없애주는 절묘한 세그먼트예요. 스포츠카를 사고 싶은 재력이 있는 남자라도 가족이 있는데 스포츠카를 산다는 건 혼자 즐기겠다는 것이거나 애인과 즐기려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죠. 그런 죄책감을 없애주는 전략이 흥미로워요. 시속 300㎞까지 달릴 수 있다 해도 실제로 자동차를 그렇게 모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다만 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잠재력을 소유했다는 느낌을 주는 거죠.

최근에는 ‘지속 가능성’, 특히 심리적 지속 가능성을 무척 강조합니다. 서초동 바텍 사옥은 땅의 용적률이 완화될 때를 대비해 나중에 증축하기 좋도록 미리 구조 외벽을 만든 발상도 인상적이었지만 외벽에 발코니를 둬 심리적 이완 공간을 추구했다는 설명도 흥미로웠습니다.
바텍 사옥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다른 업체들은 수직 증축이 가능한 안을 제시했지만, 우리는 외벽을 좀 더 앞으로 빼서 건물은 그대로 둔 채 증축을 하기 쉽게 한 솔루션을 제안했습니다. 외벽에 발코니를 둔 것은 전화 받기 좋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전화가 오면 누구나 나가서 통화를 하는데, 건물과 바깥이 너무 직접적으로 만났을 때 오는 불안감을 완화해주고 싶었죠. 또한 반드시 사용자들이 외기를 접하게 해주자는 것이 제 지론이에요.

하루 8시간 넘게 사무실 한 장소에서 근무하는 것은 아무리 공기 조절이 잘되어도 고통스러운 일이죠. 잠깐이라도 외부 바람을 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굳이 1층까지 나가지 않아도 바깥 바람을 쐴 수 있는 빌딩을 만든 거죠. 그리고 바깥에 굳이 안 나가도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배려가 될 거라고 봐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오피스 공간의 심리적 지속가능성입니다. SK행복나눔재단 빌딩에도 건물 사이사이에 데크를 두었어요. 발주처는 외부 공간이 면적 손실이라고 생각하면 안 하려고 합니다. 이걸 면적에서 빼는 방식으로 풀면 다들 원하더라고요. 건물이 더 커 보이는 효과도 있고요.

단도직입적으로 어떤 건축을 좋아합니까?
인터랙티브한 건축을 선호합니다. 경우에 따라 만져보고 싶은 그런 건축이오. 또 사람들 머릿속에 물음표 하나를 던질 수 있는 그런 건물을 좋아합니다. ‘저것은 대체 무슨 건물일까?’ ‘어떤 소재로 만든 걸까?’ 이런 질문이 생기는 건축 말이죠. 사실 건물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잖아요. 일상과 도시의 소소한 부분인데 너무 이상해도 안 되고, 보는 사람이 얼굴 찌푸리게 해서도 안되고. 대단한 의미보다도 일상에서 호기심을 느 끼게 하는 것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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